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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20화 (58권) (1,110/1,794)

템빨 5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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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58권 - 01화

그리드의 게임 플레이 스타일은 굉장히 독특하다.

신규 컨텐츠가 발생하는 즉시 체험하고, 공략하기 위해 애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방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신규 컨텐츠에 도전해봤자 바로 공략 못하는 실패를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생긴, 슬픈 습관.

그리드가 새로운 퀘스트나 시스템에 소극적으로 접근해온 이유다.

이번에 지혜의 탑을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랭킹 1위를 위한 특전.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지혜의 탑의 존재를 알자마자 흥분해서 탑을 방문했을 것이다.

실제로 크라우젤은 곧바로 지혜의 탑을 방문했었다.

반면 그리드는 탑을 뒷전으로 미뤘다.

어차피 언제라도 진행할 수 있는 컨텐츠에 굳이 집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신규 컨텐츠를 접하고, 공략하고, 성장해서 이득을 취하려고 애쓰는 일반적인 플레이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태도였다.

“.....”

S.A그룹 본사.

지혜의 탑의 상황을 지켜보던 윤상민 이사가 혀를 내둘렀다.

분명, 지혜의 탑은 선구자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광룡철 사건처럼 속세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탑은 선구자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했기 때문이다.

구조상 선구자를 아끼고, 배움을 주는 것이 탑의 성향이었다.

이전 선구자 크라우젤은 탑에서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 전투력이 상승했었다.

그래, 딱 그 정도였다.

지혜의 탑은 선구자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는’ 컨텐츠지 퍼주고, 또 퍼주고, 막 퍼주게끔 설계된 컨텐츠가 아니다.

이번엔 단지 그리드의 탑 방문 타이밍이 기가 막혔을 뿐이다.

마침 깨달음 시스템에 가로막혔을 때 탑을 방문해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도움의 강도를 ‘적절한 것’에서 ‘커다란 것’으로 탈바꿈 시켰고 주작의 심장을 품은 까닭에 하야테에게 큰 호감을 얻어버렸다.

“하야테의 그리드를 향한 호감이 결사들의 전반적인 호감도를 상승시켰습니다. 특히 그리드에게 이미 호감을 가지고 있던 비반의 호감도가 크게 올랐고요.”

“비반이 무쌍심법의 전수를 흔쾌히 수락한 것은 그 호감도에 기인한 거군.”

“네, 그리드가 지혜의 탑의 방문을 늦춘 것이 엄청난 행운이 된 셈이에요.”

“흐음....”

운영팀장이 설명을 듣던 윤상민 이사가 조금 미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리드의 컨텐츠 공략 속도는 평균보다 많이 느리다.

이상하리마치 퀘스트를 방치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시스템을 늦게 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혜의 탑은 오직 랭킹 1위를 위한 특전이다.

평소 그리드의 성향을 고려해 봐도, 그가 지혜의 탑의 방문을 이유 없이 늦췄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그리드는 광룡철 퀘스트를 언제라도 클리어할 수 있는 입장이지 않았던가.

“설마.... 의도적으로 방문 타이밍을 늦췄다고?”

“네? 그리드가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했다고요? 에이, 너무 나가셨어요.”

“아니, 충분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다. 지혜의 탑이 세계의 수호를 위해서 싸우는 조직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해봐.”

“아....!”

그리드는 알고 있던 것이다.

동대륙을 구원한 후에 탑을 방문할 경우 탑의 결사들에게 더 큰 호의를 얻을 거라는 사실을.

물론 그로 인해 얻을 보상 내용까진 추측하지 못했겠지만, 호감을 얻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겠지.

“알겠나? 이 모든 행운은 그리드의 의도로부터 비롯된 거야.”

과연 임철호 회장님과 내가 인정하는 사내답다.

생각하는 윤상민 이사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

‘진작 방문할걸 그랬네.’

비반에게 무쌍심법의 전수를 허가받은 그리드가 뒤늦은 후회에 휩싸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탑을 방문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동대륙에 가기 전에 탑부터 왔어야 하는데.’

양반들과의 싸움이 훨씬 더 수월했을 것이다.

레벨도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

“아쉽다, 아쉬워.”

비반과 작별하고 한숨 쉰 그리드가 적막한 탑의 복도를 걸었다.

그는 다른 결사들과도 만남을 가져볼 생각이었다.

퍼주길 좋아하는 결사들의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결사들과의 만남은 무조건 이득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기왕 탑에 온 김에 한 명씩 다 만나보자.’

그들은 하야테나 비반과 다를 수도 있다.

호의는 보여줄지 몰라도 선물은 안 줄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리드는 그들과의 만남을 꼭 가져야했다.

눈도장만 찍어놔도 손해 볼 것은 없었으니까.

똑똑.

3층.

8좌 제시카의 연구실 앞에 선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노크를 해보았다.

“....”

반응이 없다.

부재중인 듯하다.

혹시라도 메아리 마법의 가르침을 받으면 제드노스와 라엘라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쉽다.

“흠.”

아쉬움을 달랜 그리드가 복도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반의 말에 따르면 여성 결사들의 거주 공간은 이곳 3층에 있다고 했다.

4좌 베티.

놀랍게도 어린 소녀의 모습을 간직한 그녀는 말수가 매우 적었다. 그리드와 인사를 나눌 때도 단지 이름만 밝혔을 뿐 잘 부탁한다는 의례적인 인사조차 없었다.

‘그 양반의 직업은 뭘까?’

근육 하나 없이 가녀린 몸을 떠올려 보면 전투 직업군은 아니다.

제시카가 존재하는 이상 마법사일 가능성도 낮아보였다.

‘역시, 생산직 계열일 확률이 높다.’

대장장이의 피가 끓어오른다.

다른 분야의 장인에게 배움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들뜬다.

똑똑.

베티의 방문 앞에 선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다행히 베티는 자리에 있었다.

“무슨 일?”

살짝 연 방문 틈새로 고개를 내미는 베티의 두 눈은 매우 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동그랗고 짙은 눈동자가 참 예쁘다.

반짝 거리지 않아서 다소 쓸쓸해 보이나 그조차도 매력으로 다가온다고 할까.

수백 살 먹은 할머님이 아니셨다면 며느리로 삼고 싶었을 정도다.

“떠나기에 앞서서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뵙습니다.”

“응.... 잘 가.”

“....?”

쾅.

방문이 닫혔다.

복도에 덩그러니 남은 그리드가 황당해하는데 마침 2층에서 올라오던 7좌 아벨리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웃었다.

“베티 님은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이니 그대가 이해해주시오.”

“아? 네...”

수백 년을 살아왔을 어르신께서 부끄러움이 많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다.

‘베티 저 양반은 내가 싫은가 보네.’

내가 뭔 잘못을 했나 싶지만, 사람이 사람 싫어하는데 굳이 이유가 있어야하는 건 아니다.

미움 받는 일에 익숙한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근데 아벨리오 님의 숙소는 4층에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대를 만나고자 비반 공께 찾아 갔었소. 길이 엇갈렸구려.”

“저를요?”

“선물을 주고 싶어서 말이오.”

“이건....!”

아벨리오에게 그림 한 장을 건네받은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드의 초상화였다.

눈썹 한 올까지 섬세하게 묘사한 그 초상화는 그리드의 표정에 집중하고 있었다. 표정을 통해서 그리드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정말.... 엄청난 그림이군요.”

그리드는 수십 개의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해온 인물이다. 자연히 성장한 그의 안목은 이 초상화가 여태껏 보아온 그 어떤 명화보다 더 뛰어난 작품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타르카이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대단합니다.”

타르카이의 작품은 동대륙의 모든 왕족과 귀족이 탐내는 보물이다.

하지만 사하란 제국의 황제가 아닌 이상 타르카이의 작품을 소유하는 건 힘들었다.

워낙 귀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국에 굴복한 왕족과 귀족들에 의해서 타르카이의 작품은 모두 제국 황실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드는 몇 번이나 황궁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그때마다 타르카이의 작품을 보고 감탄했었는데 아벨리오의 작품이 그보다 더 뛰어나게 느껴졌다.

아벨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예술에 우위는 없소.”

“겸손하시기까지....”

“겸손이 아니오. 애초에 타르카이가 나기도 하고.”

“....네?”

“예술이란, 보여 지지 않으면 의미를 잃는 법. 나는 매 시대마다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내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곤 했소. 하하, 물론 다른 결사들께 이해 받고 허락 받은 사안이오.”

“그랬군요....”

타르카이의 작품 한 장으로 성을 한 채 살 수 있다고 들었다.

기왕이면 내 초상화가 아니라 타르카이의 작품을 선물로 받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웃으며 감사히 초상화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새로운 <지존도(至尊圖)>를 획득하였습니다.]

[<지존도(至尊圖)의 주인공> 스킬이 갱신 됩니다.]

<지존도(至尊圖)의 주인공>

*1회 한정 스킬

사용 시, 최신 지존도가 그려진 시점의 정보로 회귀합니다.

단, 스탯과 스킬 정보에 한합니다. 인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칭호, 직업, 지위, 종족, 나이, 장비 등의 부가 정보는 회귀가 불가능합니다.

“....!!”

지존도의 주인공은 쉽게 말해서 세이브 포인트다.

온라인 게임의 규칙을 어긋나게 만드는 치트성 시스템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지존도를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존도의 시점이 너무 낡았기 때문이다.

지존도를 쓰느니 차라리 죽는 게 백만 배는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지존도가 ‘갱신’ 가능한 시스템이란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리드는 지존도의 양성을 고려해야했다.

‘레벨을 하나 올릴 때마다 삐까소에게 새로운 지존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해야겠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삐까소의 지존도는 무려 177년 만에 탄생한 지존도였다.

성공 확률이 그만큼 낮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도를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다음에 또 탑을 방문할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나를 찾아오시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아벨리오 님.”

아벨리오와 헤어진 그리드는 이어서 6좌 켄, 5좌 쥬르네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딱히 그리드에게 어떤 선물이나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다만 베티와 달리 충분한 호의를 보여줬기 때문에 그리드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확실히, 이곳만 다르군.”

어느새 탑의 7층에 오른 그리드가 높은 천장을 확인했다.

천장의 높이는 무려 12미터에 이르렀다.

다른 층과 비교해서 3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처음엔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고,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리드는 7층만 유난히 다른 이유를 이제 알고 있었다.

‘마장기.’

3좌 라드볼프가 통째로 사용한다는 7층.

바로 이곳에 마장기 공방이 있다.

확신을 품은 그리드가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거대한 철문 앞에 다가가 섰다.

고대에 만들어진 마장기조차 용의 이름을 달고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는 마당에 최신식 마장기는 과연 얼마나 뛰어난 성능을 자랑할지 궁금했다.

마장기를 한 기 선물 받았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품었고, 선물 받은 마장기를 운전할 인재는 어디서 구해 와야 할지 벌써부터 근심했다.

제대로 김칫국을 마시는 셈이다.

하지만 김칫국을 마시는 게 당연할 정도로 마장기의 가치는 높았다.

“그 문을 열 수 있다면 들어와라.”

철문 넘어로부터 라드볼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께만 3미터가 넘는 철문.

그것을,

“끄으윽....!”

쿠웅! 쿠우우우우웅!!

이를 악 문 그리드가 밀어 젖혔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 그의 시야에 신세계가 들어왔다.

여덟 대의 마장기가 나란히 서있는 장관이 그를 압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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