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22화
‘과연.... 뮐러의 색보다 진하군.’
투기와 검기의 융합에 성공한 그리드.
그를 바라보는 하야테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리드와 함께 환호하고 싶을 정도로 그가 느끼는 기쁨은 컸다.
영웅왕이란 세계의 평화를 논하는 존재.
그리드의 성장은 지혜의 탑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전대 영웅왕 뮐러는 상위 대악마를 토벌함으로써 탑에 직접적인 도움을 줬었다. 뮐러가 있었기에 탑의 결사들은 바알과 드래곤의 견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자라면 뮐러의 전성기는 물론이고 나조차도 넘어서지 않을까.’
파그마, 브라함, 마드라 세 천재의 진전을 동시에 잇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흔하겠는가? 아마 두 번 다신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드는 태생부터가 남달랐고 이미 여러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보였다. 그가 품고 있는 주작의 심장이 바로 증거였다.
“하야테 님!”
활력이 넘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그리드가 하야테에게 허리를 숙였다.
“큰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얻은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 여길 필요 없소. 그대는 이미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단지 지름길을 알려줬을 뿐이오.”
하야테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리드는 앞으로 최소 2년 이상 깨달음 시스템을 누리지 못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무쌍심법을 마스터 레벨까지 성장시킨다는 건 그만큼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하야테가 그리드에게 준 선물은 무한의 검기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나눈 대화 전부가 그리드에게 지식을 주었고 뼈와 살이 되었다.
“이만 내려가 보시오. 비반 공께서 그대와 회포를 나누고 싶은 눈치던데, 내가 계속 붙잡아뒀으니 눈치 없는 노인네라고 원망 받겠구려.”
“하하, 네....”
안 그래도 비반에겐 용건이 있다.
피아로에게 무쌍심법을 전수해줘도 좋다는 허락을 구하고 싶었고, 비반과 피아로 가문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저....”
“말하시오.”
“절대자와 신은 동급인 겁니까?”
전설이란 위업을 달성하여 도달하는 경지이며 초월자란 단련에 집중한 구도자가 도달하는 경지이다.
반면 절대자는 초월의 격을 높이 쌓은 상태에서 신을 죽이거나 드래곤을 죽이는 절대적 위업을 달성해야 탄생한다.
전설과 초월자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절대자 중에서도 <신살자>의 정보를 보유 중인 그리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흐음.”
당돌한 질문에 조금 당황한 듯, 하야테는 잠시 생각해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무력에서만큼은 비슷할 거요. 무신이나 절대신쯤 되지 않는 이상 나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신은 드물 테지.”
“....!”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절대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부터가 절대자의 무력이 신, 혹은 드래곤과 비견됨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야테의 입으로 직접 얘기를 듣자 느껴지는 무게감이 남달랐다. 그리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지금 자신이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재차 실감했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그런 하야테 님조차도 드래곤을 토벌하는 건 불가능하다니.... 드래곤은 대체 얼마나 강한 겁니까?”
“드래곤은 태초 이전 혼돈부터 존재했던 종(種)이므로 종 자체가 신과 동격이오. 신앙의 대상이 아닌지라 권능은 적지만 타고난 마력과 육체 능력은 무신에 버금가지. 물론 드래곤 중에서도 태초 이후에 탄생한 아이들은 아직 많이 미약하나 그런 아이들은 조심성이 많아 굳이 세상에 스스로를 노출하지 않소.”
“.....”
그리드는 네펠리나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 싶었다.
하야테에게 ‘아이’ 취급을 당할 정도로 연약한(?) 그녀가 부모의 원수를 갚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야할지 감히 상상조차 안 됐다.
‘네가 독립할 때까지 만이라도 잘 보살펴주마....’
네펠리나는 겉보기와 달리 식충이가 아니다. 그리드에게 축복을 내려준 시점부터 밥값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드는 네펠리나를 지켜주겠노라고 약속한 바 있다.
고맙다고 말하던 녀석의 목소리를, 그리드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네펠리나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함구한 이유다.
‘사실은 드래곤의 축복을 엿보고 있지 않을까....’
하야테의 고요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해본 그리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드래곤의 축복은 물리적으로 실체하는 주작의 심장과 다르다. 제아무리 하야테라도 그것을 간파할 리 없다고 분석했다.
애초에 하야테는 그리드를 향한 의심을 말끔히 해소했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게 맡길 일이 생기시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당장 달려오겠습니다.”
“든든하오. 멀리서나마 그대의 무운을 빌겠소.”
그리드가 드디어 하야테와 작별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도움을 준 하야테 덕분에 세계관의 파워 밸런스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눈앞의 안개가 걷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절대자의 경지에 오르면 오존들과도 싸워볼 수 있다는 건가.’
과연 절대자가 될 수 있을까?
확신이 없다. 아마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절대자를 목표로 삼았다.
허황된 꿈일지언정,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발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비반 님.”
비반의 주거공간은 탑의 2층에 있었다.
침실과 주방 등의 생활공간은 엄청 좁은 반면 수련장의 규모가 매우 큰 것이 인상적이다. 비반의 성격을 알려주는 공간 배치였다.
“거 빨리도 오는군.”
비반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린아이처럼 대놓고 토라진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는데 그리드가 없는 동안 수련에 힘쓴 듯했다. 현역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열정이었다.
‘아.... 현역 맞지.’
비반 또한 탑의 결사다. 속세를 떠났다고 하지만 세계의 이면에서 무려 드래곤과 싸우고 있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가?”
물로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던 비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리드는 솔직하게 말했다.
“존경스러워서요.”
“험, 험험.”
비반의 입 꼬리가 실쭉실쭉 올라갔다.
이내 못 참고 대소를 터뜨린 그가 그리드의 등짝을 두드렸다.
“내가 존경받을만한 위인이긴 하지! 하하핫! 역시 자넨 안목이 있구만!”
[8,9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으윽....”
탐욕으로 만든 장비를 모두 벗은 상태라곤 하지만, 고작 등짝 한 대 맞았다고 눈앞에 별이 반짝인다.
이래 뵈도 초월의 격을 쌓은 전설이고 영웅왕인데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눈치 없는 비반은 그리드가 좌절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떠들어댔다.
“내가 왕년엔 말일세....”
“....”
비반은 템빨국에서 만났을 때도 충분히 수다스러웠다. 스스로 탑의 비밀을 마구 떠벌렸을 정도다.
그러니 탑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이곳에선 남 눈치 볼 필요도 없겠다, 비반은 족히 수십 분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안 그래도 하야테와 몇 시간을 대화하다 돌아온 그리드 입장에선 곤욕이었다. 귀가 따가웠다.
심지어 비반이 하는 말들은 별로 영양가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웃으며 경청했다. 비반이 좋았기 때문이다.
수백 살 먹은 노인네에게 이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그의 순진무구함을 보고 있으면 절로 신뢰가 생겼다. 이 사람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믿음이었다.
“아, 그리고 말일세.”
실컷 떠들었는지 후련한 얼굴이 된 비반이 뒤늦게 뭐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무쌍심법을 극성까지 연마하지 않아도 투기를 억누르는 방법을 연구해보았다가 성과를 거두었다네.”
“.....”
가장 중요한 말을 가장 늦게 하다니....
그리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비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턱을 치켜드는데 하늘이 코를 찌를 기세였다.
“투기를 마나핵에 담은 다음 검기로 덮는 걸세. 그리고 검기를 소모하지 않으면 투기를 계속해서 억누를 수 있지.”
“검기를 소모하지 않으려면 무패왕의 검술과 제 검무를 봉인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드가 반문하자 비반이 도리어 황당해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은가? 자네의 검기 회복 속도는 아직 매우 느리니까 투기를 덮으려면 소모 자체를 해선 안 되네.”
“아니 그럼 싸울 때 어쩌라고....”
“자네 실력쯤 되면 무패왕의 검술하고 검무쯤 봉인해도 상관없지. 자네가 우리처럼 드래곤하고 싸울 것도 아니고 잡놈들이나 상대할 텐데.”
“....비반 님한텐 잡놈일지 몰라도 저한텐 엄청 강한 적들이 세상엔 널렸습니다.”
“흠.... 그럼 평소에만 투기를 억눌러서 심기체의 조화를 맞추고 성장하다가 정 안되겠다 싶을 때만 검기를 소모하시게. 그럼 어쨌든 지금보단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걸세.”
딱히 궤변은 아니었다.
비반은 그리드를 위해서 충분히 궁리했고 적절한 차선책을 마련해준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드는 이미 심기체의 조화를 이룬 상태였다.
“괜찮다니?”
“하야테 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투기와 검기의 융합에 성공했거든요.”
“뭐, 뭣이....! 그걸 왜 이제 말하는가!!”
“제가 두르고 있는 투기의 색이 짙어진 걸 보고 바로 알아보실 줄 알았....”
“이런 빌어먹을! 자네가 예쁜 할망구도 아니고 내가 자네를 왜 굳이 자세히 살펴본단 말인가! 자네가 말을 안 해주는데 내가 무슨 수로 눈치 채냐고!”
“아니, 말할 기회를 주셔야 말을....”
“허! 지금은 잘만 말하지 않는가! 말대꾸만 잘하는 겐가!”
“....”
“자네를 위해서 온종일 궁리한 나 자신이 한심하군!!”
“죄송합니다.....”
아쉬운 사람은 그리드였다.
그리드는 비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고 이후 10분이 지나서야 비반은 간신히 표정을 풀었다.
“....무상검법이라.”
그리드의 설명을 들은 비반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속인이었던 시절에는 사하란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었네. 피아로라는 친구의 가문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하지만 무상검법은 무쌍검의 변형이 맞는 듯하군.”
비반이 속세를 떠날 때 남겼던 비급은 여러 명의 손을 거쳤다.
그중 비급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습득한 사람이 뮐러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피아로의 선조가 얻었다는 무상검법의 비급은 무쌍검의 번역본일 것일세.”
비반이 남긴 비급을 발견한 사람 중에 동대륙 출신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동대륙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것이 세상을 떠돌다가 피아로의 선조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무상검법과 무상농법의 근원은 무쌍검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세.”
“.....”
비반의 해석을 접한 그리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반이 피아로의 조상이거나 조상의 지인은 아닐지 내심 기대했는데 전혀 관계없는 사이였다니....
이래서야 피아로에게 무쌍심법을 전수해도 되겠냐고 물어보기가 더욱 난처해졌다.
‘명분이 없어.’
그리드가 좌절하는 그때였다.
“아쉽구만. 내가 외출 금지만 안 당했어도 그 피아로라는 친구와 겨뤄봤을 텐데. 쩝.”
“....?”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우연이고 나발이고 간에 어쨌든 나의 후인인 셈이니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게 정상 아닌가?”
“그, 그렇죠.”
“흠.... 기술을 제대로 익히긴 했으려나 걱정이군. 괜히 무쌍검의 망신만 시키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대악마를 토벌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며 명성을 쌓고 있어요.”
“호오! 과연 나의 후인다워! 무쌍검의 묘리로 농사를 짓는다기에 미친놈이 아닐까 근심했는데 다행히 기본은 하나보군!”
“네.... 그런데 아쉽게도 심법을 익히지 못해서....”
“뭣이?”
비반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무쌍검의 핵심은 무쌍심법인데 무쌍심법을 못 익혔다고?”
“피아로의 선조들이 심법의 구결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후손에게 전달하지 못한 눈치였습니다.”
“뭐라!”
비반이 버럭 성을 냈다.
“자네는 대체 뭘 했는가!!”
“....!”
“자네가 내 후인에게 무쌍심법의 구결을 알려줬어야지!! 사람이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쓰겠는가!!”
“....!!”
대박이다.
무슨 수로 허락을 받아야할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허락 따위 필요 없었다.
‘혜자의 탑...!’
마음으로 외치는 그리드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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