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8권 - 22화
대악마의 출현에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런 전조가 없다는 점이다.
대악마는 늘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그렇기에 재앙이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번 사태에 세상이 발칵 뒤집힌 이유다.
한 마리의 대악마가 하나의 국가를 멸망시키는 과정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던 인류가 아닌가.
한데 다섯 마리의 대악마가 동시에 나타났다고?
도대체 무슨 수로 대처하라는 거지?
월드 메시지의 등장과 함께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뭘 어찌해야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로 이때 바사라가 구심점이 된 것이다.
“저는 이전까지의 황제들과 달라요.”
사하란 제국의 가장 큰 강점은 광대한 영토와 수십 억 인구를 보유했다는 점에 있다.
제국의 시야는 대륙의 거의 모든 부분에 미쳤다.
제국이 50개 이상의 국경을 관리하며 돈과 인력을 쏟아 붓는 건 괜한 헛짓거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취합해서 정확한 정보를 만들고 이를 다시 전파하는 제국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섯 마리의 대악마가 탈리마를 떠나 화산지대를 넘어선 시점부터 제국에게 쭉 위치를 발각당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온갖 형태로 존재하는 제국의 수많은 척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악마들의 뒤를 쫓고 있으며, 그들이 보내는 정보는 황제 바사라에 의해서 다시 대륙 전역에 전파되는 중이다.
역대 황제들이 대악마의 침공을 멸시하고 좌시하며 좋은 장기 말쯤으로 치부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그렇다.
바사라는 공생을 꿈꿨다.
오직 제국에 의한, 제국을 위한 정치는 그녀의 목적이 아니다.
다른 국가들과, 다른 인종과 함께 살아가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천 년 제국을 인도하는 방법임을 그녀는 알았으니까.
‘이번 재앙은.... 모두의 화합을 이끄는 기회가 될 거야.’
제국은 너무 오랜 역사 동안 너무 많은 죄를 범해왔다.
당장 바사라가 화합을 주창해봤자 의심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피해자들은, 그리고 숨죽인 목격자들은 여전히 그녀를 신뢰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꿀 수 있다.
바사라는 믿었다.
그래서 직접 전선에 나섰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소개하고 싶었다. 자신의 진심을 알리고 싶었다. 모두와 함께 세상을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그리드 전하께서 광란의 왕을 상대로 출정해주신 덕분에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게 됐어요. 광란의 왕의 진격 경로가 다른 대악마들의 경로와 겹칠 것으로 예상되는 구간들이 있었거든요. 둘 이상의 대악마를 한꺼번에 상대해야하는 사태만큼은 피하게 된 거죠.”
바사라의 마음이 크게 벅차올랐다. 유난히 높고 푸른 하늘을 보았던 언젠가의 날처럼 웅장한 무언가를 느꼈다.
대악마들의 최초 진격 경로만 보고 광란의 왕이라는 핵심을 집어낸 그리드의 통찰력에 감동한 것이다.
바사라는 그리드가 과연 제국을 바꾼 인물답게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따라 유난히 그가 그리웠다.
‘13분. 13분만 시간을 벌어주시면 되요.’
제국은 당장 기동 가능한 병력을 전부 불러 모았다. 심지어 황실 친위대까지 전선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대마법사들이 이끄는 각 마법사단과 학자들을 모조리 소집해 역소환 마법진의 제작을 진행했다.
그게 벌써 이틀 전의 일이다.
학자들의 예상에 따르면 역소환 마법진의 완성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2시간.
광란의 왕의 도착 예정 시간보다 13분을 웃도는 시간이었다.
“여기를 보세요.”
각국의 수뇌부들과 함께 모인 막사.
바사라가 지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광란의 왕이 향하는 경로였고 그곳엔 작은 요새가 있었다.
“아크 왕국의 헨루투 요새입니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그곳에 모여서 역소환 마법진을 설치하는 중이죠.”
“역소환 마법진이라 하심은....?”
글러시안 왕국의 진테리어 공작이 감히 질문해보았다.
함께 대악마를 토벌하자는 제국 황제의 소집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국왕의 명에 따라 글러시안군을 이끌고 출정한 그는 처음부터 생경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대사하란 제국의 황제가 ‘함께’ 대악마를 토벌해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공문을 보낸 것으로 모자라, 공문에 호응할 것을 ‘명령’하지 않고 ‘부탁’했으며, 전장에 합류한 ‘소국’의 귀족들과 군대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는 등 기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역대 황제들과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이라는 풍문을 익히 듣긴 했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가해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감히 질문해봤다.
천상의 신들과 지하의 악마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천하의 지존에게.
결과는,
“다른 차원에서 올라온 존재를 다시 되돌려 보내는 마법진이에요.”
목가에 꽂히는 차가운 비수가 아닌 친절한 미소와 답변이었다.
“그렇....군요.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폐하. 자손대대로의 아니, 거국적인 명예로 삼겠나이다.”
다르다.
세상이 바뀌었다.
그 사실을 절실히 실감하고 찌르르, 울리는 가슴을 애써 추스른 진테리어 공작이 정중히 인사하자 겸양하게 화답해준 바사라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국은 이번에 침공해온 대악마 중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광란의 왕을 역소환 시킬 계획이에요. 하지만 그가 헨루투 요새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법진을 완성할 수 있을지 솔직히 미지수였죠.”
하지만 제국의 입장에선 도박을 걸 수밖에 없었다.
광란의 왕이 헨루투 요새를 지나고 머잖아 단탈리안과 동선이 겹치는 구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이 힘을 합치는 순간 아크 왕국은 손도 못 써보고 멸망할 것이 뻔했다.
적어도 그런 최악의 사태만큼은 면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헨루투 요새에 마법진의 설치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전을 성공시킬 확률은 간신히 10퍼센트에 수렴한다고 분석했었다.
광란의 왕의 진격 속도가 마법진의 설치 속도를 상회했으니까.
한데 이때 그리드가 나서줬다.
그리드라는 조력자가 그녀는 너무 감사하고 든든했다.
“하지만 이제 얘기는 달라졌어요.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드 전하의 참전으로 인해서 역소환 마법진의 완성 확률이 크게 증가했죠. 우리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보다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사라가 지도에 표기 된 다섯 개의 별표 중 가장 작은 두 개의 별표를 차례대로 지목했다.
“광란의 왕은 그리드 전하께 맡깁니다. 우리는 로노베와 단탈리안 격퇴에 모든 전력을 집중할 거예요.”
바사라의 맑고 곧은 시선이 좌측에 도열해 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사하란 제국과 템빨국을 포함한 총 11개 국가의 수뇌부들이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를 보고 웃은 바사라의 다소 불안에 찬 시선이 우측에 도열해 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오크와 엘프, 녹색 피부에 붉은 눈을 가진 소인, 다리가 짧고 등이 굽은 후족 등등 총 9개 종족의 대표들이 다소 탐탁찮단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 쉬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사라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평생 제국에 의해서 차별과 학대를 받아온 그들이 제국과 함께 하겠노라 마음먹기까지 얼마나 큰 고민과 결심이 필요했을지 알았기 때문이다.
끝끝내 회유할 수 없었던 반용족의 부재에 새삼 큰 아쉬움을 느끼며, 그녀는 제국의 책사 수백 명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전략들을 공개했다.
붉은 안개로 변신해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로노베의 공략법과 단탈리안의 ‘책’을 엿보는 방법 등을 우선적으로 제시하고 전력을 크게 2개로 나누었다.
로노베를 공략할 전력은 제국과 4개 왕국, 그리고 5개 부족으로, 단탈리안을 공략할 전력은 템빨국과 5개 왕국, 그리고 4개 부족으로.
템빨국과 한 팀으로 활동하게 됐음을 확인하고 흡족한 표정을 짓던 발할라의 국왕 아레스가 문득 의문을 제기했다.
“한데 말이외다, 폐하. 그럼 괴완공인가 뭔가 하는 그놈과 슈트리오의 손이라는 것은 누가 막는 거요?”
공통의 적을 두고 잠시 협력하게 됐다지만 발할라와 제국은 엄연히 적이었다.
아레스의 공격적인 말투를 굳이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사라 본인부터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함께하겠노라 결정해준 아레스의 넓은 도량에 내심 감탄하고 비록 적이지만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슈트리오의 손은 어디까지나 대악마의 일부일 뿐, 이성과 지혜가 없죠. 그래서 자칫 쉬운 상대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중간계의 섭리에 어긋나 자신의 몸이 불살라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지옥에서 있을 때와 똑같은 마기를 발산하므로 보통 사람은 접근조차 못해요.”
“몸이 불살라져....? 머잖아 곧 자멸할 놈이라는 거요? 그럼 무시하면 그만인 건가?”
“슈트리오의 손이 자멸하기만을 기다렸다가는 대륙의 절반이 초토화될 겁니다.”
“그럼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놈을 누가 무슨 수로 막소? 오히려 놈을 역소환 마법진인가 뭔가의 표적으로 삼아야했던 거 아닌가?”
바사라가 미소지었다.
“인류에겐 레베카교가 있으니까요.”
같은 시각, 아크 왕국의 칼란탄 요새.
“.....”
요새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요새 아래 평야.
코끼리 열 마리는 붙여놓은 듯이 크고 시뻘건 손이 대지를 짚고 서서히, 서서히 기어오는 광경에 레베카교 신도들은 근원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불길함을 응축시킨 무언가를 마주한, 그런 기분이랄까.
꿀꺽.
교황 데미안과 그를 따르는 레베카의 딸들이 선두에 있음에도 신도들은 겁에 질렸고, 몸을 떨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마신이 존재한다면 필시 저것일 거라고, 슈트리오의 손을 목도한 신도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때였다.
“흉물스럽구나.”
요새 상공으로부터 순백의 깃털이 나부꼈다.
대천사의 등장이었다.
실존하는 신화의 편린이 레베카교 신도들의 사기에 불을 붙였고,
“제가 늦진 않았겠죠?”
한 발 늦게 합류한 흑발의 미녀는 남들 몰래 두려움에 떨고 있던 교황 데미안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편 아레스는....
“....호오? 레베카교와 데빌 슬레이어의 조합이라. 그 조합으로 쓰러뜨리지 못할 대악마는 없을 것 같군.”
바사라 황제에게 칼란탄 요새의 전력에 대해서 설명 듣고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의문이 남아있었다.
“허면 괴안공은 누가 막는 거요?”
“괴안공은 불합리한 힘을 행사하는 자.”
바사라의 표정엔 이번에도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똑같은 불합리를 행사하는 검성이 유일하겠죠.”
“....크라우젤? 놈은 아직....”
쪼렙 아니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억누른 아레스의 귓전에 바사라의 이어지는 음성이 스며들었다.
“검성 본인은 외면하지만, 검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세상엔 셀 수 없이 많더군요. 그들은 굉장히 강해보였습니다.”
같은 시각, 아크 왕국령의 릴차드 요새.
“허허, 동경 받는 자의 숙명이로군.”
창성 키리누스가 웃으며 말하자 잠자코 섰던 크라우젤이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백요와 흑요, 타르마 등의 카니발 출신원들과 사신 나이트를 비롯한 수백 명의 비공식 랭커들과 어디선가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듯한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
크라우젤의 검술에 매료되어, 혹은 크라우젤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기에 모인 방랑자들이 요새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시장 한복판 같은 광경.
질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들의 표정으로부터 느껴지는 자부심만큼은 지존 그리드 부럽지 않아보였다.
“야! 크라우젤! 앞에서 어그로 제대로 끌어라! 엉?! 제대로 못했다간 나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등에 칼 꽂히는 수가 있어!!”
“방금 말한 새끼 타르마다!”
“이, 입 닥쳐!”
“쉿. 지금부터 크라우젤의 심기를 건드리는 놈들은 내가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니까 조심해라. 수 틀려서 크라우젤이 도망치기라도 했다간 우린 진짜 제국이나 템빨국한테 붙어서 싸워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
“군대 운용하는 놈들이랑 같이 활동하면 피곤하지. 그게 게임이냐? 군대지. 아무리 퀘스트 보상이 탐나도 난 그런 단체 생활은 못해.”
“그러니까 다들 여기에 붙은 거 아니겠냐. 이봐, 크라우젤! 힘내라!! 빨리 출진해서 대악만지 뭔지 하는 괴물 놈한테 좀 쳐맞고 있어봐! 그동안 우리가 실컷 딜 넣을게!!”
“....”
이틀 전, 크라우젤은 히든 퀘스트를 획득했다.
무려 황제 바사라가 제시한 퀘스트였다.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전투의 일각을 맡아준다면, 필시 많은 협객들이 당신의 편에 서서 당신의 힘이 되어줄 거라고.
의외로 사실이었다.
정작 협객은 드물다는 게 문제였지만.
홀로 성벽 위에 올라선 채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우젤이 특유의 미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나지?”
“뭐? 갑자기 뭔 개소리야? 곧 있으면 대악마가 도착할 건데 칼이라도 한 번 더 갈아 놔라!”
질문의 요지를 이해할 생각도 않고 곧장 욕설과 야유를 쏟아내는 무리들.
눈살을 찌푸린 크라우젤이 보다 확실하게 말했다.
“이곳 말고도 그리드가 맡은 전장이 있다만. 어째서 그리드의 전장이 아닌 나의 전장에 참천했느냐, 이 말이다.”
크라우젤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크라우젤보다 그리드가 훨씬 더 강했으니까.
‘대악마를 저지하라.’는 내용의 퀘스트 성공률이 높은 쪽은 당연히 크라우젤의 전장이 아닌 그리드의 전장이었다.
한데 그리드가 아닌 자신의 전장에 참가한 사람이 무려 수천 명에 달했다. 심지어 하나 같이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크라우젤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뭔 바보 같은 질문이야? 우리가 미쳤다고 13위 대악마를 잡으러 가냐?”
“아무리 그리드라도 그건 못 버티지. 1분 컷 예상한다.”
“....그런가.”
크라우젤의 시선이 다시 성벽 아래의 협곡으로 향했다.
왕관을 쓰고 은 갑옷을 입은 전사가 홀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크라우젤이 중얼거렸다.
“이곳은 전멸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