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18화
아서왕과 기사들이 원탁에 나란히 앉았다고 해서 그들의 신분이 동등해졌던 것은 아니다.
원탁의 의미는 평등이지만 이는 때때로 상징적인 의미에 그쳤다.
지금이 그런 경우다.
1좌 하야테가 앉은 자리가 곧 상좌였다.
그가 입을 열자 결사 모두가 예의를 갖추고 경청했다.
“동쪽의 정기가 되살아났다 싶더니 귀공께서 주작을 부활시켰나보오?”
주작의 심장을 꿰뚫어보듯 그리드의 가슴을 바라보던 하야테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사방신 중에서도 가장 고고한 주작의 생명을 공유하는 인간이 탄생할 줄이야. 같은 인간으로써 자랑스럽군.”
“....동대륙의 진짜 신화를 알고 계십니까?”
그리드에게 있어선 비반과의 만남도, 아벨리오와의 만남도 충격적이었다.
둘 모두 그리드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단번에 알아보고 가르침을 주었으니 결사라는 존재에게 경외감마저 느꼈었다.
하지만 하야테는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지혜의 탑은 굳이 세상을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하지 않소. 하나의 똑같은 세상으로 보고 늘 예의주시해왔지.”
“그렇습니까?”
질문하는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비반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그를 2좌 프론잘츠가 노려보는 반면 하야테는 인자하게 웃어주었다.
“비반 공은 모르실 수도 있지. 비반 공께서 탑의 결사로 합류하신 무렵부턴 드래곤들의 활동 반경이 서쪽으로 축소됐으니까.”
“하야테 님! 탑에도 기록이라는 것이 있고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반에게 최소한의 자각이 있었다면 우리의 과거 활동을 몰랐을 리 없지요!”
2좌 프론잘츠는 비반의 무지와 하야테의 무른 태도를 동시에 비난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소양조차 쌓지 않아 바보 같은 질문이나 던지는 비반과 그를 벌하기는커녕 비호하는 하야테에게 어지간히 큰 불만을 품는 눈치였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나본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입을 다문 그리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결사들을 한 바퀴 쭉 훑어보았다.
프론잘츠를 분통 터지게 만든 비반은 프론잘츠를 조롱하듯이 귀를 후비고 있었고, 8좌 제시카는 그런 비반에게 입 모양으로 주의를 주었다.
반면 나머지 인원들은 하야테와 마찬가지로 허허 웃을 뿐이었다.
스스로의 삶을 바쳐 드래곤이라는 강대한 적으로부터 세계를 수호하는 정의의 사도들답게 담대하고 관대해 보였다.
한숨 쉰 프론잘츠가 비반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탑의 기록을 열람하고 탑의 역사를 배우시오. 그럼 10년 청소 형벌을 면해주겠소.”
“탑의 서적은 죄다 고대의 룬어로 적혀있는데 저보고 무슨 수로 읽으라는 겁니까?”
“공부를 하시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청소 아니, 정화 작업에 매진하고 수련이나 하겠습니다.”
“익...!”
이를 악 무는 프론잘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결사들 중에서 유독 그만이 규칙과 통제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딱 라우엘 포지션이네.’
특히 리더가 자유분방한 조직일수록 아랫사람이 분위기를 조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규칙을 바로세워야만 조직이 유지됐으니까.
비반과 조금 더 언쟁을 벌이던 프론잘츠가 한숨 쉬더니 그리드에게 목례했다. 추태를 보여 미안하다는 뜻이었다.
어색하게 웃은 그리드가 비반을 슬쩍 쳐다봤다. 여전히 귀를 후비는 꼴을 보니 다섯 살짜리 꼬마처럼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분위기가 다시 잠잠해지자 하야테가 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결사들이 그리드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8좌 제시카에요. 비반과 같은 시대에서 마법사로 활동했었죠.”
“....!”
누차 말했듯이, 플레이어들이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역사는 전대 전설의 시대에 그친다.
그보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이전의 세대의 역사는 너무 오래 전의 과거였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힘들었다. 여러 국가들이 전쟁을 겪고 승패를 겪는 과정에 사장되거나 기밀이 된 문서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시카의 이름은 아직도 유명했다. 심지어 그리드도 알고 있을 정도다.
‘메아리 마법의 창시자.’
제드노스와 라엘라 등, 마법사들이 전직 퀘스트를 진행할 때 종종 듣는 이름이 학센과 제시카라고 했다. 학센의 극점 마법과 제시카의 메아리 마법.... 그중에서도 메아리 마법은 아직까지도 연구되는 학문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시카가 내미는 손을 그리드가 정말로 정중히 맞잡았다.
역사적인 존재를 실제로 대면하는 일은 매번 겪어도 전율적인 경험이었다.
“6좌 켄이야. 무도가지.”
“5좌 쥬르네입니다. 몬스터 테이머죠.”
“나는 베티.... 4좌.”
셋 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아벨리오와 마찬가지로 비반, 제시카보다 이전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켄과 쥬르네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고 베티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으니 전설이라는 존재가 새삼 대단하게 다가왔다.
‘불멸의 존재....’
정작 전대 전설은 대부분 죽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리드가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는 그때 3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무려 2미터를 넘기는 장신이었고 손은 수박을 한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으니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라드볼프. 과학자지.”
‘과학자?’
전설의 과학자가 있던 시대도 있었던 건가?
그리드가 다소 낯설어하자 히죽 웃은 라드볼프가 설명을 덧붙였다.
“거인족일세.”
“....!!”
그리드의 뇌리에 고대 거인족의 유물이 떠올랐다.
황자 에단의 야망을 부추겼던 전쟁병기.
‘마장기!’
탑의 결사들은 무슨 수로 드래곤들과 싸워왔는가.
비반의 실력을 겪고도 내심 의문을 품어왔던 그리드의 의심이 드디어 해소됐다.
그리드는 새삼 깨달았다.
이 자리에 모인 결사들의 수준은.... 상상이상이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그리드에게 프론잘츠가 악수를 건네 왔다.
“2좌입니다. 라드볼프의 형제이지요.”
거인족은 지금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이지(理智)를 상실해 거의 괴물 취급을 당했다.
반면 라드볼프와 프론잘츠는 ‘지혜로운 전사’라고 칭송 받았던 고대의 거인족 그 자체였다.
프론잘츠와 악수를 나눈 그리드의 시선이 드디어 상좌의 하야테에게 옮겨졌다.
발달한 골격 탓에 다소 험악한 인상을 지닌 라드볼프, 프론잘츠 형제와 달리 하야테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장두형의 두상과 금발, 벽안, 멋진 수염, 고아한 표정.
사람들이 흔하게 떠올리는 귀족적인 특징을 모두 지닌 사내.
그 또한 자신을 간략하게, 하지만 강렬하게 소개했다.
“드래곤 슬레이어.”
“....!”
“인류 최초의 전설이오.”
***
드래곤 슬레이어.
게이머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칭호다.
대부분의 게임이 드래곤을 특별한 존재로 묘사하는 만큼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가 지닌 고유의 멋은 각별한 것이었다.
특히 Satisfy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는 거의 환상으로 취급됐다.
Satisfy에서 드래곤은 토벌의 대상이 아닌 재앙 그 자체였으니까.
목표로 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항거 불가능의 대상을 누가 감히 해치운단 말인가?
만약. 정말로 만약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지닌 플레이어가 존재한다면 그건 짝퉁에 불과했다. 비룡 따위나 잡고 얻은 반쪽자리 칭호일 테지.
실제로 Satisfy의 주민들과 역사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단어를 함부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드는 전설 중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여기, 스스로를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운이 좋았소.”
탑의 10층.
그리드를 서재에 초대해서 차를 대접한 하야테가 씁쓸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세력 싸움에서 지고 상처 입은 드래곤을 우연히 만났지. 놈의 기세에 겁을 먹은 나는 살기 위해 발악했고 끝내 놈의 목을 떨어뜨렸소.”
“.....”
자랑스럽게 늘어놓아도 부족할 무용담을 마치 부끄러운 일인양 말하는 하야테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드는 엿볼 수 있었다.
하야테가 지닌 무인으로써의 자부심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그가 비반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생각하던 그리드가 문득 하야테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하야테의 시선에는 호감을 넘어서는 선망이 깃들어 있었다.
무려 탑의 1좌가 내게 이런 시선을 보내다니?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말했다.
“그대가 쌓아온 격들은.... 단지 운이 좋다고 해서 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구려.”
물론 한두 번쯤은 운이 따랐을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 여러 번 운이 따랐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만한 격을 쌓기까지 겪어온 모든 사건을 운 좋게 해결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대가 피할 수 없었던, 혹은 피하지 않았던 모든 사건과 이를 극복하고자 발휘했을 근성, 끈기, 실력 모든 것에 경외심을 느끼오.”
“과찬이십니다.”
“단언하오. 그대가 홀로 쌓아올린 모든 업적은 탑의 결사들이 쌓아올린 모든 업적을 합한 것보다 훌륭하고 대단한 것이오. 다른 결사들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굳이 시험을 치르지 않고 그대를 원탁에 초대한 것이오.”
본래 탑의 시험은 2종류다.
선구자의 자격을 증명하는 기본 시험과 결사들 한 명, 한 명에게 실력을 선보이는 개인 시험.
실제로 동대륙을 다녀오기 전, 그리드는 비반에게 시험을 봤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리드는 두 번째 과정을 생략했다. 동대륙을 다녀오고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뜻이며 결사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였다.
“....아니요. 혼자서 쌓아올린 업적이 아닙니다. 제게는 항상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노에와 랜디부터 시작해서 십공신과 브라함에 이르기까지....
그리드의 곁에는 늘 누군가가 함께였다.
설령 그리드 혼자였다고 해도 그리드가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게끔 많은 이들이 뒷받침해줬었다.
저렙 시절, 템빨단원들이 구해다준 재료나 제작법 같은 것들이 없었다면 그리드는 새로운 도전에 쉽사리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중렙 시절, 라우엘의 내조가 없었다면 그리드는 섣불리 왕좌를 비우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와서 그들의 모든 도움과 활약을 부정하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여기까지 도달했노라 말하기엔, 그리드에게도 양심이란 것이 있었다.
하야테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더욱 더 대단하군. 내가 추구하는 이상을 그대는 이미 이뤘구려.”
“크음....”
너무 좋게만 봐주는 거 아닌가?
그리드가 민망해서 헛기침했다.
이를 보고 귀엽다는 듯이 웃은 하야테의 시선은 서재의 벽면을 훑고 있었다.
하야테를 포함한 결사들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하야테가 말했다.
“내가 탑을 세운 이유는 혼자의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함께 싸워줄 동료들을 모으기 위함이었소.”
“혼자의 한계....”
하야테가 그간 겪어왔을 고난과 역경의 편린을, 그리드는 엿보았다.
그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노라 결심하고 탑을 세우기까지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겠는가....
생각해본 그리드가 준비해왔던 광룡철을 꺼내 하야테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탑의 임무>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용의 비늘이 들어있는 상자>를 얻었습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고, 원하던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얻을 보상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용살검의 전개에는 무한한 검기가 필요하지.”
“네?”
“그대가 투기를 억누르기 위해 추구해야하는 것은 무한의 검기. 내가 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소만, 어떻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