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8권 - 16화
대개 상식이란, 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것이다.
선인들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탄생한 상식은 결코 쉽게 뒤집히지 않았다.
“....!”
하급 전사 크베에게도 상식이라는 게 있었다.
그의 상식선에서 상급 전사란 반용족을 대표하는 최고의 실력자들이다.
결코 쉽게 패배하지 않는, 불리한 싸움에서도 역전을 달성하는, 위기의 순간마다 도리어 발전하는.
세상의 온갖 축복을 독차지한 듯한 그런 별세계의 존재가 바로 상급 전사들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마치 가축처럼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상급 전사 카스파의 모습을, 크베는 똑똑히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현실이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그랬군! 나는 꿈을 꾸고 있던 거였어!!”
이 꿈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프라바가 변방의 무명 기사에게 패배했을 때부터? 자드가 예정에 없던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아니면 내가 고작 인간들에게 노예처럼 붙잡혔을 때였나?
아니, 공교롭게도 거기까진 현실이었다.
꿈의 시작은 분명히 얼마 되지 않았다.
나를 앞세워 걷던 인간의 숫자가 본래 셋이었다가 갑자기 16명으로 늘어났던 무렵부터가 꿈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놈들이 각 산의 산주들을 사냥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시점부터 현실감각은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그래, 꿈이다.
꿈이 아니라면 위대한 상급 전사가 고작 마법 일격에 죽음을 맞이할 리 없다.
“크하하하핫!!”
크베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발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크게 웃고, 급기야 스스로의 뺨을 후려쳐 봐도 그는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이내 절망하고 주저앉는 그를 무시한 그리드 일행이 한자리에 모여 섰다.
“나 팔 부러졌는데.”
붉게 달아오른 이마에 핏대를 세운 반트너가 덜렁거리는 양팔을 보란 듯이 내밀어보였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동료들을 시선으로 가리키더니 브라함에게 따지고 들었다.
“미쳤수? 사람을 허공에 소환하면 어쩌자는 거요? 우리는 댁이나 그리드하고 달라서 못 난다고! 못 날아!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을 거야!!”
“무능을 자랑이랍시고 떠드는 꼴을 보니 한심하군.”
“무능은 개뿔....! 마법사도 아닌데 못 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요!”
“그리드도 마법사가 아니다만.”
“쟤는 템빨이고!”
“그럼 네놈도 템빨로 해결 보던가.”
“그런 아이템을 착용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그럼 내게 마법을 배워라.”
“....!?”
십공신의 일각.
템빨국의 대머리로 유명한 반트너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신분, 나이, 성별, 종족이 뭐가 됐던 똑같이 존중해주었고 상대방이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똑같이 욕을 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가식 없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그를, 의외로 브라함은 마음에 들어 했다.
템빨국의 다른 모두는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존경한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는 반면 반트너는 겁 없는 하룻강아지마냥 까불어 댔으니 귀여운 구석이 있던 것이다. 성격을 보아 누구처럼 남을 속일 위인도 못 됐기에 신뢰를 느끼기도 했다.
“나, 나도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겁니까?”
“강화 마법은 힘들겠지만 일반 하급 마법쯤이야 지력만 뒷받침되면 쉽게 배울 거다. 물론 내가 스승이라는 전제가 깔려야하지만 말이지.”
천재 중의 천재인 브라함은 전설을 넘어 신화를 노리는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상대방이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직업을 구분하지 않고 마법쯤 쉽게 가르쳐줄 자신이 있었다.
충격적인 정보였다.
앞으로 모든 템빨단원이 마법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본 반트너와 십공신의 마음이 흥분으로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문제가 있었다.
브라함의 기준에서 봤을 땐 세상사람 대부분이 천치라는 점이다.
브라함은 알아야했다.
그리드의 지력(스탯)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 공식도 이해를 못 한다고?”
“....?”
고작 1분 뭐라고 떠들더니 이해를 운운하는 브라함의 태도에 도리어 반트너가 당황했다. 이 양반이 미친 건가, 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브라함을 쳐다봤다.
한숨 쉰 브라함이 그를 뒤로하고 그리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드는 막 숨이 끊어진 산주가 남긴 가죽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데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이것도 저주를 받았어.”
Satisfy에는 종종 저주 받은 아이템들이 존재한다.
저주 받은 장비 아이템의 경우 한 번 착용하면 두 번 다시 벗지 못했고, 저주 받은 소모품은 질병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재료 아이템은 재료로 활용하지 못했으니 사실상 쓰레기였다.
근데 하필 산주들의 드롭템은 전부 다 저주 받은 아이템이었다.
그나마 성능 좋은 장비 아이템이었다면 평생 졸업템으로 삼을 누군가에게 판매가 가능했겠지만, 하필 재료 아이템만 드롭해서 가치가 전혀 없었다.
“일단 내 창고에 보관해둘게.”
저주 받은 산주의 가죽을 주섬주섬 챙긴 그리드가 그것을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었다.
반용족 카스파의 드롭템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는 점이 신경 쓰일 법도 하건만, 이를 놓고 따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드와 함께 사냥할 때 나오는 전리품은 일단 전부 그리드가 챙기는 게 템빨단의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경험치 몇 퍼센트 올랐어?”
십공신의 관심사는 오직 레벨에 있었다.
지슈카의 질문에 십공신들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난 1.8퍼센트.”
“난 1.74.”
아직 380후반 레벨에 불과한 반트너와 후로이는 2퍼센트에 육박하는 경험치를.
“나는 0.78퍼센트 올랐다.”
“나도 그쯤.”
390레벨 초반의 폰, 레가스, 지슈카, 페이커는 평균 0.8퍼센트의 경험치를.
“0.5다.”
“똑같아요.”
“저도요.”
390레벨 중반의 카츠, 유페미나, 유라는 정확히 0.5퍼센트의 경험치를 획득했다.
“0.2군.”
이건 크리스의 대답이었다.
유래 없는 성과였다.
고작 4시간 만에 십공신은 많은 경험치를 올렸다.
첫 번째 능선에는 200레벨 미만의 몬스터가 대다수였고, 본격적인 사냥은 세 번째 능선부터 시작됐으며, 산주를 레이드하느라 소비한 시간이 컸다는 점들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사냥한 시간이 적은데도 이 정도다.
카오스 산맥이 갈구노스 사원 이상가는 사냥터라는 의미다.
브라함의 배려도 큰 도움이 됐다.
레벨이 500을 넘는 브라함의 입장에선 세 번째 능선의 몬스터들도 잡아봤자 경험치를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마법으로 몬스터를 잔뜩 가둬놓고 무력화시켜 십공신에게 사냥하라고 몰아주었다.
십공신의 사냥 속도가 평소보다 배 이상 빠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영우씨는요?”
유라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리드는 무려 408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십공신과 파티를 맺고 있었다. 전투 도중 동료들의 아이템을 수리해주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기기도 했다. 괜히 동료들을 도와주려다가 그리드 혼자만 뒤쳐졌을까봐 유라는 걱정이었다.
산주들을 사냥한 보상으로 발생한 칭호 <신화 찬탈자>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있던 그리드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2.3프로.”
“....?”
“....?”
잠시 침묵이 도래했다.
귀를 의심하며 말문을 닫는 십공신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아, 깨달음 효과 덕분이야. 아이템을 수리할 때도 경험치가 오르고, 보스를 레이드하는 과정에서도 경험치가 오르다 보니까 성장 속도가 엄청 빨라졌네.”
“깨달음? 열망의 무아검에 있다는 스킬 말하는 거야?”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
그리드가 몇 년째 애용 중인 그 검엔 <깨달음>이라는 스킬이 존재했다.
캐릭터 경험치와 스킬 경험치 획득량이 10퍼센트 상승하고 명중률과 회피력이 20퍼센트 오르는 패시브 스킬이라고 들었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경험치가 많이 오르는 이유 중 하나긴 하지. 근데 내가 말하는 깨달음은 다른 건데....”
그리드가 4차 전직(각성) 공용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직업 고유 활동, 혹은 전투 시 ‘지속적’으로 경험치를 획득한다는 깨달음 시스템에 십공신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300레벨 후반대보다 400레벨부터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진다는 말이야. 특히 397레벨부터 399레벨까지가 지옥이니까 너희들 다 각오해야할 거다.”
평범한 플레이어는 400레벨을 달성하는 순간 깨달음 효과를 누리게 되는 반면 그리드는 408레벨이 된 후에야 깨달음 효과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정말로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숨은 사연을 굳이 떠벌리지 않았다.
유라와 지슈카 앞에서 멍청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 그리드는 두 사람을 크게 의식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사람과 현실이든 게임이든 매일 부대끼다 보니 고자가 아닌 이상 의식하는 게 당연했다.
덕분에 십공신은 크게 착각했다.
‘그리드가 동대륙에서 급성장하고 온 이유가 깨달음 덕분이었구나.’
‘400레벨부터 진정한 지옥의 시작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봄날이 시작되는 거였어.’
‘300레벨대의 관문이라는 건 일종의 솎아내기 과정인 거군. 진정한 랭커를 찾아내기 위한 시련쯤으로 생각하면 되는 건가.’
만약 그리드가 동대륙보다 지혜의 탑을 먼저 방문했다면 지금쯤 그리드의 레벨은 420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슬픈 진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드가 유일했다.
‘....아니, 운영자들도 알겠지.’
자신의 바보 같은 모습을 모니터링하면서 낄낄거렸을 운영진의 모습을 떠올려 본 그리드가 얼굴을 붉혔다. 커다란 분노가 그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어서 다음 능선으로 넘어가자.”
“응!”
“가잣!”
<신화 찬탈자>
*하나의 신화의 일부였던 산주를 토벌함으로써 산주가 등장했던 신화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신화 속 산주에게 ‘훗날 그리드에게 토벌당하는’이라는 수식언이 덧씌워졌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괴수와 전투 시 공격력과 마법공격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와 조우 시 보통의 확률로 위압합니다.
신화 찬탈자.
그리드와 그리드의 기사들, 그리고 십공신이 산주를 사냥하고 얻은 칭호다.
브라함의 신화 찬탈자와 똑같은 칭호였지만 상세 내용과 효과엔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클래스 등급을 <신화>로 격상시킬 수 있는 자격입니다.
*특수 스탯 <신위>가 개방됩니다.
이 두 가지 효과가 제외됐다는 점이다.
산주는 ‘하나의 신화’의 일부에 불과한 반면 히드라는 ‘여러 신화’의 일부였던 바.
산주들이 히드라와 똑같은 신화적 존재라고 해도 영향력이 다른 것이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피아로, 메르세데스, 아스모펠, 쥬드, 그리고 십공신 모두 신화의 자격을 얻게 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자세한 속내를 모르는 십공신은 그저 새로운 칭호를 얻었다는 사실에 들떠있을 뿐이었고, 그리드는 분위기에 굳이 초를 칠 생각이 없었다.
‘좋게 생각하자.’
신화 찬탈자는 지금 상태만으로도 충분히 큰 가치를 발휘했다. 신화적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칭호 중 하나였다.
이 칭호를 이용해서 히드라급의 거물이나 진짜 신을 처치할 수만 있다면, 언젠간 이 자리의 모두가 신화의 자격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음을 달랜 그리드가 넋을 놓고 있는 크베에게 눈짓했다.
“길을 안내 해라.”
“....아, 알겠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건데, 정말이지 엄청난 위압감이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크베가 황급히 앞장서 걸었다.
이번에 그는 굳이 산주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어차피 산주는 이놈들을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본래 계획은 산주에게 잡아먹히는 놈들을 즐겁게 감상하며 비웃어주는 거였는데 도리어 산주가 잡아먹힐 줄이야....
상급 전사조차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크베가 믿을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헬레나.
본래는 로드가 됐어야할, 반용족의 공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