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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44화 (59권) (1,134/1,794)

템빨 5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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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59권 - 01화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무엇이든 지령만 내려주세요. 하찮은 인간을 가엽게 여기시어 위대하신 지옥의 군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세요.”

흑마법사 랭킹 1위이자 야탄의 종.

대악마 소환의 주역이기도 했던 로제는 이미 수많은 위업을 달성한 플레이어다. 야탄교 입장에서 그녀의 활약상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최고’라고 평가하진 않았다.

유라가 야탄교를 떠나지만 않았어도 로제는 영원히 2인자에 불과했을 거라고 말할 정도였다.

세간의 그런 평가가 로제를 더욱 집요하게 만들었다.

유라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로제는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게임을 플레이해왔다.

구토를 유발하는 생김새에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대악마의 곁에 찰싹 붙어서 아첨하는 일쯤이야 그녀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비위도 좋아.’

‘역시 보통 독한 게 아니라니까.’

단탈리안은 하나의 목 위로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는 소년소녀의 얼굴, 고뇌를 짊어진 청년의 얼굴, 슬피 우는 여인의 얼굴, 자신감 넘치는 신사의 얼굴, 기품 있는 부인의 얼굴, 온화한 할머니와 성난 할아버지의 얼굴.

무려 8개의 얼굴이 하나의 목 위에 꽃처럼 펼쳐져 있었으니 기괴하고 섬뜩했다.

한데 로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를 따라고 있었다.

“흐음....”

8개의 얼굴 중 자신감 넘치는 신사의 얼굴이 입을 열었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오래간만에 보는구려.”

성난 할아버지의 얼굴이 버럭 소리쳤다.

“겁대가리가 없는 게지! 겁대가리가 없는 거야!”

소년과 소녀의 얼굴이 합창하듯 입을 모아 외쳤다.

“겁 없는 인간!”

“일찍 죽겠네!”

“.....”

내내 웃는 낯을 유지하던 로제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손에 펼치고 있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떠드는 얼굴들을 보자 기이하고 섬뜩하기 짝이 없어 온몸에 소름이 돋은 것이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다시 관리한 그녀는 단탈리안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노력했다.

“지금 읽고 계신 책은 무엇인가요?”

세계의 모든 지식이 담겨있다는 단탈리안의 서.

그것의 위력을, 로제는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교황청 침공전 당시 그리드에게 목숨을 잃었던 야탄의 일곱 번째 종 구릉은 단탈리안이 건네준 ‘한 줄’의 지식 파편만을 읽고 무도의 달인이 됐었다.

로제는 단탈리안의 지식을 원했다.

어떤 지식이든 좋으니 그것으로 인해서 발전해 유라를 뛰어넘는 초인이 되고 싶었다. 자신이 유라보다 더 나은 존재임을 세상에 확실하게 증명하고 그리드, 크라우젤과 함께 최고의 반열에 오르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온화한 할머니 얼굴이 입을 열었다.

“역사 짧은 인간의 나라가 멸망하는 역사가 쓰인 책이란다.”

“역사 짧은 인간의 나라요?”

며칠의 고생 끝에 드디어 호감도가 오르기 시작한 걸까.

친절하게 말해주는 단탈리안의 태도에 화색을 띠운 로제가 재차 질문하자 온화한 표정을 유지한 할머니 얼굴이 대답해주었다.

“템빨국이라는 나라가 있단다. 곧 다가올 미래에 멸망해 사라질 나라지.”

역사란 자취이며 기록이다.

즉 과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역사라고 표현했다.

불변할 미래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표현이었다.

“그 미래란.”

온화한 할머니 얼굴이 처음으로 책에서 시선을 뗐다.

그녀의 시선을 쫓아 저 앞에 우뚝 선 펠트리노 요새를 바라본 로제의 눈꼬리가 무섭게 치켜져 올라갔다.

요새 성벽 위에 꽂힌 여섯 개의 국기 때문이었다.

중앙에 있는 국기가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다.

망치와 모루....

빌어먹을 그리드가 이끄는, 그리고 재수 없는 유라가 소속해 있는 템빨국의 국기였다.

꽈드득!

로제가 이를 갈았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리드에 의해서 몇 번이나 퀘스트를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 척살령까지 받았던 로제의 템빨국을 향한 원한은 무서울 정도로 깊었다.

단탈리안의 일곱 개 얼굴이 할머니 얼굴의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 순간 현재가 되었다.”

“템빨국은 오늘.”

“이곳에서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할 것이며.”

“파국으로 치달을 게다.”

“템빨왕과 데빌 슬레이어....”

“지옥을 위협하는 모든 변수가.”

“이제 사라진다.”

촤르륵!

단탈리안이 책장을 넘겼다.

두꺼운 책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 끝에 중간에서 멈추자 단탈리안의 전면으로 붉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지식이 많고 기억력이 뛰어난 로제에게도 생소한 형태의 마법진이었다.

처음 보는 것이니 생소할 수밖에 없다.

단탈리안의 서, <기적의 장>에 기록 된 이 마법은 인간의 평생 따위로는 구경조차 못해볼 전설의 대마법이었으니까.

“메테오.”

콰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붉게 타오르는 운석이 비명을 토하는 우주로부터 쏟아져내려왔다.

“....!!”

『....!!』

로제와 야탄교 신도들, 그리고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이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넋을 잃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들 모두가 펠트리노 요새와 함께 통째로 소멸할 6개국 연합군의 미래를 떠올렸다.

불과 수초 후에 일어날 미래였다.

실제로 본 메테오의 연출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전설에 기록 된 메테오의 위력엔 전혀 과장이 없을 것만 같았다.

“어, 어디로 피해야....”

요새 안 연합군 역시 자신들의 최후를 예측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십 개의 운석을 목격한 순간부터 뭘 어찌해야할지 몰라 그저 넋이 나가있을 뿐이었다.

『제9위 대악마였던 헬가오를 봉인한 검성 뮐러조차도 단탈리안은 해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죠. 단탈리안은 비록 25위 대악마에 불과하지만 전능하여 한 자릿수 대악마보다 더 까다로운 존재라고 전해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까다로운 수준을 넘어서 무적이나 다름없는 건 아닐까 싶군요.』

『책에 기록 된 지식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시점에서부터 단탈리안의 실력이 입증된 거죠. 단탈리안은 순위의 개념을 초월하는, 어찌 보면 최강의 대악마가 아닐까요?』

해설진 또한 절망적인 관측을 내놓을 뿐이다.

충분히 근거 있는 추측이었다.

단지 수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까지 지닌 이상 단탈리안은 거의 신적인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단, 알아둬야 할 사실이 있다.

똑같은 마법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위력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깟 게 메테오라고?”

혼란에 빠진 펠트리노 요새.

적막이 드리운 그곳에 한 사내의 조소가 메아리쳤다.

요새 안의 모든 사람들이 사태를 비웃는 미치광이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고, 수백 대의 카메라 또한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초점을 맞췄다.

『저자는....?』

해설진이 경악한다.

-지렸다.

-역시 템빨국에 있었구나.

-어이어이! 드디어 등장하는 거냐구!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화면을 가득 채우며 등장한 은발, 적안의 사내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버렸다.

“디스인티그레이트.”

번쩍!!

우주의 별을 ‘끌어내리는’ 물리적인 과정이 필요한 메테오와 달리 마력으로 빚는 빛의 창은 즉시 현현한다.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이 행사한 대마법이 펠트리노 요새를 폭격하는 수십 개의 운석을 모조리 꿰뚫고, 폭발시켜 먼지로 전락시켰고,

“메테오.”

쿠르르르르르릉!!

우주는 다시 한 번 비명을 내질렀다.

검게 물든 하늘로부터 새롭게 쏟아져 내린 수십 개의 운석은 펠트리노 요새가 아닌 단탈리안과 야탄교 신도들을 폭격했다.

“히, 히익....!”

“이게 무슨....!”

로제와 야탄교 신도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당연하게 기다렸던 미래의 급변이 그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반면 단탈리안은 침착했다.

아니, 도리어 웃고 있었다. 여덟 개 얼굴 전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브라함, 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단탈리안은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브라함이 부활했다는 사실도, 결국 이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까지도 전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촤르르르륵!

마법의 위력이 시전자의 마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기본 상식을 모를 리 없다.

자신은 브라함과 달라 브라함의 메테오를 마법으로 상쇄할 수 없단 사실을 알기에, 단탈리안은 책의 다른 부분을 펼쳤다.

<무쌍의 장>

검성 뮐러의 검술이 기록된 페이지였다.

스파앗!

허리춤에서 검을 뽑은 단탈리안이 그대로 휘둘러 반월을 그렸다.

무쌍심법으로 들끓는 검기로부터 파생한 반월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고 운석들이 순차적으로 베여 소멸했다.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법칙이 깃든 검성의 힘이었다.

천하의 브라함이 뮐러에게만큼은 한 수 접어둘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뮐러가 나를 어쩌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지.”

하나의 기술, 한 명의 힘만으로는 나를 꺾을 수 없다....

그런 단언이 깃든 단탈리안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는 그때.

“급성장!!”

쿠르르륵!!

대지가 요동쳤다.

갑자기 물결치기 시작한 대지로부터 피어오른 온갖 식물들이 단탈리안을 향해서 쇄도했다.

“같잖은.”

단탈리안이 콧방귀 뀌었다. 마구잡이로 자라나며 자신을 덮쳐오는 모든 식물을 검으로 베어 넘겼다.

그는 피아로의 존재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대 전설들과도 싸워왔던 그의 입장에서 당대 전설 피아로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꽈앙!!

식물들을 베어 넘기며 돌진한 단탈리안이 내지른 검이 피아로의 농기구와 맞부딪쳤다.

쩌저적, 단탈리안의 일검을 막아낸 피아로의 호미와 낫이 균열을 일으켰다.

아직 무쌍심법을 익히기 전의 피아로였다면 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농기구와 함께 통째로 베여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쌍심법을 익힌 시점부터 뮐러의 검술과 결을 같이하게 된 피아로의 농술은 견고했고 호미와 낫은 끝내 베어지지 않았다.

“그래봤자....?”

비웃은 단탈리안이 재차 검을 휘두르려다가 멈췄다.

두근!

단탈리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지를 조우한 까닭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익을 펼치고 다가오는 백발의 기사.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시선을 사로잡힌 단탈리안이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단탈리안의 서 그 어디에도 저 ‘눈’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뭣이....!”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지른 단탈리안이 뒷걸음쳤다. 그러면서 황급히 책장을 넘겨보았지만 역시나.

그는 끝내 저 불길한 눈의 정체를 찾아내지 못했다.

‘저게 인간이라고?’

미지가 유발하는 것은 두려움뿐이다.

단탈리안이 자신보다 타고난 격이 높은 고위 대악마들과 신들을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

단탈리안은 전능하지 않다.

만약 그가 정말로 전능했다면 고작 25위의 자리에 머물렀을 리가 없다.

그는 자신보다 격이 낮은 존재들, 예를 들어 ‘인간’에 대해서는 모든 걸 통찰하고 그로 인해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격이 높은 상대는 통찰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약했다.

신조차 두려워하는 메르세데스의 <혜안> 앞에서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황제 바사라의 예측대로 메르세데스의 혜안은 단탈리안에게 상극으로 작용했다.

서걱-!

“큭....! 크아아악!!”

메르세데스의 출현과 함께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 책.

그것을 원망하는 단탈리안의 비명이 전장에 메아리쳤고, 비명은 신호가 되어 템빨국과 연합국의 강자들이 출진을 개시했다.

십공신과 각국 랭커들의 공세 앞에서 로제와 야탄교 신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단탈리안 또한 빠르게 수세에 몰렸다.

역대 최강의 전설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검성 뮐러가 토벌하지 못했던 거악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최후를 맞이한 날이다.

세계는 진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리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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