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25화 (1,115/1,794)

템빨 58권 - 05화

“두 분께서는 보다 자각을 가지셔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그리드와 피아로를 앞에 나란히 세워둔 라빗이 장황한 연설을 시작했다. 어찌나 옳은 말만 하는지, 그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 중엔 반박할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와 피아로의 귀에는 라빗의 말이 이렇게 들렸다.

“궁시렁궁시렁! 이래라저래라! 짜증짜증!!”

“.....”

“.....”

아무리 훌륭한 조언이라도 반복되면 잔소리가 되는 법이다.

처음에는 본인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라빗의 말을 경청하던 그리드와 피아로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리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쉴 새 없이 떠드는 라빗을 버려두고 자리를 떠났다.

그 움직임이 대단히 은밀하고 빨라서 라빗은 그들이 떠나고 몇 초가 지나서야 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드 전하아아아! 피아로 고오오오옹!”

라빗의 절규가 황량해진 밀밭에 울려 퍼진다.

머리를 쥐어뜯는 그의 모습에 기사들은 측은지심을 느꼈다.

***

“뭔가.... 느낌이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 같다?”

라빗을 따돌리고 성으로 향하는 길.

라우엘에게 전단지 시안을 건네받은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빨강색으로 강조한 조악한 문구들이 도배 된 전단지.

싸구려 티가 팍팍 난다.

삐까소가 정성을 다해 그린 피아로와 휴렌트의 초상이 아까울 지경이다.

....가만, 휴렌트라고?

“여기에 휴렌트가 왜 있어?”

“휴렌트 님이 피아로 님의 농업을 잇게 될 후계자라는 소문이 민간에 무성하거든요. 그걸 이용한 마케팅입니다. 마침 비주얼도 좋으시고.”

“농업을 이을 후계자....”

되뇌어보는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휴렌트가 농부로 전직할까봐 진심으로 두려워진 것이다.

“허허, 좋군요.”

그리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아로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농부 모집용 전단지의 완성도에 매우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한숨 쉰 그리드가 힐끔, 휴렌트를 쳐다보았다.

휴렌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재밌고 괜찮지 않나? 대놓고 싸구려 느낌이 들 정도로 화려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도 좋아 보이고.”

“....아니, 농부라고 오해 받아도 괜찮은 겁니까? 설마 진짜로 농부로 전직할 생각은 아니죠?”

“피아로 님처럼 될 수만 있다면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

“....”

천하의 오러 마스터가 농부 전직을 염두에 두고 있다니.

휴렌트에게 큰 기대감을 품어왔던 그리드가 개탄했다.

물론 휴렌트의 마음도 이해는 됐다.

피아로가 보여온 농부의 힘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피아로가 강한 이유는 농부라서가 아니라 피아로라서다.

휴렌트가 설령 전설의 농부가 되더라도 그는 피아로처럼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휴렌트 본인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뭐, 내가 피아로 님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

“오늘 급격히 발전하신 피아로 님의 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피아로 님이 강한 이유는 농부라서가 아닐 테지.”

바로 봤다.

농부란 세상에 없어선 안 되는, 정말로 훌륭한 존재이지만 전투력이 강한 직업은 아니다.

그냥 피아로가 강한 거다.

그런 그가 오늘 오전을 기점으로 한층 더 성장했다.

‘무쌍심법을 터득한 후로 2배는 강해진 느낌이었지. 체감하기로 고구마 한 방, 한 방의 위력이 절구질에 버금가진 것 같던데.’

비반은 말했다.

무쌍심법이 없는 무쌍검은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고.

당연하다.

무쌍검이 있기에 무쌍심법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무쌍심법이 있기에 무쌍검이 탄생한 것이다.

무쌍심법이 없는 무쌍검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리 없다.

무쌍심법을 익히기 전의 피아로와 익힌 후의 피아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컨디션은 좀 어때?”

어느새 대연병장 근처다.

며칠 전 무너진 막사를 복구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대연병장은 무척 분주했다. 드워프 케를과 건축가 장인들, 그리고 수천 명의 인력이 달라붙어 막사 건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주 좋습니다.”

오늘 오전, 메르세데스를 통해서 무쌍심법의 구결을 전수 받은 피아로는 이를 체득하기까지 상당한 심력을 소모했다.

거기서 쉬지도 않고 그리드와 대련한 것으로 모자라 라빗의 잔소리까지 들었으니 평소였다면 제법 큰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로는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수준을 넘어서 활력이 철철 넘쳤다.

“무쌍검이 무상검법의 전신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같습니다.”

피아로는 기분이 묘했다.

전전대 검성 비반.

수백 년 전 과거의 인물과 자신이 엮여있다는 사실에 어떤 운명을 느꼈다.

“비반 님은.... 필시 고결한 위인이셨겠지요.”

언제 나타날지 모를 후인을 위해 무쌍심법을 남기고 떠난 옛 전설.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피아로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비반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었을 거라고 상상하는 눈치였다.

“...그랬겠지.”

차마 피아로의 환상을 깰 수 없었던 그리드가 어색한 표정으로 동조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검성의 경지를 이룬 무재이자, 세계의 평화를 위해 탑의 결사가 된 비반은 필시 훌륭한 위인이었으니까.

다만 피아로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거라는 게 문제였지만 딱히 거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리시겠지만.”

“....?”

막사 복구 작업을 지켜보며 라빗의 고충을 절실히 이해한 그리드.

앞으로 피아로와 대련할 때는 외딴 섬 같은 곳에서 해야겠다고 다짐하던 그가 피아로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언젠간 비반 님을 만나게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

“하하,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을 무슨 수로 다시 만나겠습니까.”

비반의 검술이 우연히 피아로의 가문에 전해졌고, 우연히 그리드가 얻은 무쌍심법이 또 피아로에게 전해졌다.

이걸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피아로는 깊은 운명을 느꼈다. 왠지 비반과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지?”

안 그래도 비쌌던 그리드표 아이템의 시세가 폭등했다.

특히 무기의 시세가 적게는 세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까지 급등했다. 저레벨, 저등급 무기들까지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리드표 무기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

그리드가 <무구의 비>를 뿌릴 때 빌려가는 무기들의 성능이 오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리드표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드표 무기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최대치의 성장을 이루었을 때 폭발할 잠재력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었다.

진성 게이머들은 조금이라도 더 강한 무기를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서민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부자들은 안정적인 투자라고 생각하며 그리드표 무기를 수배했고 그 결과 시장에 유통되는 그리드표 무기는 이제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번 사태의 주역 중 하나가 바로 아스카였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재벌3세인 그녀는 자신의 정보력과 재력을 총 동원해서 그리드표 무기를 사재기해 놨다. 무려 7종, 32자루의 그리드표 무기가 그녀의 창고를 가득 채웠다.

이제 아스카가 할 일은 기다림 뿐이었다.

그녀는 매일 거래소와 경매장을 예의주시했다.

그리드가 시장에 새로운 무기를 대량으로 풀 거라고 예상해서 대량의 현금을 골드로 환전까지 해 놨다.

그런데....

“대체 왜 무기를 안 파는 거야?”

새로운 그리드표 무기가 시장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시세에 밝은 그녀의 입장에선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무기를 만들어 팔면 돈을 그냥 쓸어 담을 텐데 왜 장사를 안 하는 거냐고!”

오직 그리드만이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의 시세가 전부 오른 상황이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그리드는 세계적인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손아귀에 넣었다.

근데 장사를 안 한다.

재벌 수준의 부자가 될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고 있었다.

“바보야? 응? 바보냐!”

이제는 습관이 된 거래소와 경매장 새로 고침 누르기.

1분 주기로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다가 지쳐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아스카가 분노의 새로 고침 연타를 시작했다.

발을 구르면서 도끼눈을 뜨고 포효하는 꼴이 마치 괴수영화 속 괴수 같았다.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다.

“아가씨, 그러지 마세요. 못생겨 보입니다.”

보다 못한 블랙테디가 아스카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아스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연신 그리드 바보를 외치며 새로 고침 버튼에만 집착했다.

하지만 거래소에도, 경매장에도 그리드의 신작은 등록되지 않았다.

캡슐 곁을 지키고 있을 비서가 따로 연락해오지 않는 걸 보아, 아이템 현금 거래 사이트들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벌써 한 달째 이 모양이다.

아스카는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신작을 판매하지 않는 건 바보라서 그런 거라고 이해할 수 있다 쳐! 하지만 무구의 비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또 뭔데? 응? 진짜 장난해!?”

아슈카가 매입한 그리드표 무기 중 2개는 최상급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보스가 드롭하는 레전드리 아이템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났다.

녀석들이 그리드의 호출에 호응하면 어떻게 될까?

레전드리 아이템의 성능을 넘어서는 유니크 아이템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슈카는 녀석들을 애병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호출은 없었다.

벌써 한 달째 무구의 비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일부러 나 괴롭히는 거야?”

저격당한 건가?

모든 게 음모였다고?

급기야 불안해하는 아스카를 블랙테디가 진정시켰다.

“아가씨, 일단 그리드는 돈에 욕심이 없습니다.”

“뭐? 말도 안 돼. 돈 욕심 없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어?”

아스카가 만나온 사람 모두가 돈을 원했었다. 그녀의 돈을 노렸었다.

그래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아스카에게 블랙테디가 설명해주었다.

“이번 사태가 있기 전부터, 그리드에게는 충분히 부자가 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아이템만 만들어 팔았다면 지금쯤 충분히 세계 100대 부자의 반열에 올랐겠죠. 하지만 그의 행보는 아가씨께서도 아시다시피....”

허구한 날 모험만 하고 다닌다.

매일매일 싸운다 싶더니 최근에는 반신마저 때려잡았다.

고작(?) 1천억 대 자산에 만족하고 모험에 집중하는 걸 보아 진성 겜돌이가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리드는 이번 사태에 편승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돈보다 게임.... 진성 겜돌이....”

아스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진성 겜순이인 그녀는 그리드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드를 향했던 마이너스 감정들이 대부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무구의 비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쿨타임이 엄청 길거나 특별한 자원을 소모하는 스킬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만든 무기를 모조리 호출해 비처럼 내리는 스킬.

위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연출은 얼마나 화려할지 가늠조차 안 된다.

그런 스킬을 자주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거다.

아스카도 납득했다.

“흐음.... 그렇다고 봐야겠네.”

오해가 풀렸다.

그리드라는 인물도 새롭게 보였다.

아스카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그리드한테 가서 몇 번 죽여 달라고 하면 될까?”

“네...?”

저 작은 머릿속에서 도대체 어떤 생각들이 오갔던 걸까?

아가씨의 급발진은 지난 20년 동안 질리도록 목격해왔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당황하는 블랙테디에게 아스카가 자신의 생각을 풀이해보였다.

“펜릴 레이드에 도전할 때 템빨국 병사들을 몇 명 죽였었잖아. 그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죗값을 받아야할 것 같아.”

“....갑자기요? 아니, 그리고 병사들을 직접적으로 죽인 건 아가씨가 아니라 크레파스....”

“어쨌든 공범이잖아. 템빨단에 가입 신청 넣으려면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없애야지.”

“....!”

한때 7대 길드 중에서도 최고라는 평가를 들었던 골든 스네이크 길드.

그곳의 간부 출신인 아스카는 두 번 다시 길드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공표했었다.

길드가 한창 잘 나갈 때는 똘똘 뭉쳐 활동했던 길드원들이 템빨단에게 연패하고 사정이 힘들어지자마자 하나둘씩 떠나는 모습을 보고 회의감을 느꼈던 것이다.

한데 이제 와서 템빨단에 가입하겠다니?

“그러니까.... 갑자기요?”

재차 확인을 요구하는 블랙테디에게 아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드 때마다 파티 구하기도 귀찮고. 우리도 슬슬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하지만 가입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긴 해도, 저희는 그리드와 몇 번이나 적대했었으니까요.”

“아니.”

400레벨에 근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몬스터와 네임드 NPC의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중이다.

그리드가 가장 먼저 눈치 챘을 것이다.

“그리드가 진짜 겜돌이라면 우리를 마다하지 않을 거야.”

게임은 이기려고 하는 거다.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이다, 라는 마인드로는 언제까지 승리하지 못한다.

애초에 우리는 그리드에게 원한 살만한 짓을 벌이지도 않았다.

“뭐, 거절당하면 그걸로 끝인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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