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8권 - 14화
그랜드 마스터.
놈은 자신을 어떤 무언가라고 소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250년 전과 170년 전, 그리고 80년 전과 40년 전.
반용족과 제국군의 전쟁이 심화되고 전선의 제국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반용족의 역사에 기록된 놈의 정체를 반용족은 쉽게 눈치 챘다.
제국의 수호자.
제국군을 위기로부터 구하고 반용족의 상급 전사들을 도륙했던 놈은 명백히 제국을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무려 수백 년 동안 같은 이름과 같은 생김새를 유지해온, 인간이되 인간을 초월한 다른 무언가였던 놈의 강함은 반용족의 로드와 필적할 정도였다. 역대 모든 로드가 끝내 놈을 죽이는데 실패하고 무승부를 보거나 역으로 패배해 굴욕을 맛봤다.
새로운 로드들이 그랜드 마스터를 목표로 삼아온 이유다.
그랜드 마스터와 싸워 이김으로써 자신이 역대 최강의 로드임을 증명하겠노라, 바로 그것이 모든 로드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자드가 섬기는 헬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굳이 카오스 산맥까지 찾아온 이유는 최강의 힘을 손에 넣고 로드의 지위를 탈환한 뒤 그랜드 마스터를 쓰러뜨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그랜드 마스터는 정말로 특별한 존재였다.
그와 같은 존재가 설마 둘이나 있었을 줄이야?
심지어 이런 변방에 말이다.
“너는.... 쿨럭, 쿨럭, 뭐냐?”
반용족의 비늘은 물리데미지와 마법데미지를 모두 경감시킨다.
고작 일격, 이격에 큰 타격을 입을 일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눈앞 흑발의 인간은 마치 춤 같은 검술을 단 두 번 구사한 것으로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놈의 검에 깃든 파괴력이 비늘 너머 오장육부를 경련케 만들었고, 놈의 검술과 함께 발현된 마법들이 비늘의 저항력을 무시하고 비늘을 난도질해버렸으니 자드는 혼란하고 두려웠다.
상대의 강함과 비례해서 강해지는 호전성이 어째선지 억눌려졌으므로 이것이 바로 공포인가 싶었다.
스윽.
그리드는 무대 아래의 주민들을 살피고 있었다. 수만 명의 주민들이 모두 두 눈을 부릅뜬 채 자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겁에 질려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드의 출현이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다.
아직 그리드가 개입하기 전부터 주민들은 공포를 극복한 상태였다.
젊은 영웅 라덴의 분투와 승리가 일으킨 기적이었다.
프론티어는, 강해졌다.
“나는.”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그제야.
“아....!”
무대 아래 주민들이 탄성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리드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정신을 차린 그들이 뒤늦게 그리드를 알아봤다.
“국왕 전하....!”
“그리드 전하께서 행차하셨다!!”
“우와아아아아아!!”
주민들의 함성이 눈보라의 기세를 이겼다. 그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세찬 바람을 물리쳤고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차가운 눈덩이를 모조리 녹여버렸다.
이 순간의 프론티어는 사막도시 레이단처럼 뜨거웠다.
‘왕이라고?’
주민들의 함성을 듣고 그리드의 정체를 알게 된 자드의 동공이 떨렸다.
믿기지 않았다.
반용족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 정도로 강했던 인류의 통치자는 제국의 황제들과 멸국의 무패왕이 전부였다.
그 외 다른 국가의 왕조들은 제국에 지배당함으로써 연명하기를 선택한 패배자에 불과했건만, 어찌 그들 중에 이런 괴물이 탄생했단 말인가?
기형적인 결과물이다.
깨닫는 자드의 공포심이 더욱 강해졌다.
눈앞의 인간이 지금의 힘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려왔을지, 반용족이기에 살육을 갈망해온 자드조차도 감히 가늠하지 못했다.
자드의 눈엔 그리드가 괴물처럼 보였다. 수만, 수십만의 피를 뒤집어 쓴 새카만 어둠이 그리드의 실체라고 느꼈다.
덜덜덜....
자드가 급기야 몸을 떨기 시작했다.
‘반용족의 호전성을 다소 누그러뜨린다.’는 하오와의 <계약> 내용이 일으킨 변수였다.
그리드에게 기선을 완전히 제압당한 자드는 눈앞의 인간에게 투쟁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순전히 공포 때문이라고 착각했고, 그 착각은 실제적 상태이상으로 작용해 자드를 굳게 만들었다.
‘헬타본과 싸울 땐 도리어 악수로 작용한 것 같았는데 이번엔 정 반대군.’
계약의 효과가 상황에 따라서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이를 더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끔 궁리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생각하며, 무대 아래 주민들을 시선으로 쭉 훑은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저들의 믿음과.”
그리드의 시선이 이어서 라덴에게 향했다.
“기사들의 보호에 기대어 살아가는,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다.”
그리드는 자신을 낮췄다.
오직 백성들이 있기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다.
라덴과 프론티어의 백성들이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들이 그리드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다.
이제 그리드는 자신의 명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명성 따위 없어도 ‘나’는 결국 ‘나’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높은 자존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그리드가 바라는 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모든 이들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그리드의 꿈이자 목표였다.
“너희 같은 오만한 침략자들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땅을 위협할지언정 이 땅의 주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너희들을 물리치고 나를 지켜줄 테지.”
자드를 향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프론티어의 주민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다.
주민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리드의 말을 새겨들은 그들은 자신들이 더 발전하고, 강해져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왕의 발언에 감명 받은 프론티어의 백성들이 높은 의욕을 품습니다.]
[프론티어 백성들의 모든 성장률이 앞으로 한 달 동안 200퍼센트 상승합니다. 프론티어 소속 플레이어들의 경험치 획득량이 1.5배 증가합니다.]
“....!!”
언제부터 백성들이 그리드를 지켜줬다고?
그리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던 플레이어들이 깜짝 놀랐다. 떠오르는 알림창과 주민들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드의 의도를 눈치 챈 그들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짬이 괜히 중요한 게 아니구나.’
Satisfy의 시스템은 매우 능동적이다.
퀘스트만 봐도 알 수 있다.
보통 게임과 달리 Satisfy는 플레이어가 의도적으로 퀘스트를 발생시키는 일이 가능했고, 이는 이미 초창기부터 플레이어들에게 널리 알려져 애용돼온 성장법 중 하나였다.
그리드는 거기서 한 술 더 떴을 뿐이다.
국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말 몇 마디로 도시의 성장률을 급격히 높여버렸다. 반용족의 등장이 야기한 위기를 기회로 바꿔버렸다.
괜히 랭킹 1위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은 큰 가르침을 받은 기분이었다.
“큭.... 큭큭큭, 그것 참 감동적인 발언이로군.”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자드가 슬그머니 일어나고 있었다.
계약에 의해서 억제됐던 호전성을 되찾은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느꼈던 공포가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벌레들을 치켜세워봤자 결국 벌레다.”
왕의 몇 마디 말에 감동해 의욕을 불태우는 인간들을 쭉 둘러보고 비웃어준 자드가 뚜둑, 뚝, 몸을 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괴물처럼 보였던 그리드가 그는 이제 우습게 보였다.
고작 벌레 따위들을 배려한답시고 말을 아끼는 놈이 걸어온 살육의 길 따위, 하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작 이깟 놈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상급 전사들을 도륙했던 그랜드 마스터와 동급일 거라고 잠시나마 착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강한 놈인 건 맞다. 하지만 제국인도 아닌 인간에게 내가 패배할 리 없어.’
자드는 헬레나를 따라온 서른 명의 반용족 중에서 열손가락에 드는 강자였다. 중급의 경지를 넘어 상급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천 번의 전투를 경험한 끝에 도달한 경지였다.
급기야 솔로 넘버 나이트마저 넘어선 자신이 타고난 재능에 매몰돼 벌레 따위나 살피는 눈앞의 오만한 인간과 싸워 질 리 없다는 확신이 자드에겐 있었다.
“기습에 잠시 당황하긴 했다만.... 지금부턴 완전히 다를 것이다. 네게 경험의 차이라는 걸 보여주마.”
펄럭!
날개를 크게 펼친 자드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일부러 태양을 등져 빛으로 그리드의 시야를 방해한 그가 브레스를 쐈다.
브레스가 노리는 방향은 그리드가 아닌 무대의 아래, 바로 주민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크하하하하하!!”
혼비백산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크게 웃은 자드가 이번엔 그리드를 조준하고 마력을 모았다.
그는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릴 그리드의 후위를 노리고 재차 브레스를 쏠 계획이었....
“....뭐?”
자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드가 주민들에게 쏘아진 브레스를 무시하고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부 다 가식이었나?’
콧방귀 뀌는 자드의 코끝에 비릿한 혈향이 스쳤다.
그리고 지상에 갑자기 붉은 마력의 돔이 펼쳐지더니 주민들에게 쏘아지는 브레스를 막아냈다.
“....!”
주저앉은 주민들 사이에 홀로 우뚝 선 은발의 소년.
마력의 둠을 펼친 장본인으로 보이는 놈이 하늘 위 자드를 똑바로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같잖은 새끼.
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발에 쉽게 넘어갈 자드가 아니었다.
태양빛조차 이기는 고위 뱀파이어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 심지어 왜 인간들을 돕는 건지, 그는 여러모로 의문이 생겼지만 일단 눈앞의 그리드에게 집중했다.
천 번의 전투경험이 그를 냉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콰아아앙!!
재차 쏘아진 브레스가 그리드를 덮쳤다.
이때 자드는 브레스의 바로 뒤를 쫓아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브레스를 피하는 순간 나타나 기습을 날릴 계획이었다.
설마 자신이 쏜 브레스가 자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올 거라곤, ‘고작’ 천 번의 전투경험밖에 없는, 심지어 제국군이나 몬스터와 싸워본 게 고작인 그는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꽈앙!!
“윽....!?”
바짝 뒤를 쫓던 브레스에게 역으로 덮쳐진 자드가 그 와중에 그리드의 기척을 읽고 황급히 발톱을 휘둘렀다.
까앙!!
발톱이 그리드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지만 무의미했다.
“초연살파극.”
잠재력 개방을 전개한 그리드가 타격을 무시하고 자드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대로 공간을 지배한 그의 궁극의 검무가 자드를 난도질하고 잿빛으로 산화시켰다.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드는 깨달았다.
경험, 기술, 심지어 육체능력까지도 자신이 그리드보다 아래라는 사실을 말이다.
처음 느꼈던 공포는 착각이 아니라 진짜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무대 아래서 상황을 지켜보던 반용족의 마지막 생존자가 질색하며 도망쳤다.
싸우길 좋아하는 반용족이라지만 개죽음을 바라진 않았다.
스테임 공작과 기사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포위했다.
“꺼져라!!”
반용족이 저항했지만 부질없었다.
많은 경험과 훈련을 쌓아온 북방의 기사들은 반용족의 일격쯤 버틸 실력이 있었다. 그들이 잠깐의 시간을 버는 동안 그리드와 놀이 현장에 도착해 반용족을 제압했다.
놈의 머리채를 붙잡아 당긴 그리드가 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희들의 대장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라.”
“아, 알겠다....!”
반용족의 입장에선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는 명령이었다.
본거지엔 28명의 반용족이 있었고 그중엔 헬레나와 다섯 명의 상급 전사가 있었다.
그리드가 프론티어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가봤자 그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믿어 의심치 않은 반용족이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의아함에 휩싸였다.
자신을 뒤따르는 사람이 고작 셋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드와 뱀파이어, 그리고 어느 순간 합류한 적발의 여성이 전부였다.
‘미친 건가?’
고작 셋이서 호랑이굴을 찾아가겠다고?
뭐, 어찌됐든 상관없다.
나는 빨리 이놈들의 얼굴이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광경을 구경하고 싶다....
걸음을 재촉한 끝에 카오스 산맥에 도착한 반용족이 그리드 일행을 깊숙한 곳까지 안내했다.
스파앗. 스파앗. 스파앗.
눈앞에 나타나는 몬스터들과 등 뒤에 있는 그리드를 동시에 경계하느라 바쁜 반용족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하늘에선 계속해서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빛이 떨어질 때마다 그리드 일행의 숫자가 늘어났다.
브라함과 피아로, 메르세데스와 아스모펠, 쥬드는 물론이고 십공신에 이르기까지 그리드의 모든 기사가 행렬에 참가했다.
‘렙업 해야지.’
그리드의 목적은 반용족 토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리드조차도 혼자서는 오랜 사냥이 힘든 최상위 사냥터.
이곳 카오스 산맥에서 그는 단체 사냥을 통한 열렙을 계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