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40화 (1,130/1,794)

템빨 58권 - 20화

데카르타 산은 사하란 제국령에 속한다. 하지만 무려 2백 년 이상 반용족이 실효 지배해왔다.

이제 데카르타 산은 반용족의 땅이고, 조국이며, 고향이었다.

물론 제국이 주요전력을 파견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제국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제국이 지켜야할 국경은 최소 50개.

어느 한쪽으로 전력을 집중시킬 경우 제국은 반드시 빈틈을 드러내고 만다. 제국은 반용족을 ‘토벌’할 정도의 전력을 투자하면서까지 데카르타 산을 되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당대 황제 바사라는 이종족과의 화친을 도모하고 있었으니 데카르타 산은 앞으로도 계속 반용족의 지배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런 동요도 없군.’

헬레나의 비보를 접하고 데카르트 산을 찾아온 하오가 주위를 둘러봤다.

헬의 이름을 잇는 자는 반용족의 긍지 중 하나였고, 헬레나는 본래 로드가 됐어야할 인물이건만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반용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충분히 이해는 갔다.

헬레나는 아직 실력이 부족한 반면 반용족의 본능은 누구보다 강해서 허황된 소리만 늘어놓던 여자였으니까.

제국과의 소꿉놀이는 그만두고 더 큰 세상으로 떠나야한다고 주창했던 그녀를 반용족 대부분이 혐오했다.

소꿉놀이라고?

제국의 전력은 그녀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

반용족 모두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하급 전사들은 제국의 정예 병사들을 돌파하고 기사의 목까지 베어 넘긴 뒤 생환하기 위해서, 중급 전사들은 솔로 넘버 나이트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 상급 전사들은 마법사를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모두 매일 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우고, 학습하고,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반용족 모두가 수백 년째 이어져온 전쟁에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임해온 것이다.

한데 헬레나는 그들 모두를 부정했다. 그리고 반용족을 모조리 카오스 산맥으로 이주시키겠다는 황당한 선포까지 해버렸다.

‘이지 없는 몬스터와의 싸움을 바라는 반용족은 이제 없건만.’

아직 어린(반용족의 기준에서) 헬레나와 그를 따른 무리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육체가 강할 뿐인 몬스터와 기술을 단련한 인간의 차이를.

단언컨대, 후자와의 전투가 훨씬 더 즐겁고, 어렵고, 배움이 된다.

하지만 헬레나 무리에겐 그 사실을 배울 기회가 적었으리라.

특히 헬레나는 타고난 실력부터가 솔로 넘버 나이트 이상이었으니 모든 게 시시해보였을 테지.

‘....가끔씩 그리워지겠군.’

씁쓸한 표정을 짓는 하오.

그는 딱히 헬레나에게 애정은 없었다.

다만, 그가 가끔씩 데카르타 산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에 안 든다며 투덜거리던 여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었다.

“거 녀석 참,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 넌 꼭 불러야만 오냐?”

분위기는 축제나 다름없지만 명색이 장례식이다.

하오는 잠시간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었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번츠델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지상최강의 로드를 뵙습니다.”

하오가 정중히 인사하자 똥 씹은 표정을 지은 번츠델이 손을 휘저었다.

“지상최강은 개뿔. 그랜드 마스터가 나타날까봐 무서워서 전쟁에도 참가 못하는 반푼이다, 반푼이.”

“하하....”

하오는 알고 있다.

한때 헬레나를 공주처럼 받들어주었고, 철없는 헬레나에게 동반자가 아닌 아랫사람 취급을 받았던 이 번츠델이라는 인물은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무섭도록 강하다.

항거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다.

그 사실을 알기에 반용족 대다수가 그를 로드로 받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번츠델은 로드의 자리를 탐탁치 않아했다.

‘....함부로 날뛰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번츠델의 몸속에 흐르는 악룡의 피는 무척 짙다. 전장에 서는 순간 그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멸절시켰다.

대량학살마라는 표현이 딱 적합했다.

로드의 힘을 얻어 더욱 더 강해진 그가 전장에 서는 순간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제국의 전선은 붕괴될 것이고 그랜드 마스터가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전투는 반용족을 휩쓸어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시킬 것이다.

번츠델이 로드의 자리를 탐탁치 않아하는 이유다.

그는 지금의 균형을 깨뜨리고 동족들을 멸망으로 인도할지도 모를 자신의 힘을 두려워했다.

정식으로 로드의 자격을 갖췄다면 광포한 악룡의 피를 통제할 수 있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법칙이 아닌 동족들의 뜻을 받들어 로드가 된 인물이다. 그의 자격은 불완전했고 악룡의 피를 통제할 여력이 없었다.

“요즘은 술 먹는 것 말고는 낙이 없다니까?”

한숨 쉰 번츠델이 하오에게 손을 내밀자 하오가 커다란 짐 보따리를 건넸다. 술병이 가득 들은 보따리였다.

라벨을 확인한 번츠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인간 출신의 반용족이 있어서 참 좋단 말이지.”

“하하....”

하오는 처음 반용족이 됐던 순간을 떠올렸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던가.

그때도 번츠델이 눈앞에 있었다.

반용족의 자격을 얻고 싶다면 매일매일 증류주를 진상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지껄였고, 덕분에 하오는 두 달 동안 하루도 어김없이 사냥터와 도시, 그리고 데카르타 산을 왕복해야했다.

당시만 해도 참 어이없는 연계 퀘스트다 싶었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면 당시 성장시킨 근력과 체력, 그리고 끈기 스탯이 있었기에 지금의 하오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하오는 번츠델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일체 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 빌어먹을 인간에게 뺏기는 술값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소집 퀘스트를 발동할 때마다 꼭 술을 사오라는 서브 퀘스트가 함께 열렸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빨리 데카르카 산을 떠나고 싶었던 하오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단순히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저를 소집하셨을 린 없을 테고.”

하오의 가치는 반용족 내에서도 특별하다.

인간 출신인 그는 인간 사회에 완전히 융화할 수 있으므로 다른 반용족은 해내지 못하는 많은 임무를 소화할 수 있었다.

“쯧, 성격 급하긴.”

어깨를 으쓱인 번츠델이 술병 하나를 뜯으며 말했다.

“헬레나의 죽음에 대해서 조사해줘야겠어.”

“....?”

“그래 뵈도 로드의 자격을 지녔던 아이잖냐. 범인을 찾아서 복수는 해야 우리의 면이 살지.”

“무슨 범인이요? 카오스 산맥에서 죽은 거 아닙니까? 몬스터에게 당했겠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말이 안 돼. 헬레나의 호전성이 아무리 강할지언정 한낱 괴물들을 상대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울 리 없잖아? 헬레나는 몬스터에게 죽은 게 아니라 필시 누군가의 지혜에 당한 거야. 나는 헬레나를 죽인 범인이 인간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

본래라면 믿지 못했을 말이다.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오의 뇌리에 한 명의 사내가 스쳐지나갔다.

공교롭게도 프론티어에서 반용족과 충돌한 사내.

지존 그리드.

어쩌면.

그의 실력이면 정말로 어쩌면 헬레나를 쓰러뜨렸을 수도....

‘....아니, 아무리 그리드라도 혼자선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그리드에겐 기사들이 있다. 그리고 동료들이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하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카오스 산맥에서 사냥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프론티어를 정복하려한 반용족을 혼쭐 내주는 김에 헬레나까지 찾아가 해치우고 그대로 카오스 산맥에 자리를 잡았다고?

미친 추측 같지만 그리드와 템빨단은 가능할 수도 있다.

아니, 가능해야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최근 레벨이 급격히 상승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번츠델의 말이 이어졌다.

“마침 카오스 산맥 근처에 인간의 도시가 있다고 하더군. 너는 그곳에 잠입해서 차근차근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라.”

띠링~

퀘스트가 떠올랐다.

헬레나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 번츠델에게 보고하라는 내용의 퀘스트였다.

한데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 2가지였다.

범인을 찾아내거나, 혹은 ‘번헬리어의 가호가 깃든 심장’을 찾거나.

어쨌든 둘 중 하나를 찾아서 번츠델에게 보고하라는 내용의 퀘스트였다.

‘번츠델의 진짜 목적은 심장이겠군.’

앞서 말했듯이 번츠델에겐 로드의 자격이 부족하다. 하지만 헬레나의 심장을 흡수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역대 최강의 로드로 거듭날 것이 분명했다.

‘근데....’

막대한 퀘스트 보상을 보고도 하오는 망설였다.

헬레나를 죽인 범인이 정말로 그리드라면, 퀘스트를 수락하기가 난처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리드와는 계약을 맺었을 정도로 확고한 조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건만, 어찌 동료를 배신한단 말인가?

‘...가만.’

기한이 무려 1년이나 되는 퀘스트다.

그리드와 논의할 시간이 충분했다.

어쩌면 역으로 이용하기 좋은 퀘스트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 하오가 일단 퀘스트를 수락했다.

“제게 맡겨주시죠.”

“역시 듬직하군 그래.”

흐뭇하게 웃는 번츠델.

그는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신뢰하는 부하가 사실은 적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드가 쏘아올린 작은 공들은 이렇듯 전국 각지에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

드워프의 도시 탈리마는 일종의 환상으로 취급됐다.

농부들은 에픽 등급의 호미로 밭을 매고, 아낙네들은 유니크 등급의 몽둥이로 빨래를 하고, 거리의 허름한 노점상에는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들이 진열되어 있다는 등....

탈리마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허황된 것이 많아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았다.

야탄교 플레이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모락트의 계시 덕분에 무사히 탈리마에 진입한 그들은 눈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서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탈리마의 전경은 그들이 소문으로 들었던 것 이상으로 굉장했다.

태양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의 궁전.

거리 노점상에 널려있는 유니크,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들.

중세를 표방하는 Satisfy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고도화 된 문명.

“...저 꼬맹이가 들고 노는 물총, 저것도 설마 유니크 등급이야?”

“그런 것 같은데....”

“....”

플레이어들은 템빨국 병사들과 농부들이 레어, 에픽 아이템을 무장하고 있는 광경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탈리마에 대한 소문이 사실일지언정 크게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데 직접 본 탈리마의 풍경은 소문 이상이었고 야탄교 플레이어들은 경악을 넘어서 기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거 얼마에요?”

“1,555,000,999골드.”

“.....”

다만, 탈리마는 그림의 떡과 같은 도시였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드워프들의 자부심이 워낙 대단해서 물가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에픽 등급 아이템을 15억 넘게 받아 처먹으려는 미친놈들이 거리에 널렸으니, 대단한 물건은 많은데 실제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눈살을 찌푸린 로제가 나란히 걷고 있던 두 번째 종에게 물었다.

“드워프들은 수십 년 이상을 고립 돼 있었다고 들었는데 외지인을 보고도 놀라지 않네요?”

“자기 일밖에 모르는 바보들이라서 그렇단다.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우리를 보고도 의문을 품지 않는 게지.”

“대체 얼마나 바보면....”

“후훗, 덕분에 쉽게 활동할 수 있지 않느냐.”

야탄의 종들과 수백 명의 야탄교 플레이어.

그들은 드워프들에게 그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고 엘리테르 광산에 입장할 수 있었다.

미세하게 균열이 가있는 이계의 틈을 발견한 그들이 지체하지 않고 의식을 준비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는 세상을 지옥으로 물들일 것이다.”

최소 다섯.

야탄교가 예상하는 대악마 강림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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