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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16화 (1,106/1,794)

템빨 57권 - 19화

‘이런 상황은 예상 못했는데…….’

그리드가 지혜의 탑을 방문한 이유는 비반의 도움을 바라서였다.

그나마 인연이 있는 비반이라면 막힌 성장의 단서를 찾아 주지 않을까 기대했었고, 무쌍심법의 전파를 허락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래, 다른 결사들과의 만남이나 <탑의 임무> 퀘스트는 모두 부차적인 목적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해서 결사들과의 만남은 꺼려졌을 정도다.

수백 년 동안 자신만의 신념을 쌓아 올린 사람이 타인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리드는 여태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으니까.

브라함과의 첫 만남이 그랬던 것처럼, 비반과의 첫 만남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결사들과의 만남은 피곤한 사건을 불러올 확률이 높아 보였고 그래서 꺼려졌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어떻소? 잠시 동안이나마 내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

결사들의 성격과 태도는 그리드의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품을지언정 오만하지 않았다.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실보다 이면의 파악에 집중하는 지혜를 보여 주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존경할 만한 위인들이었다.

그리드는 확신했다.

‘이들을 속여선 좋을 게 없다.’

지혜의 탑은 광룡철이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현재 광룡철을 소유하고 있는 누군가가 이를 잘못 활용할 경우 세계를 멸망시킬 거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룡철을 소유한 인물은 다름 아닌 그리드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들이야. 내가 광룡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밝히면 충분히 믿고 맡겨 줄 거야.’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덜미를 잡혔다가 결사들을 실망시키고 분노를 살 경우 그때는 정말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밝히는 편이 낫다.

그리드가 생각하는 동안 하야테는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내 제안이 그대를 난처하게 만드는가 보군. 이거 실례했소.”

용살검.

무려 드래곤을 죽인 비기의 묘리를 전수하겠다는데도 그리드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드의 반응을 괘씸하게 여기기보다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범한 건 아닌지 걱정하는 듯했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다채로운 그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그리드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하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하야테 님, 사실 저는 지혜의 탑을 속였습니다.”

“흠?”

“광룡철의 주인은… 바로 접니다. 탑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이미 제가 광룡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드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야테의 격정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하야테는 조용했다.

한참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자 의아함을 느낀 그리드가 슬그머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드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본 하야테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광룡철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쭉 불안했겠구려.”

“아닙니다. 저는 광룡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드는 진심이었다. 광룡철로 <탐욕>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광룡철의 성질을 억제하는 방법을 완전히 파악했으므로 자신감이 넘쳤다.

“하면 왜 굳이 이 사실을 고백하는 거요?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영원히 비밀로 간직해도 상관없을 문제 아니었소?”

“탑이 먼저 제게 신뢰를 보여 줬으니 저 또한 신뢰로 보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섣부른 고백이었소. 탑의 입장에서는 광룡철의 주인을 알고도 모른 체할 수 없소. 반드시 광룡철을 회수해야 하오.”

“저를 신뢰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믿소. 저 고고한 주작과 생명을 공유하는 그대를 믿지 못한다면 세상 천지에 그 누구를 믿을 수 있겠소? 다만, 세상일이라는 게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요. 세상에 광룡철을 노리는 존재가 어디 한둘인 줄 아시오?”

“광룡철을 노린다고요?”

“광룡철이 일정량 이상 증식하게 되면 광룡의 마력이 짙어지고 모든 드래곤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요.”

“네.”

“한꺼번에 출몰한 드래곤이 충돌을 일으키면 세계가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며, 이 땅 위에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존재는 셀 수 없이 많지.”

“예를 들어 대악마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은 인간일 수도, 신일 수도 있소. 세계를 증오할 만한 원한을 품는 데에 태생은 관계없으니까.”

“…….”

“그 무수히 많은 이들이 광룡철을 노리고 그대를 기만하거나 해치려 들 게요. 그대는 그들로부터 언제까지고 광룡철을 수호할 수 있다고 단언하오?”

“그건…….”

그리드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탐욕은 직업 고유 아이템.

그것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권한은 오직 그리드에게만 있었고 사망 시 드롭할 우려가 없었다. 하지만 탐욕을 제작하고 남은 소량의 광룡철은 경우가 달랐다.

그리드는 탐욕을 지켜 낼 자신은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보관하고 있는 광룡철까지 지켜 낼 수 있다고 단언하진 못했다.

허면, 탑은?

“…탑은 어떻습니까? 탑은 반드시 광룡철을 수호할 수 있노라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리드가 당돌하게 반문해 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또다시 예상외였다.

“없소.”

“……?”

“단지 소멸시킴으로써 위험을 차단하는 수준에 그치지.”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파브라늄과 융합시키지 않고 남겨 둔 광룡철의 수량은 얼마나 되오?”

“……! 파브라늄을 알고 계셨습니까?”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던 파그마, 증오 어린 집념으로 한계를 초월했던 브라함, 세상 모든 물질을 검으로 체화하는 경지에 올랐던 뮐러, 동서고금을 통틀어 역대 최강의 재능을 지녔던 마드라……. 그들이 활동했던 시대들은 탑에서도 주목하는 수밖에 없었소. 존재감이 워낙 거대했으니까. 파그마와 브라함이 한때 한마음, 한뜻으로 창조했던 위대한 광물 파브라늄을 우리가 모를 리 없지.”

“…….”

그리드의 고백 이후 표정을 굳혔던 하야테는 어느새 다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소. 그대가 무장하고 있는 무구 어디서도 파브라늄의 흔적을 엿보지 못했을 때부터 그대가 의도적으로 파브라늄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 그리고 숨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다가 광룡철을 떠올렸소.”

“잘 보셨습니다……. 저는 이미 광룡철과 파브라늄을 하나로 융합했고 혹시 몰라 남겨 둔 광룡철은 소량에 불과합니다.”

낭패다.

설마 파브라늄과 광룡철의 융합까지 간파해 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대로는 탐욕이 위험하다.

파브라늄과 광룡철을 다시 분리해서 모조리 탑에 바쳐야 할 수도 있다.

‘너무 섣불리 행동했어.’

초조해서 손톱을 깨무는 그리드에게 이번에는 하야테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예?”

“나를, 탑과 결사들을 믿고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소. 덕분에 탑은 그대에게 품었던 일말의 의심조차도 말끔히 해소할 수 있게 되었소. 진정한 친구를 새로이 얻었으니 하염없이 기쁠 따름이오.”

“……?”

“광룡철은 여태까지처럼 그대에게 맡기겠소. 그대가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데 그걸 굳이 빼앗을 권한이 우리에겐 없지. 적어도 광물에 있어서만큼은 그대가 세계 최고의 권위자 아니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자칫하다가 제가 누군가에게 광룡철을 빼앗길 수도 있잖습니까?”

“이미 파브라늄과 융합한 광룡철은 누군가가 빼앗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닐 테고, 그렇다면 문제는 따로 남겨 놓았다는 소량의 광룡철뿐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소량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대가 잘만 통제하면 광룡철의 기척이 드러날 정도로 증식할 일 자체가 없을 테니 안심하고 맡길 수 있소.”

“왜… 왜 그렇게까지 저를 신뢰하시는 겁니까?”

이쯤 되면 부담이 될 지경이다.

불안해하는 그리드의 빈 찻잔을 확인하고 다시 채워 준 하야테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웃는 낯으로 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대의 무력에 감화해서가 아니요.”

쪼르륵.

찻잔이 채워진다.

찻잔 속 찻잎은 물이 가득 찰수록 흔들림을 멈추고 중심을 잡았다.

“타인을 위해, 세상을 위해서 싸워 온 그대의 서사(敍事)가 나로 하여금 그대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신뢰하게끔 만들고 있는 것이오. 그게 전부요. 내가 그대를 신뢰하는 이유는 단지 그대가 그대이기 때문이오.”

“……!”

그리드의 의심과 혼란이 멈췄다.

복잡했던 그의 심상이 일깨워지며 흔들리던 눈동자가 굳건해졌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리드가 소량의 광룡철을 남겨 둔 이유는 단순하다.

언젠가 다시 쓰임새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사실 굳이 남겨 둘 필요는 없었다.

그리드에겐 이미 탐욕이 있었으니까.

광룡철의 역할은 탐욕이 모조리 대신할 수 있다.

하지만 광룡철은 탐욕의 역할을 대신하지 못한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야테에게 양해를 구한 그리드가 휴대용 용광로와 백린목을 꺼냈다. 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광룡철을 모조리 꺼내더니 불에 녹여 없앴다.

“이제는 해악에 불과한 물건을 굳이 갖고 있을 필요는 없겠죠. 안 그렇습니까?”

“으음…….”

푸욱. 푸욱. 푸욱.

열심히 풀무질하면서 말하는 그리드.

지금 그가 정말로 진지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하야테는 새삼 깨달았다.

전설과 초월자 중에 정상인은 드물다는 사실을.

“후우. 후우. 후우.”

푸욱. 푸욱. 푸욱.

지혜의 탑의 10층.

드래곤 슬레이어가 기거하는 신성한 공간에 풀무질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진다.

그 누구도 상상 못해 본 광경이었다.

***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은 용살검 그 자체가 아니오.”

용살검의 전개의 기초가 되는 무한의 검기.

하야테는 딱 거기까지만 그리드에게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용살검을 감당하기에는 그대의 심기체가 아직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오. 투기를 잡으려다가 도리어 용살검에 집어삼켜질 우려가 있으니 어쩔 수 없소.”

“이해했습니다. 무엇이든 가르침을 주신다니 감사하고 영광일 따름입니다.”

온통 백색으로 물들어 있는 대련장.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그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하야테를 마주 보고 선 그리드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인류 최초의 전설.

어쩌면 지금은 신화에 도달하고 있을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오다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철컥.

하야테가 검을 뽑아 쥐었다.

순간 발출되는 검기가 격랑을 이루며 공간을 지배했다.

“기(氣)에 대한 접근은 사람마다 다르오. 누군가는 축적하는 것이라 하고, 누군가는 빌려 오는 것이라 하지. 쉽게 예를 들자면 무쌍심법과 자연경이 있소. 무쌍심법은 축적하는 것이고 자연경은 빌려 오는 것이지. 반면 용살검은.”

츠카하하하하하하학!!

검기의 격랑이 점차 더 강해졌다.

하야테의 검이 순백의 광채로 물들었다.

“심상으로 구현하는 것이오. 그렇기에 제약이 없지.”

“……!”

그리드의 머릿속에 베리드의 몸을 베었던 참격이 떠올랐다.

그것은, 검성 크라우젤의 심검(心檢)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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