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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29화 (1,119/1,794)

템빨 58권 - 09화

밝은 주황색의 머리카락이 태양을 보는 듯하다.

눈보라에 감춰진 줄 알았던 하늘 위 태양이 사실은 지상에 떨어진 게 아닐까 싶다.

“57분인가.”

펄럭이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긴 헬레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오스 산맥의 마지막 능선.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흉포한 몬스터로 득실거렸던 그곳에 이젠 그녀 혼자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짧은 고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다.

이제 몇 초 후면 새로운 몬스터들이 노도처럼 밀려들 것이고, 헬레나에겐 이를 감당할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후후훗....”

표정이 없어 차갑게 보였던 헬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실상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어차피 제국만한 장난감은 없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고향에 남은 동족들을 향한 비웃음.

‘지금의 제국은 노리개조차 못 된다는 걸 조만간 깨닫고 실망할 모습들이 기대되네.’

“헬레나 님!”

7번째 능선에서 몇날 며칠이고 쉬지 않고 싸우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해야할까.

즐거운 마음으로 계산해 보며 6번째 능선으로 돌아온 헬레나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반용족 자드가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뭔데?”

헬레나가 쌀쌀맞게 물었다.

그녀를 쫓아 카오스 산맥으로 이주해온 스무 명의 반용족은 공교롭게도 그녀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의도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헬레나의 짝으로 간택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수컷들.

가당치도 않은 것들이다.

헬레나가 원하는 짝은 무조건 그녀보다 강해야했다.

“헬타본 님의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알아.”

“....!”

“명색이 헬의 이름을 이은 녀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느낄 수 있다고.”

번과 헬.

시조 라우의 자식이었던 그들의 직계는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역대 반용족의 로드는 전부 번과 헬의 이름을 잇는 자였다.

그리고 이번 대엔 헬레나가 로드가 될 차례였다.

번과 헬의 후손이 차례대로 로드가 돼야 한다는 규칙에 의거해서였다.

하지만 헬레나는 로드가 되지 못했다.

그녀가 로드가 되면 반용족 전체를 카오스 산맥으로 이주시키겠다고 발의한 여파였다.

고귀한 반용족이 그저 본능밖에 없는 몬스터와 어울려서야 되겠냐는 반발이 발생했고 헬레나의 입지가 약해졌다.

그리고 반용족 역사상 최초로 번의 이름을 이은 자가 2대 연속으로 로드로 선출됐다.

헬레나는 수치심을 느꼈지만 이내 곧 거대한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계기는 칠공작의 방문에 있었다.

창성 레이첼이라고 했던가.

겁도 없이 반용족의 부락을 방문했던 놈은 헬레나의 기준에서 봤을 때 약했다.

칠공작이 아닌 구공작이라고 불렸던 시절의 공작들과 비교하면 수준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상급 전사들이 놈을 쉽게 감당하지 못했다.

세월의 흐름이 거듭되는 동안 제국은 약해졌고, 그런 제국과의 소꿉장난에 익숙해진 반용족의 실력 또한 몰락했다는 반증이었다.

그 사실을, 헬레나를 제치고 로드의 자리를 꿰찬 번츠델 또한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본래라면 로드가 되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 났던 놈의 로드를 향한 집착은 굉장했다. 보이는 진실을 외면한 놈은 제국과의 놀이에 몰입하는 동족들을 도리어 격려했다.

그것이 헬레나에겐 기회가 되었다.

번츠델이 로드의 자리에 집착하는 동안 그녀는 우습지도 않은 놀이터로 전락한 고향을 떠났다.

이때 평소 눈여겨봤던 동족들에게 함께하자고 설득했지만 그녀를 따른 건 발정난 수컷 스무 명이 전부였다.

헬타본도 그중 하나였고 말이다.

놈을 향한 헬레나의 기대치는 처음부터 낮았다.

“고작 여섯 번째 능선의 몬스터들에게 개죽음 당할 수준의 버러지야. 끈질기게 살아남아 헬의 이름에 먹칠을 하느니 차라리 일찍 죽어준 게 고맙네.”

“마, 맞습니다. 하하....”

6번째 능선의 몬스터들이 너무 강하다. 제국의 정예병력 100명보다 몬스터 한 마리가 강할 정도인데 번식력은 무한하니 이대로는 위험하지 않을까 싶다.

이와 같은 걱정을 품고 있던 자드의 입장에선 훌륭한 전력 중 하나였던 헬타본의 죽음이 공포로 다가왔다. 하지만 헬레나가 차갑게 반응하자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를 지나 허름한 움막에 들어선 헬레나가 작은 욕통에 몸을 담그고 물었다.

“내일 프론티어에 보낼 사신과 동행할 거라고?”

“네, 그때 헬레나 님께서 입으실 여벌의 드레스도 많이 챙겨 오겠습니다.”

헬레나가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긴 자드가 대답했다. 그는 고작 한 번의 전투로 넝마가 된 헬레나의 옷가지가 낯설었다.

제국의 솔로 넘버 나이트와 1만 대군을 베어 죽이면서도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던 그녀 아닌가.

7번째 능선에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건지 궁금하다.

두근! 두근!

호전성에 지배당해 7번째 능선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자드를 헬레나가 비웃었다.

“헬타본보다 더 심한 개죽음을 당하고 싶다면 도전해보던가.”

“아, 아닙니다. 하하.... 우선 프론티어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올 때 포도주.”

“마차에 가득 실어서 가져오겠습니다!”

움막을 떠나는 자드와 그를 지켜보는 헬레나.

두 사람에게 있어서 프론티어는 변방의 부유한 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입김 한 번으로 지배할 수 있는, 여느 평범한 인간들의 땅과 똑같이 보았다.

***

프론티어 중앙광장.

본래라면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어야할 그곳이 철저히 봉쇄됐다.

따앙! 따앙! 따앙!!

스컹스컹스컹!!

못 박는 소리와 톱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수백 명의 목수가 아름다운 분수대 옆에 어떤 무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것은, 라덴의 무덤이었다.

정작 목수들은 몰랐지만 라덴만큼은 알았다.

“.....”

라덴이 고요한 새벽을 회상했다.

사나운 존재감을 과시하며 성에 난입한 반용족의 사신은 오직 영주만이 오를 수 있는 테라스를 밟고 섰다. 그리고 프론티어의 전경을 오시하더니 도시 중심에 있는 거대한 광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에 무대를 건설해라. 내일 오전,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프론티어의 최강자와 내가 싸울 것이다. 삼류 낭인 따위를 희생양으로 삼지 마라. 너희들이 내보내는 놈의 실력이 형편없어 우리를 지루하게 만든다면 이 도시의 주민 절반을 학살할 테니까.”

일방적인 통보였다.

라덴을 향한 사형선고였다.

짧은 만남만으로 반용족 사신과 자신의 실력차이를 절실히 느낀 라덴은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라덴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스테임 공작과 이 땅을 수호하기 위해서 기사가 된 거니까.

주인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근!

목수들이 짓는 무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라덴의 심장 박동도 커졌다.

두근!

무대에 오르는 계단이 완성되자 라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계단이 자신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악랄한 악마의 입처럼 보였다.

거대한 공포가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라덴.”

“각하!”

멍하니 선 채 무대를 바라보던 라덴이 깜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스테임 공작이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평소였다면 이미 진즉에 스테임 공작의 기척을 읽고 몸가짐을 정돈했으리라.

자신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한 라덴이 정신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떨리는 손을 스테임 공작이 꽉 잡아 쥐었다.

“도망쳐라.”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다.

라덴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온 스테임 공작에겐 라덴이 자식과도 같았다. 아이린을 시집보내고 적적해진 그를 위로해준 사람이 바로 라덴이었다. 라덴의 올곧은 성품이 그의 자랑이었고, 라덴의 뛰어난 재능이 그의 즐거움이었다.

스테임 공작은 템빨국을 지탱할 기둥 중 하나로 성장해 손주의 힘이 될 라덴이 허무하게 죽는 걸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라덴에게 도망치라고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라덴의 긍지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맞서 싸우겠노라는 기사의 결의를 어찌 외면하겠는가.

그저 묵묵히,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며 라덴을 응원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1시간 전, 우연히 보고 말았다.

그리드 전하께서 던진 한 마디 희망에 안도하며 기대를 품던 라덴의 표정을.

비록 찰나에 불과했지만 스테임 공작은 똑똑히 목격했다.

라덴의 삶을 향한 열망을 느꼈다.

“반용족은 내가 맡을 테니 너는 잠시 라인하르트에 피신해 있거라. 왕자 전하를 보필하며 때를 보다가 추후 국왕 전하의 선택에 따라 다시 이곳에 돌아올 것인지를 결정해라.”

비록 천재의 범주에는 들어서지 못한다 하나, 스테임 공작의 무재 또한 어디 내놔서 부끄러울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강했다. 그렇기에 북부를 지켜올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늙어 쇠약해졌다는 점이지만, 세월을 대가로 얻은 경험들이 그의 몸에 녹아 있었다.

반용족의 노리개가 되어 백성들을 지킬 정도의 재주는 있단 뜻이다.

‘내가 나서는 게 맞다.’

어차피 머잖아 끊어질 목숨이다.

허무하게 죽음을 기다리느니 라덴과 백성들을 지키고 떠나는 게 옳다.

“걱정할 것 없다. 반용족이 원하는 것은 프론티어의 물자지 프론티어의 멸망이 아니다. 일단 백성들이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 이후에는 국왕 전하께서 반용족을 토벌하고 프론티어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통치해주실 게다.”

스테임 공작이 이번 위기에 대응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 없었다.

안 그래도 프론티어의 전력만으론 상대할 수 없는 반용족이 갑자기 나타나 그에게 뭘 어찌해볼 시간조차 주지 않고 몰아 붙였으니 두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는 뜻이다.

대국으로 거듭난 템빨국이라면 반드시 반용족을 물리치고 프론티어를 해방시켜줄 거라고 스테임 공작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요.”

라덴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스테임 공작에게 복종해왔던 그가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제가 싸울 겁니다.”

라덴은 길게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당연한 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라덴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당연하지. 나의 장인께서 저 싸가지.... 예의 없는 침략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난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전하!”

스테임 공작과 라덴이 화들짝 놀랐다.

대화 도중에 갑자기 사라졌던 그리드가 또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지슈카가 ‘그리드만 믿고 있으면 된다.’고 말해주긴 했었지만 상황 자체를 파악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지라 실감을 못했었다. 그리드가 어디서 뭘 하려고 갑자기 사라진 것도 모르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어찌 그리드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겠는가.

어안이 벙벙해진 스테임 공작의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던 그리드가 설명해주었다.

“반용족 한 마리를 사냥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어차피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장인어른께 제대로 설명도 못 드렸군요.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반용족을 사냥하고 오셨다고요?”

그리드가 사라졌던 건 불과 1시간 전의 일이다. 고작 1시간 만에 카오스 산맥까지 날아가 반용족을 사냥하고 돌아왔다고?

에트날 왕국 시절부터 ‘내 사위가 대륙 제일!’을 외쳐왔던 스테임 공작이라지만 지금 그리드가 하는 말은 믿기질 않았다.

“우선 연무장으로 가시죠.”

멍하니 선 스테임 공작을 번쩍 들어 안은 그리드가 성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라덴이 온 힘을 다해서 뒤쫓았지만 스테임 공작을 안고 있는 그리드와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못하고 한참이나 뒤처지고 말았다.

그리드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벽을 느꼈다.

두근!

라덴의 심장이 다시 크게 뛰었다.

이번엔 절망 때문이 아니었다.

반용족이 줬던 절망의 크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희망이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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