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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32화 (1,122/1,794)

템빨 58권 - 12화

“성벽 높은 것 봐라. 저렇게 꽉 막힌 곳에서 답답해서 어떻게 살지?”

“약한 생물일수록 근심이 많은 법이니까. 저런 시설에라도 의존하지 않으면 진정할 수 없는 거겠지.”

“하핫, 아무 의미 없는데 말이야.”

흐린 태양에 설원이 빛날 무렵.

펄럭!

날개를 활짝 펼친 3명의 반용족이 프론티어의 성벽을 넘었다.

에티 가죽을 몸에 꽁꽁 두른 채 경비를 서던 초소 위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활을 쏘자 치안대장이 버럭 소리쳤다.

“놔두라니까!!”

늦은 외침이었다.

하늘 위로 쏘아진 6발의 화살 모두 고스란히 되돌아와 병사들의 미간에 박혔다.

“빌어먹을!”

설마 반사적으로 활을 쏠 줄이야, 평소에 훈련을 너무 열심히 시킨 게 도리어 독이 됐다.

젊은 병사들의 덧없는 죽음에 눈시울을 붉힌 치안대장이 서둘러 종을 쳤다.

대앵! 대앵! 대앵!!

적의 습격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하지만 프론티어 내부는 의외로 고요했다. 동요하는 사람이 적었다.

곧 적이 쳐들어올 거라는 사실을, 스테임 공작이 미리 공표한 까닭이다.

이미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틀어박혀있었다. 또 수천 명의 주민들이 광장에 모여 반용족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 모두 라덴의 승리를 기도했다. 라덴이 저 흉악한 침략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길 간절히 기원했다.

하지만 이내 광장에 나타난 침략자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주민들의 기도는 멈추고 말았다.

호랑이 앞의 토끼가 얼어붙는 것과 같이, 주민들 모두가 반용족에게 거대한 공포를 느끼며 움츠려들었다.

종의 차이라는 것이다.

하늘 위에 나타난 반용족은 등에 날개가 돋아있을 뿐, 인간과 똑같은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통을 조이는 듯한 위압감으로 주민들을 압박했다.

‘뭐, 뭐야....’

‘라덴 님이.... 라덴 님이 위험하다....!’

전투에 대해서 모르는 일반인들조차도 이와 같은 생각을 품었다.

그건 거의 직감이었다.

오늘 새벽에 갓 만들어진 무대 위로 서서히 하강하는 반용족 세 명이 단지 존재감만으로 도시 하나를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흥, 시시하기는.”

“이래서야 제대로 된 놈이 나올지도 의문이군.”

광장에 가득 찬 인파가 제자리에 주저앉거나 몸을 덜덜 떠는 모습을 쓱 훑어 본 반용족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콧방귀 뀌며 날개를 회수하는 그들을 지켜보는 플레이어들 또한 마찬가지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건방진 놈들.’

‘마음 같아선 내가 나서고 싶군.’

고향은 각별한 법이다.

프론티어를 시작의 도시로 선택하고 몇 년 째 활동해온 플레이어들은 이번 사태에 큰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유일한 반용족 플레이어 하오에게도 범접하지 못하는 마당에 하오보다 레벨이 훨씬 더 높은 NPC들에게 덤벼봤자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테임 공작의 경고가 있었다.

어젯밤, 스테임 공작은 이번 상황을 공표하며 프론티어의 군인들과 주민들에게 단단히 못 박았다.

반용족을 쫓아내는 건 라덴의 역할이니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대영주의 경고를 무시했다간 어떤 페널티가 발생할지 몰랐기에, 플레이어들은 함부로 나서기보다 일단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자드. 번헬리어의 적통이신 헬레나 님을 섬기는 몸이다.”

“번헬리어?”

“설마 악룡 번헬리어를 말하는 거야?”

웅성웅성.

3명의 반용족 중 한 명이 나서서 자신을 소개하자 한 바탕 소요가 일어났다.

안 그래도 반용족에게 압도당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선 드래곤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반용족의 주장을 한 귀로 흘리지 못했다.

진실이 아닐까. 만약 진실이라면 인간이 무슨 수로 반용족과 맞서 싸운단 말인가, 하는 그런 막연한 불안들에 휩싸였다.

반용족을 미개하고 흉포한 야만족이라고 선전해온 사하란 제국의 역대 황제들의 노력이 물거품 되는 순간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거짓을, 반용족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부셔버렸다.

“헬레나 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는 너희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너희에게 우리를 즐겁게 만들어줄 저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봐라. 그럼 너희들 모두 무사히 살아남아 우리의 노예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단, 즐거움을 안겨줄 저력조차 없는 쓰레기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말을 멈춘 자드가 광장의 사람들을 쓱 둘러보았다.

눈꽃보다 차가운 금색의 눈동자는 파충류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오싹.

반용족은 드래곤의 후손이 맞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확신을 품게 만드는 눈동자였다.

“....약속대로 너희들 절반을 죽이고 우리 입맛에 맞는 놈들만을 남겨 노예로 삼도록 하지. 그편이 훨씬 더 효율적일 테니까.”

공포에 질려 침묵하는 프론티어의 주민들에게 선포하는 자드.

그의 좌우에 나란히 선 하급전사들이 기세등등해지는 그때 무대 위로 한 명의 인간이 올라섰다.

라덴이었다.

주민들이 신뢰하고 선망해온 프론티어의 최강자.

“....아.”

라덴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렸던 주민들이 탄식했다. 본래 그들은 라덴을 열렬히 응원할 계획이었지만 현실을 마주하자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 최적화 된 이상적인 신체비율과 근육을 자랑하는 반용족 앞에 선 라덴의 체구가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인 까닭이다.

겉으로 보이는 차이부터 반용족이 라덴을 완전히 압도했으니 주민들 입장에서도 라덴을 응원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라덴을 사지로 떠미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주민들 중 한 명이 용기내서 소리쳤다.

“라덴 님! 도망치세요!! 혼자서 희생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영웅의 승리다.

영웅이 노리개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외침에 담긴 간절한 마음이 열병처럼 번져나갔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주민들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라덴을 무대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라덴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찰랑이는 미늘 갑옷을 무장한 그는, 홀로 3명의 반용족을 마주하고도 위축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을 선사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요?”

“큭큭!!”

웃음밖에 안 나오는 질문이다.

하지만 반용족들은 귀를 의심하지 않았다.

공포에 미친 인간은 황당한 개소리를 지껄이기 일쑤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충분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웃기 바쁜 하급 전사들을 대신해서 자드가 답하자 라덴이 고개를 저었다.

“확답을 듣고 싶소.”

“흐음....”

자드가 힐끔, 자신의 곁에 선 하급 전사 1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이름은 프라바.

어제 새벽 이곳에 사신으로 방문했던 장본인이다.

“프라바, 네가 대결 중에 죽으면 우리가 어찌해주길 바라나?”

“잿빛으로 꺼져가는 내 시신에 침을 뱉어라. 제국의 솔로 넘버 나이트도 아니고 이런 변방 소국의 무명소졸에게 죽을 일은 없겠지만.”

이제 제국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헬레나는 그 변화를 깨달았기에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쫓아온 반용족들은 아직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제국을 중심으로 사고했다. 제국인, 그중에서도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류를 하등한 생물쯤으로 치부했다.

프라바의 대답을 듣고 흡족하게 웃은 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군. 네가 설령 우리의 동족을 죽이더라도 후환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어떠한 보복도 가하지 않을 것이며, 반전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할 테니까.”

“약속의 내용도 바꿔야할 것이오.”

“....?”

자드의 시선이 무대 아래로 향했다.

노년의 인간이 보였다.

행색이 딱히 화려하진 않았지만, 곁에 거느린 호위 병력을 보아 그가 이 땅의 주인인 듯했다.

역시나.

“나는 위대하신 그리드 국왕전하께 이 땅의 통치를 위임 받은 스테임 공작이라고 하오.”

대화에 끼어 든 인물은 프론티어의 영주가 맞았다.

자드가 그를 노려봤다.

“너희들의 왕 따위가 위대하다고? 말에 유의해라.”

“....”

“그래서, 약속의 내용을 바꿔야한다는 건 무슨 소리지?”

“우리의 대표가 그대들의 대표를 이기면 우리가 더 강하다는 뜻이 되잖소. 우리가 이기면 그대들이 우리 백성들을 노예로 삼을 게 아니라 우리가 그대들을 노예로 삼아야지. 그게 공정한 내기 아니겠소?”

“....적잖게 미쳤군.”

자드는 슬슬 짜증을 느꼈다.

겁에 질려 미쳤다고 해도 정도껏 미쳐야지, 이쯤 되자 귀엽게 봐줄 수준을 넘었다.

“너희들 하등생물 따위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후.”

자드의 성질 같아서는 당장 이 자리의 모든 인간을 살육하고 싶었다. 하지만 반용족에게 필요한 건 프론티어에 존재하는 경제와 인력이었다. 이곳을 무너뜨렸다간 헬레나의 분노를 살 것이 뻔했다.

간신히 화를 억누른 자드가 프라바에게 눈짓했다.

“언제까지 주둥이를 놀리게 놔둘 생각이냐? 어서 행사를 진행하도록 해.”

“아, 알았어.”

자드의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는 사실을 눈치 챈 프라바가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더 이상 대화 따위는 없다고 선포하듯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변신을 진행했다.

그의 이번 역할은 프론티어의 인간들에게 공포를 새기는 것.

최대한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꾸둑! 꾸두둑!!

프라바의 어깨가 넓어지고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긴 팔과 다리 끝에 달린 손과 발이 2배 이상 커졌고 그 끝으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왔다.

“꺄아악!”

“히, 히익!”

급기야 전신을 검은 비늘로 뒤덮은 프라바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프론티어의 백성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끔찍한 소란을 연주 삼아 미소 지은 프라바가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이어서.

콰아아아아아앙!!

검은 브레스가 쏘아졌다.

나무판자로 만든 무대의 지면이 브레스의 충격파를 감당 못하고 뜯겨나갔다.

반용족의 몸속에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격이었다.

그것을,

콰앙!

라덴은 <성스러운 빛의 방패>로 막아냈다.

이번 전투에 앞서서 그리드가 제작해준 2개의 방패 중 하나였다.

‘역시 브레스부터 쏘는군.’

가상의 반용족과 수백 회 겨루며 경험을 쌓은 라덴.

프라바가 자신의 예상대로 나오자 자신감을 품은 그가 성스러운 빛의 방패를 회수하고 <삼겹판>을 꺼냈다.

그 방패 위로 프라바의 발차기가 충돌했다.

쩌엉!!

“....!?”

프라바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브레스를 쉽게 막아낸 황금색 방패의 성능에 놀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발차기까지 가로막히자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생겨먹은 방패들이지?’

휘리릭!

방패를 찬 반동을 이용, 빠르게 회전한 프라바가 전광석화처럼 꼬리를 휘둘렀다.

‘그 잘난 방패로 이것도 막아 봐라!’

반용족의 꼬리는 어느 각도로든 자유롭게 움직인다.

라덴이 꼬리를 방패로 막는 순간, 프라바의 꼬리는 방패의 사각을 파고 들어 라덴의 심장을 찌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탓!

라덴은 프라바의 꼬리를 방패로 막지 않았다. 도리어 꼬리를 밟고 뛰어 오르더니 프라바의 대가리를 철봉으로 후려쳤다.

마치 반용족과 많이 싸워본 움직임이 아닌가?

꼬리치기에 담긴 속임수를 읽은 듯한 라덴의 움직임에 프라바는 매우 놀랐다. 하지만 이내 우연으로 치부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만약 라덴이 반용족과의 전투에 익숙했다면, 저딴 얇은 철봉으로 반용족의 비늘을 부술 생각 따위 꿈에도 못했을 테니까.

‘나하고 싸울 거면 철퇴를 준비했어야지! 하하!’

반용족의 비늘을 부수기 위해선 무거운 둔기가 필요하다. 검으로는 절대 벨 수 없고, 하물며 저딴 얇은 철봉으론 흠집조차 낼 수 없다.

피식 웃은 프라바가 팔을 들어 철봉을 막아내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어어엉!!

“....!”

굉음이 울려 퍼졌고, 프라바의 심장이 두근! 하고 크게 뛰었다.

철봉에 부딪친 그의 손목에서 후두둑, 비늘이 떨어지고 있었다.

“뭣....!”

경악한 프라바가 황급히 팔을 뒤로 뺐지만 그보다 라덴의 행동이 한 발 빨랐다.

프라바의 손목을 때림과 동시에 미끄러지듯이 내려간 철봉의 끝에서 튀어나온 가시가 비늘을 잃고 살을 드러낸 프라바의 손목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크아가악...!!”

예기치 못한 고통이 프라바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축 늘어지는 팔을 붙잡고 물러서며 브레스를 쏘는 그의 눈에 황금 방패를 꺼내들고 쫓아오는 라덴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빌어먹을!!”

콰아앙!!

쏘아진 브레스가 또 다시 방패에 가로막힌다.

자욱하게 번지는 연기를 꿰뚫고 튀어나온 라덴의 옆구리를 프라바의 꼬리가 후려 쳤지만, 수백 개의 미늘이 찰랑이는 갑옷이 그 충격을 대부분 흡수했다.

“쿨럭....!”

라덴은 한 움큼 피를 토해내고도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대로 돌진해 프라바의 두꺼운 목을 노리고 철봉을 휘둘렀다.

쩌어엉!!

유리처럼 깨져서 흩어지는 비늘이 프라바의 시야 한편을 장식한다.

등골이 오싹해진 프라바가 발악적으로 휘두른 주먹이 라덴의 가슴을 때렸다.

하지만 라덴을 멈추지는 못했다.

주먹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라덴은 <라덴용 삼겹갑>이 무색하게도 허리가 꺾여나갔고 입과 코에서 피를 뿜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푸우욱!!

날카로운 가시가 프라바의 목을 꿰뚫었다.

프론티어의 주민들이 환호했고 자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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