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8권 - 15화
“오늘도 여기까지군.”
“너도? 나도.”
“명색이 상급 전사라는 놈들이 채 10분도 버티지 못한 거냐? 쯧, 얼간이 놈들.”
“닥쳐. 운 좋게 10초 더 버틴 거로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반용족의 수명은 150년으로 높은 편이다. 타고난 신체능력이 워낙 탁월해 질병이나 사고로 죽는 경우도 드물었다.
하지만 반용족의 개체수는 많지 않다.
지난 천 년 동안 300선을 간신히 유지해왔을 정도다.
동족 간 등급을 정하는 축제(랭킹전)에서 서로 살육하기 때문에?
아니다.
그리드와 하오의 계약 효과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반용족의 호전성은 같은 동족을 상대로는 다소 억눌러진다. 축제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용족의 개체수가 적은 이유는 단순하다.
번식력이 떨어졌다.
산모의 몸속에 흐르는 번헬리어의 사악한 피를 감당하지 못하고 유산되는 태아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
삼백 중에 삼십.
무려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결코 적지 않은 반용족들이 헬레나를 쫓아온 이유는 종족번식의 본능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헬레나를 닮아 강인할 그녀의 태아는 번헬리어의 피를 충분히 감당할 테니까.
“오늘 헬레나 님은 새로운 기록을 세우실 수 있을까?”
“쉽지는 않겠지... 기록을 늘리기 위해선 무조건 새로운 경지에 진입하셔야하는데 그런 깨달음을 하루 이틀 만에 얻는 건 불가능하니까.”
“괜히 조급해져서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
쥴, 제피로, 카스파, 나발트, 헬가.
이들 다섯은 반용족을 통틀어 단 20명밖에 없는 상급 전사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7번째 능선의 초입을 돌파하지 못했다. 힘을 합쳐 협동한다면 초입 따위 쉽게 돌파했겠지만, 반용족들에게 있어서 싸움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었다. 협력이란 개념이 없었다.
그들이 저 멀리 보이는 산의 정상을 시야에 담았다.
퍼엉....
태양이 폭발하는 듯하다.
잿빛 하늘을 적색으로 물들이는 빛이 번쩍일 때마다 눈보라를 꿰뚫고 희미한 폭음이 들려왔다.
지금쯤 현장엔 지옥도가 펼쳐졌을 것이다.
높은 산봉우리의 절반이 박살났을 테고 대지 위에 살아남은 생명체는 헬레나가 유일하리라.
두근, 두근, 두근.
상급 전사들의 심장이 뛰었다.
정상의 몬스터들을 도륙하고 있을 헬레나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녀를 향한 신뢰와 애정이 무한히 커지는 그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은 헬레나와 짝을 맺고 싶었다. 그녀에게 간택 받아 아이를 낳고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겠지.’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6번째 능선에서나마 싸우고, 경험하며 실력을 쌓아야한다.
‘그전에 오래간만에 술도 한 잔 하고.’
자드가 돌아올 무렵이다.
100대의 마차에 술을 꽉꽉 채워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인간이 만든 증류주를 떠올리자 흐르는 침을 닦아낸 상급 전사 5인이 경쟁하듯이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우선 6번째 능선의 초입에서 마차의 행렬을 기다렸다.
하지만 도착할 시간이 넘었는데도 행렬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작은 불안을 느꼈다.
“설마 몬스터들에게 발목을 붙잡힌 건가?”
“무슨 소리야? 행렬을 호위하라고 하급 전사 열다섯과 중급 전사 다섯을 세 번째 능선까지 마중 보내놨는데 고작 몬스터들에게 발목을 잡혔겠어?”
“산주들에게 발각된 건?”
“놈들을 피하는 길을 뻔히 아는데 그럴 리가 있나.”
“흠.... 아무래도 직접 마중을 나가보는 편이 좋겠군.”
다섯 상급 전사 중에서 가장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은 카스파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나약함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와 칠공작, 그리고 솔로 넘버 나이트처럼 강한 인간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므로 그들이 전사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차를 끌 인간들을 보호하면서 싸우는 건 자드의 실력으로도 힘들 거다.’
술 실은 마차 몇 대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원치 않는다.
펄럭-!
날개를 펼친 자드가 활강을 개시했다.
6번째 능선의 정상부터 5번째 능선의 중턱까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이동한 그는 우선 주변의 흔적을 살폈다. 하지만 새하얀 설원은 그 어떤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말의 발굽은커녕 인간의 발자국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도 네 번째 능선에 있다고?’
흔적을 조사하다보니 어느새 5번째 능선의 정상에 도착한 자드가 다시 한 번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적절한 풍향을 기다렸다가 4번째 능선을 향해서 하강했다.
“....”
4번째 능선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잡다한 몬스터들만 득실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프론티어측에서 내보낸 희생양을 처리한 후 영주에게 명령해 술과 음식, 그리고 옷가지를 대령시키고, 마차를 준비하고....
그런 잡다한 과정들을 감안해도 지금쯤이면 최소 5번째 능선에 도착했어야 정상인데 4번째 능선에도 도착하지 못했다고?
‘설마 행사가 오래 걸린 건가?’
프론티어측에서 내보낸 희생양이 의외의 실력자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헬레나가 늘 말해오지 않았던가.
제국을 기준으로 인간의 실력을 평가하는 건 오만일 수도 있다고.
‘....무패왕이라는 예외도 있었으니. 예상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먼 옛날 제국에 의해 전달 된 무패왕 마드라의 기록을 떠올리는 카스파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족의 패배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마드라에 대한 기록에는 과장이 너무 많다는 게 그의 평가였으니까.
당연하다.
인간 혼자의 힘으로 제국의 수십 만 대군을 학살했다는 기록을 믿는 바보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설령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이라고 해도 하필 이곳 프론티어에 무패왕급 인간이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콰르르릉!!
불나방처럼 덤벼오는 몬스터들을 브레스로 몰살시킨 카스파가 4번째 능선의 정상을 지나 3번째 능선의 중턱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
갑자기 산사태가 발생했다. 정상에서부터 수백 개의 눈덩이가 굴러 떨어지는 광경은 일종의 해일 같았다. 더욱 장관인 것은, 눈덩이의 부피가 매 순간 커지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오싹!
카스파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바위를 품은 저 거대한 눈덩이들 앞에선 용의 비늘도 무용지물일 거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눈덩이와 충돌하는 동시에 압사 당하리라.
“흥!”
고작 자연 따위에 굴복해서야 반용족이 아니다.
밀려오는 공포를 콧방귀 껴 날려버린 카스파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쿠콰콰콰콰콰쾅!!
흔들리는 풍광에 멀미가 일어난다.
부피를 10미터 이상 키운 눈덩이들이 발바닥을 스치고 지나가자 뜨거운 열통이 느껴진다.
“크윽...!”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이를 악 물고 하늘에 떠있는 동안 산사태가 멈췄다.
정상에서부터 굴러온 수백 개의 눈덩이 모두 지면에 처박혀 또 새로운 산 하나를 만들어냈다.
‘설마 나를 노린 건가?’
산사태가 발생한 타이밍이 공교롭게도 너무 절묘했다.
고요한 산의 정상을 올려보는 카스파의 마음 한편에 불안이 피어올랐다.
설마 자드 일행이 프론티어에서 당한 건가?
반용족들이 여기까지 마중 올 것을 알아낸 인간들이 산의 정상에 군대를 대기시켰다가 의도적으로 산사태를 일으킨 건가?
나보다 앞서 자드 일행을 마중 나왔던 동족들은 어떻게 된 거지?
....하는 등의 불안과 의심이 아니다.
카스파는 작금의 사태를 인간이 만든 거라곤 추호도 생각 안 했다.
각 능선마다 존재하는 산주(山主)들.
헬레나조차 곤욕에 빠뜨렸던 그 괴물들을 경계했다.
‘마차의 긴 행렬이 산주의 시선을 끈 것 같군....’
산주는 자신의 보금자리에 들어오는 외부인을 싫어한다.
반용족은 첫 번째 능선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그 사실을 파악했기에 산주들의 보금자리 위치를 파악하고 최대한 피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의 정예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평범한 인간들에겐 산주의 시선을 회피할 능력이 없다.
자드 일행이 산주의 보금자리를 되도록 피해서 행렬을 인도했을지언정, 느리고 요란한 인간의 행렬이 산주의 시선을 끌었을 수도 있다.
만약 산주가 잠에서 깨어났다면....
‘행렬은 전멸했다.’
그리고 나 또한 위험하다.
카오스 산맥의 산주들은 고대 신화에 출현한 경력이 있는 마수들이었으니까.
히드라와 비교하면 미약한 존재였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발휘하는 권능은 상대하기 까다롭고 강력하다.
카스파가 어서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급히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키야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산주의 머리가 산의 정상으로부터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속도였다.
‘뭐지?’
붉게 충혈 된 두 눈을 부릅뜬 채 떨어지는 산주와 시선을 마주친 카스파가 질색했다.
설마 산주가 직접 보금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을 덮쳐올진 꿈에도 모른 그였다.
“빌어먹을!”
카스파가 급히 변신을 전개했다. 골격을 키우고 온 몸에 비늘을 두르며 산주의 습격에 대비했다.
한데.
키야아아아!!
산주는 카스파를 그냥 스쳐지나갔다.
쿠우우우우웅!!
그리고 떨어졌다.
눈덩이들이 만들어놓은 작은 산 위에 처박힌 놈이 움찔움찔, 경기를 일으켰다.
“....!”
본래 회색이었던 산주의 털이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음을 뒤늦게 알아 본 카스파가 두 눈을 부릅떴다.
산주의 털이 온통 피에 젖어있었다. 경기를 일으키는 놈은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뭐라고?’
산주의 영역에는 산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규칙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에 헬레나와 서른 명의 반용족은 산주를 해치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피하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한데...
쏴아아아아....
산주가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했다.
신화적인 존재가 덧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카스파는 지금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을 품었다.
이미 산주의 저주에 걸린 건 아닐까 경계했다.
카스파의 혼란이 극에 이른 그때였다.
“시시하군.”
빛이 아른거리더니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라기엔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냄새는 차라리....
“....뱀파이어?”
이곳에 왜 뱀파이어가?
이놈들이야 말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주 받은 존재들 아니었나?
경계하는 카스파에게 은발의 사내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씨익 웃더니 하늘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여기다.”
번쩍-!
허공에 순식간에 그려진 마법진이 붉게 물들었고,
파팟!
파파파파팟!!
열댓 명의 인간들이 마법진 아래로 빛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포위당한 카스파의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는 순간.
“으아아아악!!”
“이런 미친! 우리는 하늘을 못 난다고!”
카스파를 포위하며 나타난 인간 중 절반 이상이 허우적거리다가 지면으로 추락했다. 그나마 허우적거리지 않고 체통을 지킨 몇 명도 하늘을 날지는 못했다. 한 명은 급히 나무를 심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렸고, 다른 한 명은 검기로 은색의 날개를 펼치더니 천천히 하강했다.
완전한 비행을 유지하여 카스파를 포위한 사람은 단 두 명.
정체불명의 뱀파이어와 흑발의 인간 단 둘뿐이었다.
덕분에 여유를 찾은 카스파가 둘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뭐냐?”
“질문하기에 앞서서 주먹부터 휘둘러야하는 거 아니냐? 명색이 반용족이란 놈이 손보다 주둥이를 먼저 놀린다고?”
“...!”
연이은 사태에 당황하고 경계하느라 억눌렸던 카스파의 본능이 들끓었다.
자신을 깔보듯 오만한 눈빛으로 지껄이는 뱀파이어에게 강한 투쟁심을 느끼며 발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발톱은 뱀파이어에게 닿기도 전에 산산이 조각나 허공에 흩뿌려졌다.
카스파는 어느새 날카로운 바람의 폭풍 속에 갇혀있었다.
폭풍 너머로 뱀파이어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이 정도 마법을 보여줘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촌구석 도마뱀 새끼 아니랄까봐 식견이 딸리는군.”
“....!”
카스파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만한 존재.
뱀파이어 중 유일하게 인간의 마도를 수학한 대마법사....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브, 브라함?”
콰르르르륵!!
카스파를 감싼 폭풍이 난폭해졌다.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한 그는 브라함 일행의 양분이 되었고, 그가 드롭한 아이템은 일행의 대장인 그리드의 인벤토리에 조용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