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21화
그리드는 서사시의 발생 조건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엄청난 위업을 달성해야하는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을 뿐이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그리드가 여태껏 써내려온 서사시는 업적뿐만 아니라 인연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다섯 번째 서사시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래서일까.
“나를 향한 멸시와 증오를 담은 지독한 용언(龍言)들이 나를 존재시키고 있으니 나는 저주 받은 존재요. 하니 선망의 시선일랑 거두시오. 그런 시선을 받아도 좋을 사람은 나 따위가 아닌, 바로 그대요.”
“....”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특별한 존재와 긴 대화를 나누고 교감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리드는 예상해버렸다.
곧 여섯 번째 서사시가 발생할 거라는 사실을.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서사의 시작은, 어느 고독한 절대자의 고백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제가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높이 선 자를 감히 위로하였다.]
“당신을 저주한 도마뱀 녀석들을 제가 반드시 박살내겠습니다.”
서사시가 발생했고, 그리드는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현재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했다.
하야테가 겪어온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이를 함께 극복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솔직하게 말해나갔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을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서사시는 그의 감정에 호응해왔으므로 이번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쉿.”
하야테가 그리드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져 있었다.
“방금 한 말을 되담으시오.”
[이어서 #$&을 *%겠노라는 그의 선언은 절대자에게 가로막혔다.]
“....?”
글자가 깨진다.
그리드의 선언이 서사시로 각인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공개되지 않았다.
처음 겪는 사태에 당황한 그리드가 주춤거리고 있자 하야테가 설명했다.
“자격을 잃은 동쪽의 신들이 그대의 감을 망가뜨렸구려.”
“....?”
“동쪽의 신들은 그대에게 별반 큰 위협이 되지 못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동대륙에서 그리드를 위협한 존재는 양반이었다.
정작 양반을 창조한, 또는 교육시킨 진짜 신들은 그리드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었다.
당연하다.
애초에 오존은 그리드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무언으로 긍정을 표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주지시켰다.
“지금 동쪽을 지배하고 있는 신들은 신들의 전쟁에서 패주한 이들이요.”
즉,
“상처를 입었고, 권위를 상실했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지전능한 신과 비교하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매우 적소. 그대가 아직까지도 무사한 이유요.”
“....”
“반면 드래곤은 동쪽의 신들과 다르오. 귀가 밝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그들은 언제라도 그대의 서사를 접할 수 있고 그대를 해칠 수 있소.”
하야테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함부로 드래곤을 적대했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테니 주의하라는 뜻이었다.
[절대자의 근심어린 경고가 당신의 서사시를 덮습니다.]
[서사시의 여섯 번째 페이지가 미완의 상태로 남습니다.]
[빈 페이지에 감춰진 비화(秘話)는 누구도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뭐?’
여러모로 혼란해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리드가 기겁했다.
서사시가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이야?
서사시를 쓸 때마다 큰 보상을 얻어왔던 그리드의 입장에선 최악의 전개였다.
‘서사시가 전부인 클래스인데 서사시를 날려먹다니....!’
그리드가 보유 중인 <지공> 클래스와 <서사시의 마검사> 클래스는 고유 효과가 적다.
그중에서도 서사시의 마검사는 검기와 마나의 총량이 20퍼센트 상승하고 ‘서사시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의 만족도가 높았던 이유는 서사시를 쓸 때마다 얻게 되는 보상들 때문이었다.
그래, 결국 서사시가 전부인 클래스다.
한데 기껏 발생한 서사시가 미완의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알려짐으로써’ 강해진다는 서사시의 마검사의 컨셉에 어긋나는 결과였다. 보상이 날아갔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
낭패에 휩싸인 그리드가 이마를 짚은 상태로 굳었다.
그의 시야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승됩니다. 단, 입이 가벼운 사람은 미움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서사시의 마검사>의 직업 고유 스킬 <구전>이 활성화됩니다.]
<구전>
비화(秘話)로 남은 서사시의 내용을 타인에게 공유합니다. 공유 가능 횟수는 비화 당 1회입니다.
스킬 발동 조건:호감도가 최대치인 대상 1명에게 비화를 전달
스킬 발동 효과:비화를 접한 대상의 능력치가 상승하거나 스킬, 또는 칭호가 개화합니다. 상승하는 능력치와 새로운 스킬, 칭호의 효과는 비화의 내용에 영향을 받습니다.
“....!”
평소에 기대하긴 했었다.
파그마의 후예 클래스가 그랬듯이, 지공과 서사시의 마검사 클래스 또한 언젠가 새로운 직업 고유 효과를 개방할 거라고 믿어왔었다.
특히 서사시의 마검사는 무려 ‘성장형’ 레전드리 클래스이므로 더 큰 기대감을 품었었다.
그리고 기대는 그리드를 배반하지 않았다.
구전.
쉽게 말해서 NPC, 혹은 펫을 성장시키는 이 스킬은 동료 의존도가 높은 그리드에게 꼭 필요한 스킬이었다.
‘절대자인 하야테조차 혼자서는 한계를 느끼는 세상이다.’
혼자 아무리 강해져봤자 뒷받침해주는 동료가 없으면 안 된다. 반드시 동료들도 함께 강해져야한다....
예전부터 쭉 이처럼 생각해온 그리드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그는 서사시의 마검사의 신규 스킬이 썩 마음에 들었다.
‘비화 당 구전 가능 횟수가 1회밖에 안 된다는 점은 아쉽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야. 새로운 비화를 계속 써내려가게 될 테니까.’
입이 가벼운 사람은 미움 받는다는 점 때문에 사용 횟수에 제약이 생긴 듯하다. 이 정도는 납득하는 수밖에 없다.
분석하는 그리드의 미소가 점차 짙어졌고,
“기분 상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려.”
이를 본 하야테가 안도했다.
그리드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를 위해서 해주신 조언 아닙니까. 기쁘게 새겨듣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소. 이참에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해두시오. 드래곤은 싸워야할 대상이 아니라 피해야할 대상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이 대단한 지혜의 탑조차 드래곤을 토벌하겠노라 말하지 않는다. 이들의 지상과제는 드래곤의 출현 자체를 억제하는 것이다.
‘내가 주제넘게 나서긴 했구나.’
드래곤 슬레이어 앞에서 드래곤을 박살내겠다고 선언했다니....
부끄러움을 느끼던 그리드가 문득 걱정에 휩싸였다.
“제 동료 중에 드래곤과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폰이다.
그리드와 알기 전부터 이미 염룡 트라우카와 적대했던(정확히는 찍혔던) 폰은 지금까지도 염룡 트라우카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련 중에 도대체 어떤 사건을 겪은 건지, 얼마 전 동대륙에서는 저주를 도리어 능력으로 써먹는 신위를 보여줬지만 영 불안했다.
폰이 소속 된 템빨단, 템빨국까지 염룡 트라우카의 적대 목록에 올라간 상태였으니까.
“드래곤이 그 친구를 혼내주겠다고 템빨국까지 침공해올 가능성도 있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오. 본디 드래곤이란 자신의 레어에 집착하는 법인데 굳이 인간 하나 잡자고 레어를 떠나기엔 손해라고 생각할 거요. 아니, 애초에 안중에도 없겠지.”
스틱세이의 의견과 똑같았다.
안도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재차 경고했다.
“단, 적대하는 인간이 여러 명 모인 장소가 있음을 알게 되면 태도가 바뀔 우려가 있소. 귀찮음을 무릅쓰고라도 레어를 나서겠지. 지혜의 탑에 수십 종의 은폐 마법이 걸려있는 이유요.”
“저까지 드래곤을 적대했다간 괜한 화를 자처했겠군요.”
심지어 템빨국엔 브라함도 있다. 브라함은 염룡 트라우카의 레어를 털어먹은 전력이 있었다.
이미 브라함과 폰이 머물고 있는 템빨국의 왕 그리드마저 드래곤을 적대했다면 템빨국은 찍혀도 단단히 찍혔을 것이다.
그리드가 십년감수하고 있자니 하야테가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스파앗!
하야테의 심상 세계가 걷히며 밤하늘이 그리드를 반겼다.
달의 위치를 확인한 하야테가 그리드를 은근히 재촉했다.
“나는 곧 잘 시간이군.”
“아, 예.”
그리드가 주작의 심장을 활성화시켰다. 크게 심호흡하며 긴장감을 떨쳐낸 그가 드디어 새로운 화신의 폭풍을 전개했다.
화신의 폭풍의 가장 큰 장점은 ‘즉발’이라는 점.
전격 마기의 폭풍이었던 시절과 달리 딜레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콰르르르륵!!
거대한 화염이 불시에 일대를 뒤덮었다.
거룩한 불꽃과 의지의 불꽃이 조용하게, 그러나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본래는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츠칵-! 츠카카카카칵!!
온통 주홍색과 붉은색의 불꽃으로 가득 찼던 세계에 은빛의 은하수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것은 검기.
무한한 검기였다.
<화신의 폭풍>
새롭게 태어난 화신의 위엄을 실현합니다.
-필드 효과 1-
<거룩한 불꽃>
주작의 9번째 심장에 잠재된 불꽃을 끄집어내 화신의 폭풍을 형성합니다.
폭풍은 시전자의 반경 200미터 일대를 장악하며 시전자를 포함한 모든 아군(단, 종족이 언데드, 혹은 마족인 대상은 제외)의 치유 효과를 20퍼센트 상승시키고 모든 적의 치유 효과를 50퍼센트 감소시킵니다. 저항 불가.
치유 감소 효과에 걸린 대상이 회복을 시도 시 ‘화신의 분노’가 발생해 1만 5천의 고정된 피해를 입히며 회복 효과를 확률적으로 반전시킵니다.
종족이 언데드, 혹은 마족인 대상이 폭풍의 범위에 있을 경우 매우 큰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습니다.
-필드 효과 2-
<의지의 불꽃>
화공의 무형지기로 화신의 폭풍을 강화합니다.
폭풍의 범위에 있는 모든 적에게 의지 스탯과 근력 스탯에 비례하는 심(心) 속성 데미지를 입히고 의지 스탯과 지력 스탯에 비례하는 화 속성 데미지를 추가로 입힙니다. 이중 심 속성 데미지는 대상의 방어력과 저항력을 관통하지만 의지 스탯을 보유한 대상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피해를 입은 대상은 높은 확률로 화상을 입고 보통 확률로 의지 하락을 겪습니다.
-필드 효과 3-
<불꽃의 범람>
필드가 활성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향 범위가 확대됩니다. 최대 300미터.
-필드 효과 4-
주작의 9번째 심장이 성장 시 개방.
-필드 효과 5-
의지 스탯이 2천에 도달 시 개방.
-필드 효과 6-
종족이 반신, 혹은 신으로 변경 시 개방.
★특수 효과★
<무한의 검기>
필드가 활성화되는 동안 무한한 검기를 얻습니다.
필드 활성화 즉시 검기가 최대치로 회복되며 검기를 소모하는 스킬 사용 시 검기가 소모되지 않습니다.
필드 활성화 시 자원 소모:초당 1,000의 마나
필드 소환에 걸리는 시간:즉시
재사용 대기 시간:20분
“오오....!”
힘이 넘친다.
화신의 폭풍을 유영하는 무한한 검기에 휩쓸린 그리드는 자신이 절대무적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흥분을 주체 못하는 그의 몸을 둘러싼 투기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무한의 검기에 휩쓸려나가기 시작한가 싶더니 섞이고, 또 섞이는 과정을 겪으며 일체화해나갔다.
그리고 그리드는 목적을 달성했다.
[<영웅왕>의 투기가 <무한의 검기>와 하나로 융합됩니다.]
[투기의 영향으로 검기를 소모하는 모든 스킬의 위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앞으로 투기는 항시 50으로 유지됩니다. 이 수치는 당신의 격이 상승함에 따라서 함께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투기에 억눌렸던 당신의 육신이 조화를 되찾습니다.]
[<깨달음> 효과가 완벽하게 활성화됩니다. 경험치 획득 공식이 새롭게 개편됩니다.]
“....”
랭킹 1위, 죽어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며 화신의 폭풍을 거두는 그리드의 몸에는 전보다 짙어진 적자색 투기가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