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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33화 (1,123/1,794)

템빨 58권 - 13화

반용족이 싸움이라는 행위를 즐기는 이유는 단 하나, 강해지기 위해서다.

더 많은 경험을 쌓고 강해져서 더 쉽게 살육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렇다.

어스름족 오크가 힘을 숭배하는 것과는 개념이 완전히 달랐다.

어스름족 오크는 존경 받는 전사가 되는 것을 꿈꾸는 반면 반용족은 원초적인 욕망에 충실할 뿐이었다.

살육을 갈구하는 악룡 번헬리어의 욕망 말이다.

“....크아아아악!!”

콰앙!!

가시에 목을 찔린 프라바가 포효하며 날개를 활짝 펼치자 발생한 충격파가 라덴을 멀찍이 날려버렸다.

무대의 끝까지 날아가 뒹구는 라덴을 아니, 정확히는 라덴의 철봉을 그는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뭐로 만든 거지?”

반용족의 비늘은 단단할 뿐만 아니라 미끄럽다.

그로 인해 받는 충격의 절반 이상을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고 쉽게 손상되지 않는 것이다.

장검 수준의 무게밖에 안 되는 얇은 철봉이 반용족의 비늘을 쉽게 부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프라바는 저 철봉에 어떤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정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동대륙에 존재하는, 심지어 오랫동안 잊혔던 신의 힘을 그가 무슨 수로 알아보겠는가.

“....중요한 건 무기가 아니다.”

무대 아래.

굳은 얼굴로 전투를 지켜보던 자드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철봉이 아닌 라덴에게 고정돼 있었다.

‘우리를 잘 아는 놈이야.’

직접 전투 중인 프라바는 자신의 비늘을 부수는 철봉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지만 제3자인 자드는 달랐다. 그가 봤을 때 철봉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반용족의 성격과 특성을 잘 파악하고 공략하는 라덴의 실력 자체를 경계해야한다고 판단했다.

‘마치 우리와 수백 번은 싸워본 놈 같은데....’

라덴의 육체능력은 모든 면에서 프라바보다 아래였다. 특히 힘과 속도가 무척 떨어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라덴은 반용족의 날개 활용법과 꼬리 활용법, 브레스를 쏘는 타이밍 등 일종의 습관 같은 것들을 모조리 파악하고 그 부분에서 발생하는 허점을 공략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보면 일생토록 반용족과 싸워온 존재 같았다.

‘....제국군 출신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피부가 너무 곱다.

우리의 고향을 에워싼 제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온몸에 셀 수 없이 많은 상처를 새기고 있는 반면 라덴의 몸은 비교적 깨끗했다. 특히 반용족의 발톱에 베인 듯한 깊은 상처는 아예 없었다.

콰아앙!

마침 프라바가 브레스를 쏘고 있었다. 이를 또 예상했다는 듯이 방패를 바꿔 막은 라덴이 순간적으로 가속해 프라바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측면이나 후위를 노렸다면 오히려 꼬리에 반격을 당했을 테지만 꼬리를 쓸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가소롭다!”

프라바는 쉽게 생각했다. 정면으로 덤벼드는 라덴을 불나방 여기듯 하면서 팔을 뻗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하필 태양빛을 반사하여 번쩍이자 라덴의 시야에 혼잡이 생겼다.

하지만 라덴은 침착했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허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그대로 돌진했다.

서걱-!

프라바의 발톱이 라덴의 이마가 아닌 머리카락을 잘랐다.

갈고리처럼 생긴 다른 짐승들의 발톱과 달리 칼날처럼 직선으로 뻗은 반용족의 발톱은 하단으로 치고 들어오는 적에게 다소 취약한 면모가 있었다.

“....!”

프라바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채 1센티미터도 안 되는 간격을 남기고 발톱을 피한 라덴의 모습을 통해서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이놈, 내 약점을 공략하고 있어?’

하지만, 그래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꽈아앙!!

가슴을 세게 얻어맞고 재차 가시에 찔린 프라바.

쿨럭, 피를 토하는 그의 생명력은 위험할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프라바는 눈치 챘다.

라덴의 공격력이 바로 조금 전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졌다는 사실을.

‘이놈은 한계다.’

라덴이 첫 번째 타격과 두 번째 타격에서 프라바에게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있었던 이유는 <흉포하게 꿰뚫어 죽이기> 스킬의 생명력 비례 데미지 효과 때문이었다.

전투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생명력이 20퍼센트까지 하락한 프라바에게 가시의 공격력은 이제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다.

충격을 쉽게 견딘 프라바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라덴을 뒤쫓았다. 라덴의 반격을 개의치 않고 맞아주며 발차기를 날렸다.

콰작!!

복부에 발차기가 꽂히자 몸이 ㄱ자로 꺾인 라덴이 다시 무대 끝까지 날아가 뒹굴었다. 심한 내상을 입은 건지 구멍이란 구멍에서 죄다 피를 뿜어냈다.

프라바는 습관을 버렸다.

한참이나 멀찍이 떨어진 적에게 원래라면 브레스를 쏴야했지만 자중하고 몸을 날려 프라바에게 접근, 발톱을 찔러 넣었다.

까아아앙!!

삼겹갑의 찰랑이는 미늘과 미늘의 틈새에 프라바의 발톱이 맞물려 가로막힌다.

‘갑옷이고 방패고 하나 같이 짜증나는군.’

쯧, 혀를 찬 프라바가 발톱을 빼내려하는 순간이었다.

우직!

미늘들이 프라바의 발톱을 쉽게 놓아주지 않고 깨뜨렸다.

웨폰 브레이커 효과다.

라덴이 무장 중인 삼겹갑은 그리드의 삼겹갑의 복제품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본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

원본을 제작했던 시점의 그리드보다 현재 그리드의 제작 기술 레벨이 높았으니 당연하다.

“큭큭....! 크하하하핫!!”

자신의 아름다운 발톱이 부러지자 위기감을 느낀 프라바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끝까지 발악하는 눈앞의 벌레 같은 놈을 죽였을 때 느끼게 될 희열이 벌써부터 기대돼 오싹오싹할 정도로 즐거운 것이다.

“그래! 최대한 오랫동안 버텨봐라!!”

소리친 프라바가 이제 꼬챙이 수준으로 전락한 가시의 공격력을 무시하고 맞아주며 라덴에게 주먹과 발을 쉴 새 없이 날렸다.

“큭....!”

라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삼겹갑이 발톱에 상성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발톱 대신 주먹을 휘두르는 프라바의 순발력이 그를 좌절케 만들었다.

촤르륵! 푸화학!!

철봉으로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일어나는 물보라가 프라바의 비늘을 부식시켰지만, 그것을 노리고 반격할 틈조차 찾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라덴은 과연 자신이 이 괴물을 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휩싸였다.

“라덴 님!!”

“고개를 드세요, 라덴 님!!”

방패를 세운 채 거북이처럼 웅크린 라덴의 시야에 무대 아래 펼쳐진 광경이 보였다.

수만 명의 주민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었다.

라덴이 반드시 지키겠노라 맹세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이제 라덴은 그들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그리드가 밤새 만들어준 무기와 두 자루의 방패, 그리고 갑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패배를 엿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하지만 상처 입은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너무 많은 뼈가 부러졌다.

덜컥!

라덴의 무릎이 결국 굽혀졌다.

방패 위를 계속해서 폭격하는 프라바의 공격에 담긴 무게가 그의 육신을 한계로 몰아넣은 결과였다.

“크윽....!”

신음하는 라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칫 방패마저 놓칠 뻔했기 때문이다.

그 가볍던 방패조차도 이젠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 실정이었다.

‘끝인가.’

프라바와 처음 10합을 겨뤘을 때까지만 해도 라덴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었다.

가상의 반용족과 비교해서 프라바의 수준이 한참 떨어진 까닭이었다.

가상의 반용족에겐 단 한 번의 승리조차 못 거뒀을지언정, 프라바를 상대로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었다.

프론티어의 존엄을 세우고 그리드 전하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에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20여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것은 덧없는 망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는 여실히 깨닫고 말았다.

‘...염치없는 놈.’

사람들에게 천재라고 칭송 받아왔고, 자신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스테임 공작각하의 편의에 쉽게 기댈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겐 공작각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건 결국 오만이었다.

내겐 자격이 없었다.

라덴이 깨닫는 순간이었다.

쿠오오오오....

프라바가 주먹과 발을 휘두를 때마다 발생했던 천둥 같은 파공성이 갑자기 느리게 들려왔다.

눈으로 간신히 쫓아 막는 게 고작이었던 프라바의 주먹과 발이 느리게 보였다. 끝까지 보고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스피이잇....

방패와 지면 사이에 존재하는 약간의 틈을 노리고 솟구쳐 올라오는 프라바의 꼬리가 시야 한편에 걸렸다.

“....뭣?”

회심의 기습으로 라덴의 목덜미를 꿰뚫으려 했던 프라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라덴이 아주 살짝 고개를 비튼 것만으로 자신의 꼬리를 피해버리는 모습을 보고 그는 솔직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회광반조?’

수많은 살육을 자행해온 프라바는 경험해봤다.

짐승도, 사람도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비로소 저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라덴이 딱 그래보였다.

그래서 잠시만 물러나기로 했다.

곧 제풀에 지쳐 죽어갈 라덴의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 젊은 시절에 그림자의 왕 카심의 기척을 읽었던 기감의 천재.

이후 십수 년 동안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꾸준히 발전해온 라덴은 바로 어제 반용족 헬타본과 수백 번을 싸웠고, 지금 이 순간에는 프라바와 생사결을 나눴다.

그가 타고난 재능이 개화할 경험치가 이제 충분할 정도로 가득 찼다는 뜻이다.

[한 명의 천재가 지역의 패자로 거듭납니다.]

한 문장의 월드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쿠와아앙!!

라덴으로부터 기파가 발생했다.

라덴이 기습적으로 던졌던 창을 보고도 날개를 접지 않았던 프라바가 반사적으로 날개를 접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기파였다.

“큭!”

프라바는 우선 하늘 위로 떠오르려고 했다. 그에겐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라덴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무대 곳곳에 물감처럼 뿌려진 붉은 피.

자신이 흘렸던 모든 피를 현무의 가시에 집결시킨 그가 날개를 접고 잠시 이동불가 판정을 받은 프라바에게 쇄도했다.

“노옴!”

날개를 활짝 펼친 프라바가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라덴에겐 무형의 기운조차 읽어내는 기감이 있었다.

전신의 세포를 활성화시켜서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그의 재능은 그리드의 <종횡무진>을 닮아있었다.

스파앗!

충격파의 범위를 모조리 피해낸 라덴이 순식간에 프라바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프라바는 직감했다.

저 붉은 철봉에 깃든 힘을 결코 막아낼 수 없음을.

그렇기에.

“우오오오오!!”

고함을 내지른 프라바는 브레스를 쏘았고, 동시에 두 팔을 내질렀다.

검은 브레스는 라덴의 안면을, 날카로운 수도는 라덴의 양쪽 가슴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이 라덴에게 닿기 전,

푸욱!!

라덴의 철봉이 먼저 프라바의 미간을 꿰뚫었다.

라덴의 피부를 태우며 코앞까지 날아왔던 브레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프라바의 죽음을 뜻하는 현상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잿빛으로 산화하는 프라바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프론티어의 주민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굳게 닫힌 저택들의 창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프론티어 전체가 기쁨으로 들썩였다.

“허억.... 허억.... 허억....”

털썩!

홀로 남은 무대 위에서 비틀거리던 라덴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된 그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드의 그림자였다.

어느새 날개를 펼치고 무대 위로 날아오른 자드의 차가운 음성이 프론티어에 고요를 일으켰다.

“꽤 재밌는 전투였으니 약속은 지키겠다. 단, 너는 죽어줘야겠어.”

자드는 라덴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솔로 넘버 나이트를 상회하는 실력자가 될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카오스 산맥에는 라덴보다 강한 몬스터가 득실거렸다.

훗날의 즐거움을 위한답시고 굳이 살려둘 가치는 없었다.

프론티어를 원만하게 지배하기 위해선 오히려 배제해야하는 존재였다.

동족을 해쳤다는 명분도 있으니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스르륵.

프라바의 꼬리보다 두 뼘은 긴 꼬리가 라덴의 목을 노리고 서서히 내려갔다. 날카로운 꼬리의 끝이 라덴을 쉽게 해칠 것처럼 보였다.

“.....”

라덴은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꼬리를 그저 조용히 쳐다볼 뿐이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아니다.

대결이 끝난 이상 자신이 죽을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초연화.”

이곳에는 그리드가 있었으니까.

촤르르르르륵!!

눈처럼 쏟아진 푸른 검기들이 자드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감과 동시에.

“연살화극.”

템빨국의 모든 백성이 우러르는 존재가 강림해 자드를 난도질했다.

‘....그랜드 마스터?’

순식간에 넝마가 된 자드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하란 제국의 1인자와 동등한 실력을 지닌 존재가 어째서 이런 변방에 있는 건지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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