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8권 - 07화
“오늘 밤에 곧바로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뭐라고?’
스테임 공작의 속삭임이 그리드를 의문에 빠뜨렸다.
프론티어.
북쪽의 끝이자 템빨국의 끝.
사시사철 눈보라가 몰아치고 험한 산세에 둘러싸인 이곳은 본래 중앙정부와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다. 멀어도 너무 멀다는 게 기본적인 문제였다. 반 그리드 연합군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을 정도로 프론티어는 외딴 지역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반 연합군 사건을 계기로 경각심을 품은 그리드는 템빨단원 일부를 북부 전역에 상주시켰다. 그리고 북부에서 특이사항이 발생할 경우 바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성벽 너머의 괴수와 야만족으로부터, 내부의 적들로부터 홀로 쓸쓸히 북부를 수호하는 스테임 공작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그렇다.
이제 그리드는 프론티어의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프론티어에 이변은 없었다.
‘근데 뭐가 위험하다는 말씀이시지?’
“성으로 드시지요.”
고개를 들고 그리드를 안내하는 스테임 공작의 만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조금 전의 심각한 표정은 온데간데없는 것을 보아 가신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눈치였다.
“추워 보이는 구려.”
스테임 공작이 자신의 망토를 벗어 지슈카에게 덮어주었다. 주작궁의 소유자인 지슈카는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않았지만, 굳이 호의를 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순순히 망토로 몸을 가렸다.
“전하께서는 필요 없으시지요?”
“그럼요.”
발할라를 두드려 보인 그리드가 스테임 공작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그리고 스테임 공작의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질문했다.
“뭐가 위험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에트날 왕국의 잔당이라도 남아있던 겁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진즉에 발본색원하였지요.”
“허면....?”
“반용족 중 일부가 카오스 산맥으로 이주를 해왔습니다.”
“....!!”
성벽 너머에 있는 카오스 산맥은 서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크고 험준한 산맥이다. 무려 8개의 산줄기가 소용돌이처럼 얽혀있었다.
한땐 드래곤이 머무는 곳이라는 전설이 있었을 정도.
-거기는 초입부근에도 400레벨대 몬스터가 서식한다며? 조금만 깊숙이 들어가도 500레벨 이상의 몬스터가 출현한다던데 반용족 놈들은 무슨 배짱으로 그런 곳에 둥지를 틀었다는 거야?
놀란 지슈카가 귓속말을 보내오자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400레벨 이상의 몬스터는 초입을 조금 지나야 출현해. 초입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레벨은 평균 200에서 300이고.
-아~ 소문이 과장된 곳이었구나.
-아니, 전혀.
-....?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가도 500레벨 이상의 몬스터가 출현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야. 스컹크가 알려줬어.
-....!
카오스 산맥의 난이도는 능선 하나를 넘을 때마다 급격히 상승한다.
첫 번째 능선에는 200레벨~300레벨대의 몬스터가 서식하며 바로 놈들이 북부의 숙적이었다. 북부의 군대는 벌써 수백 년째 놈들과 사투를 벌여왔다.
간혹 두 번째, 세 번째 능선에서 이탈한 정예 몬스터라도 출현한다 치면 스테임 공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직접 출정해야 간신히 막아내는 수준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4번째 능선부터는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스테임 공작이 몇 번이나 탐사를 시도했지만 늘 수포로 돌아갔다는 4번째 능선.
생태계조차 파악하지 못한 그곳엔 3번째 능선의 몬스터들과 비교해도 배 이상 강력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는 소문이었다.
“정확한 정보입니까? 카오스 산맥에는 반용족 입장에서도 위협적인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을 텐데요.”
“그래서 굳이 카오스 산맥으로 이주한 거라고 하더군요. 반용족의 호전성을 충족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라고 합디다.”
“누가요?”
“반용족 본인이 그랬습니다.”
“네?”
“오늘 이른 새벽에 반용족의 사신이 다녀갔습니다.”
스테임 공작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사건을 생생히 떠올리자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놈이 말하더군요. 내일 아침까지 이 땅에서 가장 강한 인간을 자신 앞에 대령하라고. 그자가 단 1분이라도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준다면 앞으로 평생 이 땅을 침략하지 않겠다고.”
사하란 제국의 화합정책이 일으킨 나비효과였다.
본래 사하란 제국에 의해서 고립돼있었어야 할 반용족이 자유를 되찾고 활개 친 끝에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와버렸다.
“....자존감이 높은 종족이니만큼 약속은 지켜줄 거라고 믿습니다.”
반용족의 악명은 자자하다.
한때 이종족 말살 정책을 펼쳤던 제국조차 반용족은 토벌하지 못하고 경계하는 것이 한계였다. 심지어 적기사단 전력의 절반과 대마법사, 거기에 수만 대군을 주둔시켜서 놈들이 제국의 국경을 넘지 못하게끔 막았다.
북부의 전력으로 반용족과 맞서 싸운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설령 템빨국 전체가 놈들의 토벌에 나선다고 해도 큰 희생이 불가피할 것이었다.
급기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스테임 공작의 시선이 곁에 선 라덴에게 향했다.
북부제일기사로 우뚝 선 라덴의 표정은 결연했다.
“제가 반용족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겠습니다. 하니 전하와 각하께서는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스테임 공작이 그리드에게 떠나라고 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리드는 라덴보다 강했으니까.
그리드가 내일 아침까지 이곳에 머물렀다간 라덴이 아닌 그리드가 반용족의 제물이 될 것이다.
그렇다.
라덴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이미 결정 된 이야기였다.
북부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가 북부를 위해서 희생해야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뭐 그딴 개새끼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붉힌 지슈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끼눈 뜨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기세를 보아 자신이 직접 반용족과 싸울 기세였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곁에 앉힌 그리드가 라덴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기사는.... 아니, 인간은.”
그리드가 회상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 안 나는 녀석들에게 장난감 취급당했던 학창시절을.
그것은 없어도 되는. 아니, 없어야 했던 사고다.
“다른 누군가의 노리개가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
“쓰레기에게 농락당하는 걸 숭고한 희생인양 포장하지 마.”
“....!”
라덴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뚝. 뚝. 뚝....
손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대리석 위에 고여 파문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는 물었다.
“그럼 저는.... 저는 어찌해야하는 겁니까?”
이 땅에서 태어났다.
혹독한 추위와 괴물로부터 고통 받던 나의 가족을, 이웃을 지켜주신 스테임 공작을 마음 깊숙이 존경했다.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다행히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이 땅과 스테임 공작을 수호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기껏 희생을 각오했다.
한데 이제 와서 말 한 마디로 각오를 흔들어놓는 국왕 전하가 조금은 원망스럽다.
“.....”
라덴의 흔들리는 눈빛을 잠시 빤히 바라보던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앳된 티를 벗지 못했던 소년이 어느새 비슷한 또래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자식이 벌써 셋이라던데....
감회를 느낀 그리드가 라덴의 장비 상태를 점검했다.
투구, 갑옷, 견갑, 장갑, 허리띠, 각반, 신발, 망토, 그리고 검과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이템을 파그마의 눈으로 관조했다.
역시나.
북부 제일의 기사답게 장비 상태가 훌륭하다.
스테임 공작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건지 죄다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라덴이 북부의 ‘상징’이 된 까닭에 실용성보다 외관에 신경 쓴 장비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세트 아이템의 부재다.
다행이다.
강해질 요소가 너무 많아서.
“어떡해야 하냐고?”
툭툭.
라덴의 어깨를 두드려준 그리드가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겁게 짓눌린 집무실의 공기를 환기라도 시키려는 듯 창문을 열며 말했다.
“놈들을 때려 죽여야지.”
“....!”
“놈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겠다고? 개뿔. 그냥 조져버려.”
오만한 침략자에게 경고해줄 필요가 있다.
이 땅의 주민들은 강하다. 너희들이 입맛대로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다짐하는 그리드의 시선이 성벽 너머 카오스 산맥에 꽂혔다.
순보가 발동할 때까지 계속, 계속, 계속해서 능선을 주시했다.
“제가 무슨 수로....”
잠시 멍하니 있던 라덴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스파앗!
그리드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해진 스테임 공작과 라덴 사이에 덩그러니 남겨진 지슈카가 씰룩씰룩 웃었다.
“오래간만에 삘 받았나보네.”
지슈카가 그리드에게 호감을 느꼈던 계기는 그의 거침없는 언행에 있었다.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그 당당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겉으로는 신사적이고 뒤로 음흉한 계획이나 세우는 놈들보단 백배 천배 낫다고 생각했었다.
“조져버리라니.... 멋지잖아.”
“....”
“....”
갑자기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콧김을 내뿜는 지슈카의 모습에 당황한 스테임 공작과 라덴이 침묵했다.
***
‘오, 나한텐 여기도 괜찮을 것 같은데?’
고레벨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카오스 산맥이 사냥터로 이용되지 않는 이유는 지독한 환경에 있었다.
살을 베는 눈보라, 얼어붙은 공기에 얽혀있는 독무, 장비를 부식시키는 늪지대, 온갖 독초와 가시덩굴이 자연적으로 빚어낸 함정 등등.
플레이어가 활동하기엔 너무 많은 제약이 붙었다.
스컹크의 조언에 따르면 90퍼센트 이상의 추위 내성, 80퍼센트 이상의 독 내성, 고급 5레벨 이상의 함정 수색 스킬이 이곳의 기본 활동 조건이라고 했다.
늪지대에 빠지는 순간 아이템을 잃고 싶지 않으면 최소 800 이상의 내구력을 갖춘 장비들을 무장해야한다고도 했고.
‘함정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초월자의 감각으로 충분히 감지되네.’
그리드에게 추위와 독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 대부분의 내구력이 무한이었다.
타앗.
온갖 함정을 가볍게 피한 그리드가 어느덧 네 번째 능선을 넘었다.
출몰하는 몬스터들의 레벨은 무려 450에 근접했지만 그리드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시조새를 닮은 몬스터의 폭격이 제법 까다롭긴 했지만 갓 핸드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견뎌냈다.
‘여기서부턴 좀 위험할 수도 있겠군.’
빠르게 다섯 번째 능선을 넘은 그리드가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추위 속에서도 불꽃을 활활 피우는 용암 골렘들이 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480.’
늪지대를 가리고 있는 설원을 꿰뚫고 튀어 오른 몬스터 한 마리를 해치우고 정보를 얻은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깨달음 효과 덕분에 획득 경험치량이 눈에 띄게 늘었지만 그걸 보고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만약 반용족의 은신처가 이곳보다 깊은 곳에 존재한다면, 녀석들의 평균 레벨이 500을 넘긴다는 뜻이 됐기 때문이다.
그건 안 된다.
라덴이 북부 최고의 천재라는 타이틀을 지닌 네임드 NPC라곤 하나 아직 그의 레벨은 380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젊은 편에 속하는 탓인지 성장치가 낮았다.
‘아무리 템빨을 잘 갖춰도 200단위 레벨 차이는 좁히기 힘들어.’
스탯은 100레벨 단위로 각성 효과를 맞이한다.
499레벨과 500레벨의 차이는 하늘과 땅 수준으로 크다.
라덴이 반용족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 조건은 ‘반용족의 레벨이 400대일 것.’이다.
‘테루찬이 증명했듯이 이종족의 레벨이 높긴 하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임드 캐릭터들에 한해서고.’
아무리 반용족이라도 평범한 녀석들의 레벨은 400대에 머물러 있길 바라야한다.
생각하는 그리드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산속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는 더 요란하게 날뛰었다. 반용족의 시선을 끌 수 있게끔 일부러 효과음이 크고 이팩트가 화려한 스킬들을 써서 몬스터들을 학살해나갔다.
효과는 확실했다.
“인간? 하핫! 성격이 급하네! 내일 아침에 우리가 찾아갈 거라고 말했을 텐데!”
반용족이 나타났다.
놀라운 사실은, 그리드를 발견한 녀석이 곧바로 공격을 날려 왔다는 점에 있었다.
‘계약 효과도 소용없군.’
<이족의 왕>으로써 하오와 <계약>을 맺은 그리드는 반용족의 호전성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패시브 효과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대화는 가능할 거라고 봤는데 그딴 건 없었다.
반용족이라는 종족 자체가 워낙 난폭했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쩌엉!
묵직한 브레스를 회(回)로 맞받아친 그리드가 깜짝 놀라는 반용족에게 쇄도하며 음침하게 웃었다.
‘네놈들의 약점이 뭔지 낱낱이 파헤쳐주마.’
내일 아침.
반용족은 라덴의 템빨에 카운터를 맞고 어안이 벙벙해질 것이다. 즐기지 못할 것이다. 후회할 것이다. 공포를 맛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