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13화 (1,103/1,794)

템빨 57권 - 16화

선구자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단지 사람이 그리웠던 것일까?

그리드를 대하는 아벨리오의 태도는 무척 친절했다.

“체와 심에 부담을 주는 기가 너무 많아 발전을 못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요. 그대의 육체와 정신에 부담을 주는 기술들이 그대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소.”

“어째서죠?”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육체와 정신이 회복을 필요로 하니 성장에 필요한 깨달음을 얻을 여력이 없는 게요.”

“깨달음....이요?”

“본디 성장이란 경험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지만 경험이란 언젠가 가득 차게 마련이지. 이때 경험을 대신하는 개념이 바로 깨달음이오.”

“....”

그리드는 최대한 쉽게 해석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아벨리오가 말하는 성장이란 레벨이고 경험이란 경험치다.

그리드는 돌이켜봤다.

지금의 레벨에 도달하기까지 자신은 퀘스트와 사냥을 통해서 경험치를 쌓고 레벨을 올려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게 힘들어졌다. 특히 양반들을 레이드하고 레벨을 올린 뒤부터 레벨 업에 요구되는 경험치량이 너무 크게 올라버렸다.

‘반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죽인 경험이 나, 혹은 플레이어가 쌓을 수 있는 경험을 한계치까지 채워버린 건가?’

....아니,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하자.

양반하곤 관계없다.

단지 400대의 레벨이 플레이어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의 경험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레벨을 더 수월하게 올리기 위해선 깨달음이라는 개념이 필요한 거고.

그럼 깨달음이란 뭐지?

아벨리오의 뒤를 쫓아 도착한 4층의 복도는 구조가 미로처럼 복잡했다. 신중하게 걸음을 내딛는 아벨리오의 모습을 보아 목적지까지 도착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깨달음이 뭡니까? 뭘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죠? 설마 몇날며칠 동안 눈감고 폭포수 맞으면서 명상하고 그래야하는 겁니까?”

폭포수에서 명상하던 무신의 추종자의 모습을 떠올려본 그리드는 골치가 아팠다.

깨달음? 명상?

정말로 그런 방법으로 레벨을 올려야한다고?

‘그게 게임이냐? 우주 최초 가상현실 기도원이지, 시불.’

황당해서 혀를 차는 그리드에게 아벨리오가 웃어주었다.

“깨달음은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오. 사실은 굳이 의식할 거리도 아니지.”

“자연히....?”

“기술의 사용이 육체에 형을 새기고 정신이 이를 되새기는 과정에서 몸과 정신에 축적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오.”

“말씀만 들어서는 경험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니, 다르오. 어떤 사건을 해결하거나 적을 쓰러뜨렸을 때 쌓이는 것이 경험인 반면 깨달음은 굳이 어떤 성과를 거두지 않아도 얻을 수 있소.”

“....?”

퀘스트를 깨거나 사냥을 통해서 경험치를 얻는다.

이게 아벨리오가 말하는 경험이라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굳이 퀘스트를 안 깨도, 사냥을 안 해도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란 뭘까?

“설마 혼자서 허공에 삽질.... 아니, 혼자서 기술을 연마하는 식으로 수련하다 보면 깨달음을 얻고 발전하게 된다는 말씀인가요?”

“하하, 요즘 속세에서는 수련을 허공에 삽질이라고 표현하나 보군.”

“.....”

이제 와서 수련?

처음 파그마의 검무를 얻었을 당시, 보법을 조금이라도 빠르고 부드럽게 연결하기 위해서 수련에 매진했던 사람이 바로 그리드다.

심지어 그에겐 피아로와 브라함의 속을 뒤집어 놓으면서까지 교육 받았던 경험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드는 수련이 지긋지긋했다.

게임 시간으로 장장 3년 동안 산속에 틀어박혀 수련했다는 크라우젤의 말을 들었을 때는 세상에 뭐 저런 독한 녀석이 다 있나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그리드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미 그대에겐 경험이 충족되어 있소. 굳이 허공에 삽질하지 않아도 일상의 모든 행동에 수련을 녹여낼 수 있지.”

“제가 대장일을 하고 전투하는 과정 자체가 수련이 된다는 말씀이신지?”

“그렇소. 단, 심기체의 조화를 깨지 않는 선에서.”

드디어 원점으로 돌아온다.

“여태까지 그대는 육체와 정신을 극한까지 혹사시켜 한계를 초월해왔을 거요.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무척 큰 경험이 됐을 테지. 안 그렇소?”

맞다.

대장일을 할 때도, 강적과 맞서 싸울 때도 그리드는 한계를 넘어왔고 그때마다 성과를 거둬 발전했다.

“하지만 이제 그대의 경험은 가득 찬 상태요. 한계를 넘는 경험이 불필요해졌지. 최근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을 돌이켜 보시오.”

“....”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이라면 당연히 양반들과 싸웠을 때다.

떠올려보는 그리드에게 아벨리오가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져왔다.

“당시에도 육체와 정신을 극한까지 혹사시켰을 그대가 얻은 건 뭐요?”

그리드의 머릿속에 불쾌한 기억들이 피어올랐다.

이십만대군 분쇄검, 혹은 잠재력 개방에 이은 삼십만대적검이나 5융합 검무를 사용하고 난 뒤의 자신.

스스로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해 전장을 무기력하게 바라봤었다.

양반들과 싸웠을 때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힘든 싸움을 할 때면 꼭 진이 빠져서 몇 초, 혹은 몇 분을 무력해졌었다.

“가눌 수 없는 몸과 그로 인해 동반되는 위험, 그리고 무력감과 절망감을 얻었겠지. 극한의 위기에 몰린 그대에게 경고를 보내기 바빴을 육체와 정신은 깨달음을 되새길 여유도 없었을 테고.”

“....”

아벨리오는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시험 중에 잠재력을 개방한 그리드의 모습을 단 한 번 본 것으로 그리드가 최근 겪어온 고난들을 완벽하게 통찰해냈다.

형용하기 힘든 전율을 느낀 그리드가 한동안 잠자코 있더니 이내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억울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토로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더 발전하고 싶으면 기껏 힘들게 얻은 기술들을 봉인하는 수밖에 없는 겁니까?”

이미 오래 전부터 위험성은 느끼고 있었다.

스킬을 쓰는 대가로 생명력과 스태미나를 잃고 팔이나 어깨가 부러지는 경험을 할 때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 싶었었다.

빌어먹을, 게임을 하는데 아파.

아파서 눈물이 찔끔찔끔 나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게임을 하냐고.

그리드는 단언했다.

팔이나 어깨가 부러질 때 발생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스킬을 남발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정말로 드물 거라고. 자신쯤 되니까 이 악물고 버틴 거지, 고통에 익숙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은 스킬을 봉인했거나 더러워서 게임 접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오. 기껏 힘들게 쌓아올린 기술을 봉해서야 그대의 그간 노력이 모조리 물거품 되는 거잖소. 그건 안 될 일이오.”

하지만 사실, 그리드가 겪어온 경험을 보통 사람은 겪지 않을 확률이 높다.

큰 고통이 동반되는 페널티가 있어야만 납득 가능한 데미지 계수를 지닌 스킬은 흔치 않을뿐더러, 보통 사람이 그만한 스킬을 얻을 때쯤이면 이미 기술을 감당할만한 육체를 완성한 후일 테니까.

“그대는 우선 심기체의 조화를 이뤄야하오.”

그리드는 너무 빠르게 성장해온 나머지 부작용을 앓았을 뿐이다.

“그대의 심과 체가 이미 완성됐음에도 불구하고 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대가 쌓아올린 기술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오. 그중에서도 근본적인 문제는 영웅왕의 투기지.”

“네? 투기요?”

영웅왕 칭호로 발생한 투기 자원은 그리드의 가장 큰 저력이다. 싸울수록 축적되며 축적될수록 그리드의 능력치를 끌어올렸다. 그리드의 체를 완성시키는데 일조한 근원인 셈이다.

심지어 투기는 다른 스킬이나 능력치와 상충하지도 않았다.

납득하지 못한 그리드가 뭐라고 반론하기 전에 아벨리오가 붓과 도화지를 꺼냈다. 그리고 도화지 위에 적자색 물감을 칠했다.

그리드가 몸에 은은하게 두르고 있는 투기와 꼭 닮은 색감이었다.

슥슥.

아벨리오는 붓을 멈추지 않았다. 적자색 물감 위에 계속해서 같은 색을 덧칠했고 급기야 도화지가 흥건히 젖어 찢어지기 일보직전이 되어서야 붓을 멈췄다.

“전대 검성 뮐러가 투기와 검기를 하나로 결합해서 운용했단 사실을 알고 있소?”

아벨리오가 도화지를 펄럭이자 찌직, 도화지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투기와 검기를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투기의 흉포함을 잠재우기 위한 일종의 억제 행위였소.”

“....!”

“투기는 신화적인 힘. 인간의 그릇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막대한 힘이오. 전설, 혹은 초월자라고 해도 투기에 계속 몸을 맡겼다간 혹사당할 뿐이지. 깨달음을 되새길 여지가 없어지는 게요.”

그리드가 영웅왕 칭호의 상세 정보를 불러왔다.

<영웅왕>

영웅 중의 영웅입니다. 살아있는 신화입니다.

‘이런....!’

떡하니 명시되어 있었다.

신화.

신화 클래스가 존재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던 과거에는 설명에서 논하는 신화를 일종의 은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화 클래스는 명백하게 존재하는 개념이었고, 그리드는 아직 신화가 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대는 우선 투기와 검기의 융합을 가능케 해야 하오. 보이지 않게 그대의 체를 좀먹고 있는 투기를 억누르고 역으로 온전한 힘으로 만들어야하지. 그때부터 그대의 기가 안정되고 심기체의 조화가 진행될 게요.”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4차 전직(각성) 공용 시스템 <깨달음>이 활성화 됩니다.]

<깨달음>

직업 고유 활동, 혹은 전투 시 지속적으로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투기> 자원으로 인해 현재 당신은 <깨달음>의 효과를 누리기 힘듭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는 대강이나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뮐러의 전진을 잇지 못했는데 이런 제가 무슨 수로....”

저벅.

마치 미로에 같인 것처럼 같은 구간을 반복해 걷던 아벨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단단한 벽을 손으로 슬쩍 밀쳐서 새로운 공간이 출현하게끔 만들었다.

5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였다.

아벨리오는 이미 진즉부터 그리드를 윗층으로 인도할 수 있던 것이다.

아벨리오의 배려를 눈치 챈 그리드가 조금 감동하는 그때였다.

“아닛! 그대는 그리드가 아닌가!!”

층계참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본 그리드는 비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성인 그가 검이 아닌 걸레를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아벨리오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이곳에는 뮐러의 스승이 있소. 간접적으로 기술만을 전수해줬을 뿐이지만 뮐러의 근간이 비반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게요. 선구자 그리드, 비반으로부터 투기와 검기를 융합시키는 법을 배우기를 추천하는 바이오.”

“네? 비반 님은 투기에 대해서 잘 모르는 눈치였는데....”

비반은 그리드와 대련까지 했지만 딱히 투기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다. 그에게 도움을 받으라니 솔직히 그리드는 별로 신뢰가 안 갔다.

고양이 자세로 요염하게 엎드려 걸레질 중인 비반의 모습부터가 썩 포스가 없었고.

하지만 비반은 자신만만했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도와주겠네. 그대의 품에서 느껴지는 광룡철의 기척을 보아 맡겼던 임무도 잘 해결하고 돌아온 눈치인데, 그에 대한 보답쯤으로 여기게나.”

“.....”

‘뭔지는 몰라도’ 도와주겠다고?

같은 결사인데 왜 이렇게 차이나는 거지?

아벨리오와 비반을 번갈아 쳐다보는 그리드의 표정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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