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17화
“뭔지는 몰라도 내가 도와주겠네. 그대의 품에서 느껴지는 광룡철의 기척을 보아 맡겼던 임무도 잘 해결하고 돌아온 눈치인데, 그에 대한 보답쯤으로 여기게나.”
비반은 그리드의 은인이다.
<9좌의 시험>에서 그가 베풀어준 호의가 없었다면 그리드는 용단과 무쌍심법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비반은 무패왕의 검술을 교정해주기도 했었다.
그리드는 비반이 좋았다. 아직은 짧은 인연에 불과했지만 절대적인 호감과 감사를 품어왔다.
하지만 ‘뭔지는 몰라도’ 도와주겠다니, 이 순간만큼은 썩 신뢰가 안 갔다.
애초에 비반은 투기를 알아보지 못했던 전력이 있다.
처음 만났던 그날, 그리드를 메르세데스의 종으로 착각했었음이 바로 그 증거다.
‘만약 비반이 영웅왕의 투기를 알아봤다면 내 정체를 착각했을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이 과연 투기와 검기의 융합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리드가 영 찝찝해하고 있자니 아벨리오가 나섰다.
“비반이 누군지 모를 천재를 위해 남긴 비급이 뮐러의 손에 들어갔고 뮐러는 역대 최강의 전설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소. 무쌍검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
“무쌍검의 창안자이자 뮐러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비반이라면 그대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걸레를 짜며 자리에서 일어난 비반이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슬그머니 구정물을 피한 아벨리오가 그리드의 투기를 가리켜보였다.
“당대의 선구자가 영웅왕의 자격을 얻어 심기체의 조화가 깨졌으니 비반 그대가 도와줘야겠네. 가능하겠지?”
“....영웅왕?”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반.
그의 태도가 그리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리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비반 님은 제가 영웅왕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죠?”
“허, 여전히 당돌하구만. 나를 시험하는 겐가?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게. 안 그래도 자네가 영웅왕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참일세.”
“지금 막 들으신 거죠? 참고로 제가 영웅왕이 된 건 수 년 전....”
“나처럼 영원을 사는 초월자에게 있어서 세월이란 무상한 것이지. 수십 년 전이 어제와 같고 몇 년 전이 지금과 같으니 과거와 현재를 논해봐야 무의미하다네.”
“자꾸 시선은 왜 피하십니까?”
“탑의 정화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지라 어딘가 붙어 있을지 모를 먼지를 수색하는 중일세.”
‘이 양반이 진짜....’
그리드가 아벨리오에게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빙그레 웃은 아벨리오가 그리드를 안심시켰다.
“농하는 거니 괘념치 마시오.”
사실 아벨리오의 속내는 달랐다.
비반이 정말로 몰랐을 수도 있음을 눈치 챘다.
이해는 갔다.
영웅왕의 투기란 신화적인 힘이니까.
전설이 된지 채 20년도 안 된 그리드가 두르고 있는 저 기운이 설마 투기일 줄은 몰랐겠지. 아니, 설령 투기임을 알아봤더라도 영웅왕과 연관 짓지 못했을 수도 있다.
비반의 관념에서 영웅왕이란 절대적인 강자를 칭하는 호칭일 텐데 그리드의 수준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렇군요....”
그리드는 별로 납득이 안 됐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굳이 진실 공방을 벌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비반이 투기에 대해 알고 있었든, 몰랐든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뚜벅. 뚜벅.
비반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새카만 걸레와 구정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양손에 거머쥔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고요해 우주를 보는 듯했다.
“어쨌든 한동안 꽤 많은 시간을 손해 봤겠군.”
“.....”
“보통 사람이 그대만한 경험을 쌓았다면 자연히 깨달음을 얻고 정진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대의 체는 투기에 집어삼켜져 온전히 작용하지 못했을 테지. 남들이 열 걸음을 내딛을 때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딛었을 테니 억울하겠군.”
“....?”
비반을 향한 그리드의 불신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벨리오와 똑같은 해석을 내놓는 그의 모습을 보고 역시 결사는 결사구나 싶었다. 그가 검성 뮐러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리고 동시에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남들이 열 걸음을 내딛을 때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딛었을 거라고?
그리드는 조금 전 활성화 됐던 깨달음 시스템의 정보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직업 고유 활동, 혹은 전투 시 지속적으로 경험치를 획득하게 해주는 시스템.
4차 전직(각성) ‘공용’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경고 메시지가 추가 됐었다.
[<투기> 자원으로 인해 현재 당신은 <깨달음>의 효과를 누리기 힘듭니다.]
‘....아.’
그리드가 현기증을 느꼈다.
깨달은 것이다.
투기만 없었다면, 굳이 어떤 정보를 입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어도 자연히 깨달음 시스템이 활성화 됐을 거라는 사실을.
즉,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400레벨을 찍고 난 후에도 성장에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400레벨 이후부터 더 빠른 성장이 가능해지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 같았다.
이 깨달음이란 시스템 자체가 비전투 직업군, 혹은 ‘큰 성과’를 이루기 힘든 상대적 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레벨이 오를수록 플레이어 간의 갭이 줄어들 거라더니 이것도 그중 하나였냐.’
후,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리드.
그의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어느새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화를 금방 삭인 것이다.
사실 그가 봐도 깨달음 시스템은 납득이 갔다.
높은 난이도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거나 고레벨 몬스터, 혹은 NPC를 해치워야만 레벨을 올릴 수 있던 기존의 방식은 20억 플레이어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상대적 약자들에게 너무 잔인한 시스템이었으니까.
‘레벨 업에 요구되는 경험치 필요량만 적절했어도 이런 생각은 안 들었을 텐데.’
보통의 방법으로 렙업하긴 빡센 게임이 확실하다.
408렙까지 달성하면서 겪었던 온갖 고난과 역경을 떠올린 그리드가 한숨 쉬었다.
‘그래도 투기가 있었기 때문에 양반들을 쓰러뜨릴 수 있던 거고 그래서 레벨이 오른 거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혼자서만 손해 봤다고 생각하지 말자.
이미 투기를 얻은 시점부터 나는 레벨 이상의 강함을 얻었고 투기가 있었기 덕분에 여기까지 금방 도달할 수 있던 것이다....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가 비반에게 정중히 요청했다.
“비반 님, 제게 투기를 억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음....”
비반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새카만 걸레가 자신의 팔뚝에 닿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꿀꺽,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켰다.
비반의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흐음....”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섣불리 대답을 꺼내지 못하고 고민을 거듭하던 비반이 걸레로 코를 풀었다. 그리고 슥슥, 코 밑을 닦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볼 때 투기를 억제하는 방법은 검기와 융합시켜 투기의 고유 효과를 약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네. 다만 신화적인 힘인 투기를 감당할 정도의 검기를 쌓기 위해선 무쌍심법을 극성까지 익히는 수밖에 없어 보이는데....”
그리드가 품고 있는 검기를 슬쩍 확인하는 비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네는 아직 무쌍심법이 1성에 그쳐있군.”
Lv.1.
그리드가 습득하고 있는 무쌍심법의 현재 상태다.
공교롭게도 경험치도 50퍼센트에 불과했다.
‘극성이라는 건 마스터 레벨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어느 세월에 무쌍심법을 만렙까지 찍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무쌍심법의 경험치 획득 공식이 ‘검기의 회복’과 관련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드가 검기를 소모한 후 무쌍심법이 이를 회복시키면 회복시키는 검기의 양과 비례해서 경험치가 올랐다.
의도적으로 경험치를 쌓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킬이 그렇듯이 무쌍심법 또한 레벨이 오를수록 경험치 획득률이 떨어질 것이다. 10레벨을 달성할 때까지 몇 년이 걸릴 지도 몰랐다.
“하....”
깊이 한숨 쉰 그리드가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감당하기 힘든 절망감이 그를 덮쳐왔다.
그의 어깨를 비반이 두드려주었다.
“너무 좌절하지 말게. 이곳은 지혜의 탑. 각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들이 모여 있는 곳일세. 또한 드래곤 하트라는 신비를 운용하는 곳이기도 하지. 필시 좋은 수가 생길 거야.”
“.....”
“우선 다른 결사들을 만나러 가세. 첫 임무부터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그대를 모두가 환영해줄 걸세.”
“....감사합니다, 비반.”
그리드는 비반에게 딱히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비반이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니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슬금슬금.
비반의 뒤를 쫓아 계단을 오르던 그리드가 제자리에 멈추더니 아벨리오의 곁에 섰다. 그리고 비반과 최대한 거리를 벌린 채 걸었다.
비반은 서운한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대체 뭔가? 우리의 인연이 훨씬 더 깊을 진데 왜 내가 아닌 아벨리오하고 같이 나란히 걷는 겐가?”
“그게....”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그리드를 대신해서 아벨리오가 말해주었다.
“자네에게 냄새가 나잖은가.”
“냄새?”
“걸레로 얼굴을 문질러 댔으니 악취가 진동을 할 수밖에.”
“이런 제길!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철썩!
신경질적으로 걸레를 던져 버린 비반이 씩씩거리면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추태를 보여서 부끄러운 눈치였다.
안타까워하는 그리드에게 아벨리오가 말해주었다.
“비반은 필시 훌륭한 사람이오. 하지만 비교적 평범한 오성과 비교해 매우 뛰어난 집중력을 지닌 나머지 어떤 상황에 몰입하면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많소. 그대가 이해해주시오.”
“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허허,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혹시 괜히 실망할까봐 걱정했다오.”
“하하....”
딱히 실망할 것도 없다.
첫 인상이 워낙 최악이었어야 말이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아벨리오와 걸은 그리드는 머잖아 탑의 정상, 10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7좌 아벨리오가 당대의 선구자를 모셔왔습니다.”
그리드를 안내해서 방에 입장한 아벨리오가 원탁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향해서 정중히 고개 숙였다.
그러자 원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아벨리오에게 허리를 숙인 뒤 이어서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파그마의 검기가 느껴지는군.”
“이건 설마 브라함의 마력인가?”
“영웅왕의 투기라니! 대단하구만!”
탑의 결사들은 비반과 전혀 달랐다.
첫 만남부터 그리드의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커다란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그리드를 완전히 꿰뚫어 보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신이 될 상이군.”
1좌 하야테.
오직 그만이 그리드의 심장을 주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