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21화 (1,111/1,794)

템빨 58권 - 02화

‘다르다!’

고대의 유물.

마장기라는 이름 앞에 반드시 붙는 수식언이다.

마장기는 무려 천 년 전의 유산이었으니까.

하지만 라드볼프의 공방에 있는 여덟 기의 마장기는 달랐다.

바로 이 순간에도 제조와 개조 중에 있는, 그야말로 최신식의 결전병기였다.

일단 외양부터가 크게 바뀌었다.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지발의 마장기 레이더스와 비교해서 모든 게 2배 가까이 컸다.

‘드래곤과 대적하기 위해서겠지?’

고대의 거인족은 대악마에게 맞서고자 마장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지혜의 탑의 결사가 된 라드볼프의 표적은 이제 대악마가 아닌 드래곤이다.

기존의 마장기로는 드래곤을 상대하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경험한 그가 마장기의 규격과 중량을 늘린 것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크고, 무거운 것의 위력이 더 강하게 마련이니까.

어디까지나 제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파그마의 눈.’

초대형 마장기들의 위용에 넋이 나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섰던 그리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스킬을 전개했다.

<파그마의 눈-바알의 계약자ver>

파그마의 눈을 전개하여 대상 아이템 확인 시, 해당 아이템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하며 능력치와 옵션을 확인하고 복제할 수 있습니다.

....

...

그리드는 혹시 모를 훗날에 대비해서 마장기의 이해도를 높여놓을 계획이었다. 마장기의 상세 정보가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볍게 실패했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아이템입니다.]

‘역시 만만찮군.’

“어이.”

“....!”

그리드가 뒤늦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마치 도둑질하다 걸린 아이처럼 위축된 그에게 라드볼프가 다가오며 물었다.

“문을 열 때 이상하지 않았나?”

“?”

조금 전 열고 들어온 철문을 돌아본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냥 더럽게.... 아니, 그저 엄청 무겁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끌끌, 월야철로 만든 문이 단지 무겁다라....”

“월야철?”

“격을 차단하는 철이다.”

“격이요? 초월자의 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가 여태까지 쌓아온 지위와 칭호도 모두 너의 격이다. 그 모든 걸 월야철이 차단한 거지. 방금 넌 순수한 근력만으로 수십 톤짜리 문을 열어젖힌 거고.”

“....!”

그러고 보니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었다.

몸에서 진이 빠진 기분이었다고 할까.

뭔가 싶었는데 칭호 효과들과 초월의 격이 발생시킨 능력치들이 일시적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광물이 있었다고?’

마력을 차단하는 기능의 광물은 드물게 존재한다.

하지만 격을 차단하는 광물은 생전 처음 들었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흥분어린 그리드의 눈빛을 읽은 라드볼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마장기의 장갑이 바로 월야철이다. 마장기의 주먹이 드래곤의 마력을 꿰뚫고 비늘을 부술 수 있는 이유지. 어떠냐? 대단하지?”

“....!”

드래곤은 태생적으로 강하다. 초월종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격 자체가 높아서 하등생물의 공격에 타격을 입지 않는다.

이는 즉, 격을 차단함으로써 드래곤의 강함을 억누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반이 석상룡 구젤의 날개를 벨 수 있던 것도 바로 마장기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그렇군요....”

월야철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광물에 놀라 잠시 멍하게 있던 그리드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런데 라드볼프님, 월야철은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야 발견 된 물질인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마장기와 싸워본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장기에는 격을 차단하는 기능 같은 게 없었죠.”

그리드는 대장장이다.

누구보다 광물에 관심이 많았고, 공부해야했다.

“마장기와 싸워봤다고? 아, 밖(속세)에 있는 폐기물 중 하나를 말하는 거냐? 그것들의 외장갑도 본래는 월야철이었다. 하지만 수백 년 전에 폐기할 때 회수했던 거지.”

“월야철이 고대부터 존재해왔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재활용해야할 만큼 귀하기 때문이다.

내심 월야철에 욕심을 품었던 그리드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그래. 거인족 왕국의 자생광물이었거든.”

“....!”

거인족의 왕국은 이미 천 년 전에 드래곤에게 멸망당했다.

드래곤의 브레스에 의해서 섬이 통째로 바다에 수장됐다고 전해졌다.

“이곳에 있는 월야철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월야철인 셈이다. 그래서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관리하는 중이지.”

[새로운 광물의 정보를 획득하였습니다.]

[광물 정보 목록에 <월야철>이 추가됩니다.]

<월야철>

고대 거인족의 왕국에 존재했다는 자생광물.

상대방의 격을 일시적으로 차단시킨다.

“.....”

그리드의 시선이 힐끔, 조금 전 열고 들어온 철문으로 향했다.

동시에 라드볼프의 일침이 들려왔다.

“탐내지 마라. 드래곤과 싸우고 돌아올 때마다 반파되는 마장기를 수리하기 위해선 지금 있는 월야철로도 부족하니까.”

“탐내기는요. 그 귀한 월야철로 문짝을 만들어 놓으신 이유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 아무나 못 들어오게끔 하려고 그런 거 아니겠냐. 세상에 너처럼 힘 센 놈이 어디 많은 줄 알아?”

“....”

거참, 겉보기와 달리 조심성 많은 사람이다.

세상에 어떤 도둑이 지혜의 탑을 침범할 수 있단 말인가?

황당해하는 그리드의 속내를 읽은 로드볼프가 피식 웃었다.

“아직 적야의 대도에게 당하기 전인가 보지?”

“....!”

적야의 대도.

그리드가 <황궁 설계도>를 얻었을 때 들었던 이름이다.

시스템이 경고했었다.

적야의 대도가 당신에게 큰 흥미를 품었다고.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적야의 대도는 지혜의 탑에도 숨어들 수 있습니까?”

“그렇더군.”

“아니 무슨....”

온갖 폐쇄 마법을 두르고 있는 탑을 발견한 것부터가 놀라운데 결사들의 감각을 무슨 수로 속이고 잠입했다는 거지?

놀라 말문을 닫은 그리드가 이내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혹시 그자도 초월자인 겁니까?”

“맞다. 적어도 600년 전부터 활동해온 놈이지. 우리와 맞먹는 노괴라는 것이다.”

“헐....”

“그 빌어먹을 녀석이 100년 전에 이곳에 숨어 들어선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훔쳐갔어.”

“네바르탄? 광룡의 목걸이요?”

“그래. 네바르탄의 부러진 발톱 조각으로 만든 목걸이다. 보는 이를 미혹시키고 착용자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그런 걸 왜 만드셨는지....?”

그리드는 슬슬 눈치 채고 있었다.

라드볼프가 언행은 거칠어도 사실은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뭘 물어봐는 족족 대답해주는 태도가 바로 증거였다.

“일종의 전리품인 셈이지. 너 같으면 기껏 얻은 드래곤의 발톱을 그냥 버려두겠냐?”

“아, 네....”

대답을 잘 해주긴 해도 정작 영양가는 없는 듯하다.

월야철만 해도 사실상 얻을 수 없는 물건이니 사실상 필요 없는 정보였고....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월야철을 보니까 대장장이의 피가 막 끓어오르지 않던?”

“당연합니다. 저도 기회만 온다면 월야철을 꼭 다뤄보고 싶네요.”

“그럼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회수해 와라. 내가 선심 써서 월야철 한 덩이를 보상으로 주마.”

“....!”

라드볼프는 탑의 결사다.

의미 없는 잡담이나 지껄일 만큼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월야철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그는 그리드에게 임무를 맡길 생각이었다.

“1좌께서는 적야의 대도가 도둑질을 하는 이유가 순전히 자신의 수집욕을 충족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다. 놈이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세상에 유출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시는 거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도둑놈 따위를 어떻게 신뢰하겠냐? 안 그래?”

[<네바르탄의 목걸이>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네바르탄의 목걸이>

난이도:???

적야의 대도가 훔쳐간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회수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네바르탄의 목걸이를 2좌 라드볼프에게 전달.

퀘스트 클리어 보상:월야철. 라드볼프와의 호감도 상승.

“아....”

탐나는 퀘스트다.

하지만 섣불리 수락하기가 힘들다.

클리어 가능성을 전혀 엿볼 수 없었으니까.

망설이던 그리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적야의 대도한테 무슨 수로 목걸이를 돌려받죠?”

“내가 그걸 알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돌려받지 않았겠냐?”

“....”

그리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헛기침한 라드볼프가 이어 말했다.

“내가 너한테 가능성조차 없는 임무를 맡기려는 건 아니야. 내가 장담하는데 너는 조만간 적야의 대도의 표적이 된다. 그 새끼는 지독한 관심 병자거든.”

“관심 병자요?”

“그래. 놈은 시대를 대표하는 명사의 물건을 훔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왔다. 그건 수집욕과 별개의 명예욕이지. 네가 재물 한 푼 없는 거지였어도 달려들어서 빈 밥그릇이라도 훔쳐갔을 놈이다.”

“....아.”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적야의 대도가 그리드에게 흥미를 품은 계기는 황궁 설계도에 있었지만, 이후엔 설계도가 아닌 그리드라는 인물 자체에 초점을 맞췄을 가능성이 높았다.

“놈은 반드시 네 앞에 나타날 거다. 그때 이미 놈의 손에는 너의 보물 중 하나가 쥐어져 있겠지.”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빼앗았을 때 겪은 일을 떠올리기라도 한 걸까?

말하던 도중 얼굴을 벌겋게 상기시킨 라드볼프가 이를 갈았다.

“짧지만 대화할 기회가 있어. 그때 놈과 협상을 시도해 봐라. 아주 어쩌면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돌려받을 수도 있다.”

무력으로 제압하라는 말은 끝까지 안 하는 라드볼프였다.

이유야 뻔했다.

무력으로는 제압하는 게 불가능한 상대라는 뜻이다.

탑의 결사인 라드볼프조차 놓쳤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엄청나게 강하거나, 사기적인 도주기를 가졌거나....’

물론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초월자 도둑....

정말이지 끔찍한 혼종이다.

어지간해선 엮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차피 엮여야할 상대라면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해야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라드볼프 님을 위해서 도전해보겠습니다.”

“끌끌, 녀석아. 너를 위해서겠지.”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월야철.

대상의 격을 한시적으로나마 차단하는 힘을 지닌 광물.

대악마와 대천사, 전설과 초월자, 그리고 신.

앞으로 괴물들을 상대하게 될 그리드에겐 반드시 필요한 광물이었다.

“어쨌든 패기는 마음에 들어.”

흔쾌히 임무를 수락하는 그리드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라드볼프가 그리드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으마.”

“힘내보겠습니다. 그런데 저.... 마장기가 총 여덟 기라는 건, 라드볼프 님과 프론잘츠 님 외의 결사들도 마장기를 조종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전혀 아니다. 이건 오직 거인족만 운전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거야.”

결사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들이 굳이 마장기를 운전해봤자 스스로의 실력을 봉인하는 셈밖에 안 됐다.

“마장기가 여덟 기인 이유는 속성 때문이다. 드래곤마다 속성이 다르잖냐. 놈들과 싸우려면 최대한 상성을 맞춰야지.”

“아, 그랬군요.”

마장기들이 품은 기운이 저마다 다르다 싶더니 속성의 차이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끝으로 진짜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거인족이 아닌 인간이 운전할 수 있는 마장기를 만드는 건 불가능한 겁니까?”

역시 안 되겠지?

그리드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탈 것에 한해서 큰 능력을 발휘하는 지발조차도 마장기를 수십 초 운영하는 게 고작 아니던가.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마장기를 운전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기능을 여러 개 줄이고 출력을 낮춘다면야 충분히 가능하다.”

“....!”

“제작법 가르쳐줘?”

“....!!”

단지 말 몇 마디로 인간이 운전할 수 있는 마장기의 제작법을 얻을 줄이야?

정말이지 퍼주고 또 퍼주는 지혜의 탑답다.

흥분한 그리드가 어버버 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책상 앞으로 다가간 라드볼프가 종이 무더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한 장의 설계도를 꺼내더니 둘둘 말아 그리드에게 건네줬다.

“옜다. 근데 이거 만들려면 파브라늄이 있어야 돼.”

“....네?”

흥분해서 설계도를 받아 들던 그리드가 그대로 굳어버린다.

“출력을 줄이고도 충분히 움직이기 위해선 ‘스스로 움직인다.’는 파브라늄의 고유 특성이 필요하다. 최소 2톤 정도의 분량이. 그러니까 사실상 만들진 못한다는 뜻이지. 너희들 인간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장기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뭐, 그래도 가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만든 설계도다. 가문의 보물로 삼아라.”

아직 라드볼프는 몰랐다.

탐욕으로 진화한 파브라늄은 이제 무한히 증식한다는 사실을.

그리드의 머릿속에 마장기 군단의 위용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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