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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26화 (1,116/1,794)

템빨 58권 - 06화

그리드의 반신 시해 업적이 기폭제가 되었다.

급기야 신이 되겠노라 선언한 그의 서사시에 수많은 플레이어가 자극을 받았다. 자신들 역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믿으며, 더 큰 시간과 열정, 또는 돈을 Satisfy에 쏟아 부었다.

플레이어 평균 성장률이 역대 최고치를 달성하게 된 경위다.

선순환이 시작됐다.

각 지역 플레이어들의 활동이 왕성해지자 지역주민들의 고충이 빠르게 해결됐다. 본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지역주민들의 능률이 올라 필수 소모품의 시세가 안정됐다. 특히 거품이 심했던 버프 물약의 가격이 싸졌다. 풀도핑 상태를 유지하고 사냥해도 손해는 안 볼 정도였다.

플레이어들의 사냥 효율이 오른 만큼 온갖 종류의 아이템이 시장에 풀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전보다 쉽고 싸게 장비를 맞춘 플레이어들이 상위 사냥터를 본격적으로 공략해나갔다.

범람하는 몬스터에게 침략 받던 일부 지역들이 안정을 되찾았다.

혼란한 지역이 줄어들면서 야탄교의 활동 범위가 축소됐다.

야탄교의 출현이 뜸해진 만큼 레베카교 소속 플레이어들에겐 여유가 생겼다. 그들의 활동 반경이 보다 자유로워지고 커지자 ‘힐러 가뭄’이라는 고질병에 시달려왔던 Satisfy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각종 파티에서 힐러의 모습을 목격하는 건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힐러를 얻은 파티들은 이전까지 도전하지 못했던 보스 레이드와 사냥터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이는 플레이어의 전반적인 성장력을 극대화시켰다.

단 한 명의 플레이어.

바로 지존 그리드의 영향력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각종 통계를 통해서 이 모든 변화를 인지한 S.A그룹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아니, 조금 더 나쁜 조건에서 게임을 시작했던 평범한 플레이어 한 명이 이처럼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그들은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정작 그리드는 변화를 자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

그리드의 장기 순방 일정이 시작됐다.

전 가우스 왕국령부터 시작해 장인 스테임 공작이 다스리는 북방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템빨국 전역을 시찰할 계획이었다.

실지(實地)를 살피는 것이 목적인만큼 순간이동 등의 마법은 봉했다. 직접 두 발로 걸어 이동하며 각 지역의 상황을 소상히 파악했다.

기왕 나온 김에 그동안 밀린 국왕 퀘스트를 진행하며 백성들과 교류하던 그가 문득 미소를 흘렸다.

“왠지 분위기가 좋네.”

확실히, 달라졌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치안이 다소 떨어지는 작은 마을의 백성들까지도 삶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 마을의 백성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적이나 몬스터의 출몰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젠 전혀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이 되게 적극적인가 봐. 그림자단의 보고에 따르면 근방의 도적떼들이 씨가 말랐다네.”

“씨가 말랐다고? 도적떼의 본거지들이 리스폰 될 때마다 공략하는 건가?”

“응.”

“흐음....”

도적 퇴치 퀘스트는 보통 작은 마을에서 발생한다. 주둔 병력이 많아 치안이 좋은 도시 근방에는 도적들이 기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도적 퇴치 퀘스트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나타난다.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가난하다. 그들이 플레이어에게 약속하는 퀘스트 보상은 형편없는 편에 속했다.

플레이어들의 참여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어지간히 벌어먹기 힘들거나 정의감이 넘치는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도적 퇴치 퀘스트를 거부했다. 설령 퀘스트를 받더라도 딱 퀘스트 목적만 달성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적단의 본거지를 습격하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여기도?”

“응.”

“여기도네?”

“그러게.”

그리드가 들리는 작은 마을 전부가 도적단으로부터 해방 된 상태였다. 모든 지역의 도적단 본거지가 리스폰 되는 족족 토벌당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그리드는 의문이 생겼다.

한두 번이면 우연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테지만 모든 마을의 상황이 같은 걸 우연으로 넘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혹시 라우엘이 별도의 토벌대를 고용해서 운영하는 건가?”

“이런 외진 지역까지 신경 쓰는 건 제아무리 라우엘이라도 힘들지 않을까?”

“그럼 지역 영주가 벌인 일이라는 거야? 이 지역 영주가 누구였더라?”

“툰.”

“....걔 성격상 이렇게 꼼꼼하게 치안을 관리하지 못할 거 같은데.”

“그치. 애초에 그럴 여유도 없을 거야. 운용할 수 있는 병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이건 그냥 평범한 플레이어들의 활동이 만든 결과라고 보는 게 맞아.”

“....”

그게 납득이 안 된다는 거다.

일반 플레이어가 도적단 토벌에 이토록 적극적일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라 입장에서야 참 고마운 일이다만....

지슈카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던 그리드가 직접 촌장을 찾아갔다.

“촌장 님, 혹시 일거리 없습니까? 예를 들면 도적 토벌이라던지.”

현재 그리드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이런 시골에서까지 정체를 밝히고 시찰했다간 사열 나온 사단장마냥 백성들에게 민폐였으니 나름의 배려였다.

“음, 글쎄요. 모험자 님들께서 비교적 최근에 도적단 본거지를 토벌해주신 덕분에 이곳은 아직 평화롭습니다.”

이 마을도 마찬가진가.

퀘스트 내용 한 번 확인하기 힘들다.

그리드가 아쉬움에 휩싸인 그때였다.

“촌장 나으리이! 새로운 도적단이 뒷산에 모이는 걸 나무꾼 덱스 씨가 봤다는 구만요!”

“....!”

갑자기 들려온 소식에 촌장의 태도가 바뀌었다.

“모험가 님께서 도적들을 퇴치해주시면 마을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도적 퇴치>

난이도:D

모험자와 마을 주민들을 위협하는 도적을 토벌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도적 50명 토벌(현재 0/50)

퀘스트 클리어 보상:10골드

“.....”

역시 예상대로다.

들어가는 수고에 비해서 퀘스트 보상이 매우 낮다.

어지간한 플레이어에겐 전혀 메리트가 없는 퀘스트인 것인데....

“와우, 예전에 비해선 보상이 3배 이상 늘었네. 우리 때만 해도 3골드 정도가 시세였잖아?”

“백성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나아졌다는 반증이겠지. 그래도 적어.”

도적 토벌 퀘스트의 힘든 점은 수색에 있다.

도적이란 놈들 자체가 약자만 골라 약탈하는 족속이었기 때문에 평소엔 은밀하게 숨어 지냈고, 녀석들을 찾기 위해선 꽤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소요됐다.

‘그런데 도적의 씨가 마를 정도로 도적 토벌에 열중하는 플레이어들이 있다고?’

마침 퀘스트도 얻었겠다, 직접 확인하는 편이 빠를 듯하다.

지슈카와 눈빛을 교환한 그리드가 마을 밖에 솟아있는 야산을 시야에 담았다.

“....!”

지슈카가 화들짝 놀랐다.

바로 곁에 있던 그리드가 바람만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

-야! 순보를 쓰면 어떡해! 기껏 붙어 있고 싶어서 따라왔더니 버리고 가는 건 너무하잖아!

-미, 미안. 습관이라. 금방 돌아갈 테니까 기다려.

“....마법사 님이셨던 겁니까?”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던 촌장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워낙 시골에 사는지라 텔레포트 마법을 본 적이 없어, 화려한 빛 없이 조용히 사라진 그리드의 모습을 보고도 마법이라고 오해하는 것이었다.

푹 눌러쓰고 있는 모자 아래로 손을 넣은 지슈카가 뺨을 긁적였다.

“마법사이기도 해요.”

***

“....!?”

오래간만에 발동해준 순보의 도움을 받아 목적지에 도착한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작은 산.

구조상 몬스터 출몰 확률이 낮아 플레이어의 발길이 뜸해야할 이곳에 수백 명의 플레이어가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뜬다! 도적 뜬다!”

“....”

200레벨 후반쯤 되었을까.

제법 화려한 장비를 무장하고 뛰어다니는 플레이어들의 얼굴엔 의욕이 넘쳤다. 도중에 마주치는 호랑이와 곰 등을 협공해서 사냥하며 산의 정상까지 오른 그들이 마침 리스폰 된 도적들을 향해서 그대로 돌격했다.

숫자에서 한참 밀리는 도적들은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금방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그들이 떨군 소량의 돈과 잡템들을 급히 챙긴 플레이어들이 이번엔 우르르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정상까지 등반하며 도중에 마주치는 짐승들을 사냥했다. 우연히 몬스터라도 발견했다 치면 남에게 빼앗길 새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들이 다시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마침 리스폰 된 도적들이 또 곧바로 사냥 당했다.

“....실화냐?”

몹이 부족하다.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

“몹도 별로 없는데 왜 굳이 여기서 모여서 사냥하는 거래?”

“사냥터가 죄다 가득 차서 마땅한 사냥터가 없다더라. 그나마 도적이 인간형 몬스터라 경험치를 많이 줘서 여기서 노가다하는 거래.”

“뭐? 그게 말이 돼?”

가우스 왕국령을 흡수한 템빨국의 영토는 이제 상당히 큰 편에 속했다. 초보존부터 시작해서 고레벨 플레이어용 사냥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냥터가 템빨국 곳곳에 즐비해 있었다.

근데 사냥터가 가득 찼다고?

말도 안 된다.

플레이어 대부분이 사냥터에 나가있지 않은 이상은.

“....아?”

생각해보던 지슈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을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거리에는 주민들만이 활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를 둘러 봐도 플레이어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디선가 급히 달려와 잡화점에서 물약을 사들고 다시 또 뛰어나가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띌 뿐이다.

‘설마?’

지슈카가 마른 침을 삼켰다.

마침 그리드도 이질감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다.

“플레이어 전부가 사냥터에 나가있어.”

생산직 직업군 유저는 시골에 유입되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이 활성화된 도시를 선호했다.

그래서 눈치 채는 게 늦고 말았다.

여태껏 지나쳐온 마을마다 사람이 적은 이유를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사냥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는 전투 직업군 유저들의 습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래, 본래는 아무리 시골이여도 어느 정돈 플레이어로 북적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해버렸다.

“뭔가, 레벨업 붐이라도 분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은 마을에 있는 시간조차 아까워할 정도로 사냥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치 랭커들처럼 말이다.

그런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이후.

“.....”

가우스 왕국령을 거쳐 남쪽으로,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며 각 지역을 살펴본 그리드는 시대의 변화를 재차 실감했다.

어느 지역을 가도 플레이어들은 사냥터에만 북적거렸다.

‘게임은 즐기는 것.’이라는 마인드로 여유롭게 플레이하는 사람의 비율이 정말 급격히 줄어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열정으로 가득 찼다는 게 느껴졌다.

두근!

그리드의 심장이 뛰었다.

대악마, 양반, 신, 드래곤 등.

인류를 위협하는 잠재적인 적들.

플레이어는 결코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던 그리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라이벌이 많아질 것 같아서 기쁘군.”

플레이어끼리 협력해야하는 순간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오늘날의 변화는 그때에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하는 그리드의 입가가 연신 기쁨으로 씰룩였다.

아직은 다른 플레이어를 경쟁자로만 인식하고 있는 하이랭커 지슈카의 수준에선 지존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쿠우우우웅!!

성문이 내려와 해자를 덮는 광경이 보였다.

성과 설원을 잇는 다리가 된 그것을 밟고 수백 명의 기사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리드와 지슈카를 둘러싸더니 일제히 검을 뽑아 경례했다.

“위대하신 그리드 국왕전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기사들 사이에서 스테임 공작이 걸어 나왔다.

북쪽의 야만족과 몬스터 군단의 침공으로부터 템빨국을 수호해온 그도 이제 늙어 안색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가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눈치 챈 그리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스테임 공작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스테임 공작은 아이린의 아버지이자 그리드의 가장 오래된 후견인이다.

그리드는 여전히 그에게 깍듯했다.

미소 지은 스테임 후작이 그리드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밤에 곧바로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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