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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23화 (1,113/1,794)

템빨 58권 - 04화

“재상 각하! 어째서 전하를 말리지 않은 겁니까!”

라우엘의 집무실을 찾아온 행정관 라빗이 언성을 높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친 건지, 핏대 선 목부터 얼굴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전하께서 나라의 광룡철을 모조리 폐기하시는 동안 재상께서는 대체 왜 잠자코 계셨냐는 말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템빨국의 경제시장은 크게 바뀌었다.

본래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지만 이젠 병기사업이 템빨국을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고 그 이면에 광룡철이 있었다.

무한히 증식하는 광룡철 덕분에 거의 공짜로 무구를 생산해왔으니, 그간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해온 것이다.

광룡철은 템빨국의 병기산업 이윤에 막대한 도움을 주는 보배 중의 보배였다.

한데 오늘 막 돌아온 국왕 그리드가 국가의 모든 광룡철을 회수, 폐기해버렸다는 소식이다.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의무를 지닌 행정관 라빗의 입장에선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전하께서 별도로 보유 중이신 광룡철이 아직 남아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전하를 설득해서 광룡철을 다시 대장장이들에게 보급해야합니다!!”

라빗이 주장하자 라우엘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행정관 라빗이 <국왕 설득> 퀘스트를 제안합니다.]

라빗은 국고를 관리하는 최상위 관료다.

어지간한 템빨국 소속 플레이어는 그가 내리는 퀘스트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우엘은 라빗보다 직급이 높았다. 그것도 훨씬 더.

가볍게 퀘스트를 거부한 그가 라빗에게 질문했다.

“광룡철이 언제부터 이 나라의 것이었죠?”

“그건....”

“광룡철은 어디까지나 그리드 전하의 사유물입니다. 다만 잠시 나라에 빌려주셨을 뿐이죠. 전하께서 그것을 어떻게 처분하시든 우리가 개입할 권리는 없는 겁니다.”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신하의 도리는 전하께 올바른 진언을 해드리는 거 아닙니까? 광룡철을 처분해버리면 템빨국의 경제 성장률은 지금보다 몇 배나 악화될 텐데 그걸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

“아니요. 진언하기에 앞서서 전하를 신뢰하는 것이 참된 신하의 도리죠. 전하께서 다 이유가 있으시니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거 아니겠습니까?”

“.....”

라빗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손익을 따져야한다는 압박감 탓에 잠시 이성을 잃었음을 자각한 것이다.

라우엘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행정관이기에 앞서서 그리드의 신하다.

그리드의 선택에 부정적인 의문을 품기보다 신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는 것이 첫 번째 자세였다.

침묵한 채 생각해본 라빗이 운을 뗐다.

“전하께서는 광룡철의 위험성에 부담감을 느끼신 걸까요?”

“네, 그렇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전하께서 잘하셨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범하게 마련이다.

수만 명의 대장장이 중 누군가 한 명쯤은 광룡철의 증식 성질을 억누르는 것을 깜빡할 수도 있다. 광룡철이 예측 못할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수 년 전 그리드가 제국의 성벽에 박아뒀던 광룡철의 가시들과 황비에게 선물했던 샹들리에를 처리하기 위해 제국이 고생했던 일화를 떠올려 봤을 때, 광룡철이라는 광물의 위험성은 너무나도 컸다.

‘심지어 드래곤들을 불러 모은다지.’

그리드에게 받은 정보를 떠올린 라우엘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과 엮이지 말자는 지론을 지닌 그의 입장에선 광룡철이 소름끼칠 정도로 꺼려졌다.

‘그나마 네펠리나처럼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난다면 또 모를까....’

국가대항전에서 목격했던 드래곤의 존재감이 워낙 크다.

뇌리에 각인 된 충격이 사라지질 않는다.

최근 멋으로 쓰기 시작한 안경을 벗어두고 미간을 누르는 라우엘에게 라빗이 말해왔다.

“전하의 선택을 존중하고, 따르겠습니다.”

흥분을 완전히 가라앉힌 눈치다.

“상계는 도박과 닮은 부분이 있어 위험을 감수하고 이익을 우선하지만 통치는 다르겠지요.”

“이해해주셔서 다행입니다.”

미소 짓는 라우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대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템빨국 수도의 풍경은 웅장하고 활력이 넘쳤다.

그리드가, 자신이, 그리고 곁에 선 라빗과 동료들이 함께 일군 나라다.

어떠한 위험도 용납할 수 없다.

이곳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라우엘이 각오를 다지는 그때였다.

쿠르르릉....

성이 미세하게 진동을 일으켰다.

드워프 케를이 증축공사를 진행한 이후부터 더욱 견고해진 템빨성에 이 정도 흔들림이 전해진다는 건 매우 큰 충격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그래, ‘최소’ 절구질 수준의 충격이.....

“설마?”

얼굴이 하얗게 질린 라빗의 눈동자가 동요로 떨렸고,

“라빗 행정관 님! 여기 계셨군요!”

기사 한 명이 달려왔다.

우선 라우엘에게 경례한 그가 라빗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 그리드 전하와 피아로 각하께서 밀밭에서 대련을 시작하셨습니다!”

“또!?”

템빨국에서 피아로의 입지는 무척 크다.

그리드 다음으로 인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라빗도 그와 굳이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악역을 맡게 만든다.

“빌어먹을! 대련을 하실 거면 저 멀리 황무지에라도 가시라니까!”

태산마저 부수는 경지에 오른 양반들이 왜 자꾸 성내에서 싸우는지 모르겠다.

힘 조절이라도 해주면 모를까, 그리드와 피아로 둘 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정도를 모르는 게 문제다.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여기에 전하의 직인을 받아야 해서.”

라빗을 뒤쫓는 라우엘의 손에는 한 장의 전단지가 들려있었다.

신규 농부를 모집하기 위해서 특별히 삐까소에게 의뢰해 제작한 전단지였다.

메인 모델은 당연히 전설의 농부 피아로.

서브 모델은 피아로의 후계자라고 알려지기 시작한 오러 마스터 휴렌트였다.

어깨에 쌀 포대를 짊어진 피아로와 레인보우 포테이토를 거머쥔 휴렌트가 흰 이를 드러낸 채 활짝 웃고 있었으니 ‘농사란 이토록 즐거운 일이다!’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건 뭡니까....?”

라우엘의 손에 들려있는 전단지가 라빗의 이목을 끌었다.

★전설의 농부와 오러 마스터가 직접 제배한 레이단 쌀★

★대마법사 부자(父子)도 즐겨먹는 레인보우 포테이토★

피아로 공작각하께서 이르시길,

“그리드 전하를 만나 농사의 참맛을 알았다!”

맛은 보았나? 레인보우 포테이토~

느껴지나? 건강해지는 그대의 몸~

이 모든 게 농부의 은덕이다! 농사의 은총이다!

우리 함께 자랑스러운 농부가 되어보자!

농촌이! 당신을 부른다!

“.....”

다급한 와중에도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전단지.

화려하다 못해 조잡한 문구가 가득 새겨진 그것에 정신을 팔린 라빗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를 통해 전단지의 효과를 확인하고 만족한 라우엘이 설명했다.

“가우스 왕국에서 광산이 줄줄이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젊은 인력이 그쪽으로 많이 유출될 것 같아서 이를 최소화시키고자 만든 전단지입니다. 농업은 템빨국의 근간이니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존귀한 공작각하를 농부 모집용 홍보모델로 써먹으시다니....”

“그 존귀한 공작각하의 봉급을 몰수하려 했던 분께 들을 비난은 아닌 것 같은데요?”

“....”

“뭐,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피아로 님의 이미지는 평소에도 백성들에게 친숙하니까요.”

피아로는 국왕 다음가는 귀족이며 수만 대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이지만 백성들과 허물없이 지내왔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는 옆집 농부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조금 많이 잘생기고 유쾌한 아저씨.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그를 홍보모델로 쓴 것이 신의 한수라고 라우엘은 자부했다.

***

바로 며칠 전의 대련과는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그날의 대련을 수십, 수백 회씩 복기해온 그리드와 피아로는 상대를 보다 철저하게 공략했고 그로 인해 전투가 장기전에 돌입했다.

그리드가 신중해진 영향이 컸다.

이전 대련에서의 그리드는 초반부터 모든 스킬을 쏟아부었던 반면 이번엔 스타일을 완전히 바꿨다.

피아로가 공격해올 때까지 상황을 지켜봤다가 회피하거나 방어하면서 반격이 가능한 순간에만 스킬을 배분했다.

‘이미 몇 번 체험해본만큼 대처법을 익히신 건가?’

확실히, 그리드는 무상농법에 잘 대응하고 있었다. 자신이 속도 면에선 피아로를 웃돈다는 부분을 철저히 활용해서 피아로의 공격을 대부분 수포로 돌렸다.

하지만 단테와 싱클레드를 비롯한 참관인들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이곳은 풍요로운 밀밭.

피아로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온갖 농작물들이 그의 체력과 강기를 실시간으로 회복시키고 있었으니 장기적인 소모전은 그리드에게 도리어 불리했다.

더 큰 문제는 무상농법 중 씨뿌리기의 변수였다.

그리드의 주변에는 이미 수십 종의 씨들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언제라도 싹을 틔워 그리드를 위협할지 몰랐다.

‘그 사실을 모르실 리 없을 텐데?’

노림수가 뭘까?

전투에는 이골이 난 피아로를 공략할만한 전략이 과연 저 젊은 왕에게 있을까?

“....!”

의문에 휩싸인 수십 명의 참관인 중 단테와 싱클레드, 그리고 휴렌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피아로의 기도가 갑자기 확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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