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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17화 (1,107/1,794)

템빨 57권 - 20화

“심상으로 구현하는 검이라니.... 그건 마치 검성의 경지가 아닙니까?”

용살검과 크라우젤의 심검(心檢)은 같은 이치를 담고 있었다.

용살검을 배움으로써 검성의 자격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리드는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이 크라우젤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빼앗을 수 있다는 근심이 생겼다.

그리드의 안색을 읽은 하야테가 크게 웃었다.

“과연. 요즘 세대답게 검성을 오해하고 있구려.”

“네?”

“심검은 검성의 척도가 아니오. 검성이 창조하는 무수히 많은 검술 중 하나에 불과하지.”

“....?”

“설령 용살검이 심검과 같은 개념의 검술이라고 할지언정, 단지 그것을 익힌 것만으론 검성의 경지를 논할 수 없다는 뜻이오.”

“.....”

“이 시대는 검성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가 너무나도 가볍소. 당대 검성 크라우젤이 아직 발전하는 단계에 머물러 그런 것일 테지.”

하야테가 웃음을 거뒀다. 그리드의 눈매가 다소 매섭게 변한 까닭이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크라우젤을 비하할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니까.”

“무슨 말씀을.... 오해 같은 거 안 했습니다.”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는가.’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관계를 어렴풋이 유추한 하야테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설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용살검과 심검은 다르오. 그대는 심상과 의지의 개념을 잘못 이해했소. 의지란 어떤 것을 이루려는 마음이며, 심상이란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말이요. 심상이 의지를 포괄하는 것이지.”

“포괄하는 것이라면.... 용살검이 심검보다 상위 개념의 검술이라는 말씀입니까?”

만약 하야테가 어지간한 인물이었다면 그건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 쳤을 것이다.

하지만 하야테는 드래곤 슬레이어다.

“그렇소.”

“헉....”

“단, 불완전하오. 사용자의 마음의 상태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때때로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엄밀히 따지면 심검보다 높은 난도가 요구되는 기술인 게요.”

“....!”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심검보다 난이도가 높다니?

‘그런 걸 내가 무슨 수로 배우지?’

그리드는 적어도 지능적으론 자신을 고평가하지 못했다. 자신의 재능으론 용살검을 배우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걱정 마시오. 누차 말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용살검을 전수하려는 게 아니라 무한의 검기의 실현 법을 알려주려는 것이오.”

그리고 무한의 검기는 용살검을 성립시키는 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야테의 손가락이 그리드의 가슴을 겨눴다.

“인간이라는 그릇엔 한계가 있소. 설령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기를 쌓는다한들 그것이 무한이 될 수는 없지.”

하야테의 손가락이 이번엔 허공을 가리켰다. 고아한 손짓이 인상적이다.

“반면 우주는 무한하니 만물에 존재하는 기는 무한이오. 하지만 이를 전부 다 빌려오는 일은 불가능하오. 만물과 비교해서 인간의 크기는 먼지보다 작아 공간이라는 개념에 구애 받기 때문이오.”

그리드는 피아로의 자연경과 브라함의 마나 드레인을 떠올렸다.

피아로는 ‘주변’의 자연이 품고 있는 기운을, 브라함은 ‘주변’의 만물이 품고 있는 마나를 끌어와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이해했습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무한의 검기를 실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어지간한 전설이나 초월자도 드래곤의 비늘을 가르지 못하는 이유지.”

하야테가 먼 과거를 회상했다.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발광했던 녹빛의 드래곤.

고향 구석구석을 초토화시켰던 놈에게 죽어가던 혈육들의 모습이 이제는 희미하다. 그들이 내게 주었던 애정만이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있을 뿐이다.

“드래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을 때.... 나는 놈을 베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었소. 초인의 경지에 오른 몸으로 손에 잡히는 모든 병기를 찌르고, 휘둘러보았고, 내심 자랑거리로 삼았던 마력으로 마법을 폭격했지만 무용지물이었지. 나의 평생을 담은 공격들은 놈의 단단한 비늘에 흠집만을 가득 새겼을 뿐이었소.”

그나마 희망은 있었다.

놈이 다른 드래곤에게 물린 자리의 비늘이 썩어 문드러져 재생이 안 됐던 것이다.

안 그래도 지쳐있던 놈의 마력은 대부분 그 상처를 보호하고, 회복하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거의 몸부림이나 다름없던 놈의 공격은 하야테의 숨통을 끊지 못했다.

하야테에겐 아직 반격을 도모할 기회가 있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물리적인 개념으로는 드래곤을 벨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더 강한 힘을 갈구하게 되었소. 우선 기술이라는 형(形)을 버렸지. 그리고 단지 베겠다는 일념만을 세워서 심검을 터득했소.”

‘실화야...?’

초인의 육신, 자랑으로 여겼던 마력, 끝으로 심검....

하야테는 이미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기 전부터 최강의 존재였음이 확실하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의 머릿속엔 과거의 하야테가 아닌 마드라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무패왕 마드라.

급기야 용마저 벤 하야테에게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었다는 평가를 듣다니....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물이다.

“나의 의지가 놈을 베고, 베고, 또 베었소.”

“....”

“하지만 부족했지. 단지 베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신화적 존재나 다름없는 드래곤을 죽음까지 몰아넣지 못했소.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이오. 이미 지친 나의 육신과 사고(思考)는 가동을 멈춰버린 반면 드래곤은 실시간으로 회복하고 있었거든. 놈의 비늘이 수복하는 과정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때 내 심정은....”

쿠오오오오오.

순백의 공간.

하야테가 일으키는 검기의 격랑에 들썩이던 그 정체불명의 공간이 어느새 잠잠해졌다. 검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얕은 강물처럼 고요하게 흐르게 되었을 뿐, 하야테의 검기는 메마르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멀쩡했지. 이미 사고를 잃은 나는 현재 자신이 겪는 상황과 자신이 보는 광경을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그저 기계처럼 움직였소. 단지 눈앞의 어떤 것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고, 끝내 다가가 검을 휘둘렀소.”

이미 몸은 넝마였지만 자각하지 못했으니 고통이 없었다. 고통이 없어서 움직일 수 있었다.

완전한 무의식이었다.

“그때의 나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심상이었지. 더 큰 힘에 대한 갈망, 기필코 베겠다는 집념, 재앙의 끝을 그리는 희망 등 내 마음에 새겨졌던 모든 바람이 나라는 존재를 새로운 세계에서 일깨웠소.”

그 세계가 바로....

“이곳.... 입니까?”

드래곤을 베기 위해 필요한 힘.

바로 무한의 검기가 이 순백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눈치 챈 그리드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고,

“맞소.”

하야테는 긍정했다.

백열하는 그의 검엔 측량할 수 없는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비반의 무쌍심법은 검기를 계속해서 ‘수복’시키는 것인 반면 용살검의 심상은 검기를 ‘메마르지 않는 것’으로 정립하는 것이오.”

“....”

“검성 뮐러가 투기를 억누른 방법은 마나핵에 투기를 가두는 것이었소. 마나핵이라는 우물에 투기라는 물을 담고 그 위에 검기라는 기름을 덮어버렸지.”

그건 융화가 아니었다.

뮐러가 세운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균형에 불과했다.

“반면 그대의 투기는 그대의 심상에 담길 것이오. 그대의 심상에서 소용돌이치는 무한의 검기와 급기야 완전한 하나로 섞이게 될 것이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융화고, 조화요.”

하야테는 주장하고 있었다.

자신이 제시하는 방향이 뮐러가 추구했던 방향보다 더 나은 결과를 탄생시킬 거라고.

“.....”

부들부들.

그리드의 몸이 떨렸다.

역대 최강의 전설을 논할 때면 반드시 언급되는 검성 뮐러.

자신이 어떤 한 면에서만큼은 그를 초월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자 감당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물론 잠시 뿐이었다.

격양돼 붉어졌던 그리드의 얼굴이 이내 차갑게 식었다.

“고백하지 못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

“저는.... 재능이 부족합니다. 하야테 님께서 제게 가르침을 주신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겁니다.”

양반 가람조차도 심상 세계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었다.

만약 그가 심상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부적 따위로 공간을 분리하는 등의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드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켰을 것이다.

그리드가 아는 한에서 완벽한 심상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브라함과 하야테 단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기의 천재였다.

둔재에 불과한 자신이 무슨 수로 심상 세계를 연단 말인가....

좌절하며 고개 숙이는 그리드의 시야에 하야테의 손가락이 보였다.

하야테의 손가락은 그리드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그리드의 심장과 겹쳐져 있는 주작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대는 재능 이상의 것을 보유하고 있소.”

“....?”

“그건 바로 신의 힘이오. 돌이켜 보시오. 그대는 이미 세계와 격리 된 다른 공간을 창조할 수 있소.”

“....!”

주작의 심장.

신의 힘.

세계와 격리 된 공간.

하야테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는 그리드의 뇌리에 한 가지 스킬이 스쳐지나갔다.

‘화신의 폭풍!’

필드 마법은 시전자의 존재감을 극대화시킨다.

보통의 공간과는 완전히 차별되는 공간임이 분명했다.

그리드는 필드 마법을 보기 드문 이유가 뭔지 깨달았다.

필드 마법 또한 심상 세계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심상 세계의 편린.

어쨌든 아무나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 하지만 이걸 저의 심상이라고 하기에는....”

“정확히는 주작의 심상이오.”

“....!?”

“무려 신의 심상. 비록 편린에 불과할지언정 기능만은 확실하지.”

꾸욱.

하야테의 손가락이 그리드의 가슴을 찔렀다.

“읏!”

기묘한 감각에 그리드가 신음했다.

하지만 하야테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드는 급기야 얼굴까지 붉혔지만 무시하고 손가락에 더 큰 힘을 실었다.

그러자.

콰르르르르르르륵!!

하야테의 심상 세계에 흐르고 있던 무한의 검기가 그리드의 심장에 아니, 정확히는 주작의 심장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야테가 미소 짓고 있었다.

“본디 공부란 쉬울수록 좋지.”

“앗....! 아흑....!”

콰륵! 콰르르르르륵!!

검기의 흡수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절정에 숨쉬는 것조차 잊은 그리드는 단지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주작의 심장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주작의 9번째 심장>에 절대자의 힘이 깃듭니다.]

[<화신의 폭풍>에 새로운 필드 효과, <무한의 검기>가 추가되었습니다.]

“....절대자?”

쾌락 속에 희미해져가던 그리드의 정신이 일깨워졌다.

떨리는 그의 눈동자에 투영되는 하야테의 몸 위에 금색의 광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야테의 표정은 마치 독한 약을 마신 사람의 것처럼 씁쓸했다.

“내가 드래곤을 죽였다는 기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소. 목격자가 모조리 죽어버렸기 때문이지.”

“....”

“나를 회자하는 것은 인류가 아닌 드래곤. 나를 향한 멸시와 증오를 담은 지독한 용언(龍言)들이 나를 존재시키고 있으니 나는 저주 받은 존재요. 하니 선망의 시선일랑 거두시오. 그런 시선을 받아도 좋을 사람은 나 따위가 아닌, 바로 그대요.”

“....!”

검기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하야테가 품고 있는 지독한 고통과 슬픔을 느낀 그리드의 이가 악 물렸다. 눈이 붉게 충혈 됐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여섯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어느 고독한 절대자의 고백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제가.... 제가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높이 선 자를 감히 위로하였다.]

“당신을 저주한 도마뱀 새끼들, 제가 언젠간 반드시 박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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