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15화
“정신력이 무척 강하네요.”
“음....”
지혜의 탑의 결사들은 과거를 살았던 존재들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들이 이제 와서 현재와 교류할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이 야기됐다.
우선 조국과 혈연 등, 속세의 개념에 얽매여 객관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지혜의 탑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이유다.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숭고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완벽한 독립성을 보존해야하는 지혜의 탑은 사람들에게 결코 노출되지 않았다.
그리드가 입구에서 목격한 지혜의 탑의 거대한 규모는 환영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당연하다.
은밀히 존재해야하는 탑이 그토록 무식하게 클 리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그리드가 탑의 규모를 ‘크다’고 인식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드가 목격한 환영은 그리드의 뇌리에 관념으로 박혀버렸다.
탑의 에너지원으로 작동하는 드래곤 하트와 대마법사들의 마법진이 그 관념을 실체화시켰으므로 그리드가 체감하는 탑 내부의 규모는 실제보다 수천, 수만 배 이상 거대한 상태였다.
그 규모에 위축된 그리드가 느끼는 두려움이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어둠의 평야’와 ‘오르고 올라도 무한히 연결되는 나선의 계단’을 현실화시키는 양분이 돼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평야를 보고도 위축되기는커녕 묵묵히 달렸다. 자신이 이 평야의 끝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이 그에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서서히 탑의 환영을 깨뜨렸다. 평야와 계단의 규모를 확장하기는커녕 실제처럼 축소시켰다.
5시간이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헤맸을 수도 있는 공간을 1시간 만에 주파해버린 비결이다.
“저런 식으로 1층을 돌파한 사람은 비반 이후 최초로군.”
지혜의 탑을 뒤덮고 있는 환영 마법은 무려 드래곤 하트를 자원으로 작동하고 있다. 절대적인 위력을 지녔으므로 그리드가 구분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리드의 오성이 뛰어난 편에 속했다면 탑의 규모가 크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다. ‘지혜의 탑이 이처럼 거대할 리 없다.’는 의심의 파편 하나만으로 그가 체험하는 탑의 규모는 축소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탑의 규모를 믿어버렸고 끝없는 평야와 조우했다.
방문자 중에 이토록 평범한 수준의 오성은 비반 이후 최초였다.
“네, 다른 모두는 고생 없이 쉽게 1층을 돌파했었죠. 이전 선구자였던 크라우젤조차도요.”
“조금 아쉽군. 하지만 덕분에 체(體)와 심(心) 모두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시간은 절약하게 되었어. 2층은 생략하고 3층으로 인도하도록 하게.”
“네.”
고개를 끄덕인 여성이 통신구를 활성화시키고 말했다.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신 걸 축하드려요. 바로 3층으로 이동해주세요. 당신의 기(技)를 확인하겠습니다.”
***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신 걸 축하드려요. 바로 3층으로 이동해주세요. 당신의 기(技)를 확인하겠습니다.”
여성의 음성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또렷했다.
하지만 2층에 도착해 멈춰 선 그리드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음성이 반복해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것도 딱 한 부분만.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신 걸 축하드려요.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신 걸 축하드려요.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통과...
“....훗.”
잠시 멍하니 있던 그리드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고개를 살짝 젖히며 입가에 큰 미소를 그리는 모습이 한창 중2병 심하던 시절의 라우엘을 연상시켰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을 제대로 입증했나보군.”
그리드가 한 일은 하나뿐이다.
1층을 돌파한 것.
하지만 안내자는 그리드가 이미 두 번째 시험까지 통과했다고 공표했다.
그리드가 착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자신의 실력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2번째 시험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착각.
사실은 부족한 오성 탓에 첫 번째 시험부터 심(心)을 증명했고, 이로 인해 두 번째 시험의 필요성이 사라진 거지만.... 어찌됐든 능력을 입증한 건 사실이니 착각이 큰 문제는 아니다.
“동대륙에서 구르고 온 보람이 있어. 후훗.”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실 그리드는 다소 긴장한 상태였다.
무려 드래곤과 싸우는 존재들.
그리드에겐 거의 절대자로 다가왔던 비반처럼 강력한 전대 전설들이 득실거리는 지혜의 탑은 무척 특별한 장소였고 그곳에서 치러야한다는 시험의 수준이란 난이도가 상당히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해볼 만하다.
하긴, 탑의 결사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선구자의 자격만 증명하면 되는데 시험이 어려워도 이상하다. 조금은 긴장을 푸는 편이 좋을 듯하다.
생각하며 심호흡한 그리드가 주변의 풍경을 둘러봤다.
신기했다.
1층은 규모를 측량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던 반면 2층의 규모는 매우 평범했다. 면적은 50평 남짓에 불과했고 천장만 높아 여느 성의 다락방쯤 되는 느낌이었다.
‘2층은 구획이 여러 개로 나뉜 건가?’
생각하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갱신되고 있었다.
[금지 당했던 스킬과 마법의 사용이 다시 가능해집니다.]
[장비와 소모품 등, 보유 중인 아이템 전부가 사용 금지됩니다.]
[사고를 대비해 능력치가 조정 됩니다.]
[근력, 체력, 민첩성, 지력 스탯이 각 300으로 하향되었습니다.]
[근력과 민첩성의 황금비 효과가 사라집니다.]
‘역시....’
근력과 민첩성의 황금비를 확인하고 얼마지 않아서 그리드는 묘한 의구심을 품었었다.
그동안 스탯의 황금비는 왜 알려지지 않았던 걸까?
물론 여러 가지 요인으로 실시간 변화하는 것이 스탯이라지만, 특히 저레벨 구간에서는 근력과 민첩의 비율을 1대1로 맞추기 쉽다.
20억 유저 중에서 족히 수천 만 명은 근력과 민첩의 1대1 비율을 한 번쯤 달성해봤을 것이다.
한데 황금비에 대한 정보는커녕 소문조차 없었다고?
그리드가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2개였다.
첫째, 스탯의 황금비는 레벨 구간에 따라서 다르다.
예를 들어 스탯 비율이 동일하더라도 200레벨 구간에선 황금비가 발생하지 않고 300레벨, 혹은 400레벨 구간부터 황금비가 발생한다.
둘째, 스탯의 황금비는 스탯의 수치의 영향을 받는다.
스탯이 1,000 단위일 때는 황금비가 발생하지 않고 2,000, 혹은 3,000 단위가 돼야 황금비가 발생한다.
이런 식의 변수가 있지 않은 이상 그동안 황금비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한데 이제 보니 황금비는 스탯의 수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이러다가 스탯이 더 오르게 되면 또 새로운 황금비를 찾아야한다는 말인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언제 닥쳐올지 모를 미래를 미리 걱정해서야 괜한 정력 낭비다.
상념을 지운 그리드가 눈앞에 나타난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검, 도, 창, 활, 화살, 둔기, 너클, 쌍절곤 등 수십 종의 무기가 진열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안내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용할 무기를 선택해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잠시 고민해본 그리드가 검과 창, 활과 화살을 챙겼다.
안내자는 딱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수십 종의 무기를 완벽하게 다루는 달인이 탑에는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3종의 무기를 다룬다고 해서 특별하거나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텅!
안내자의 신호와 함께 천장이 열리더니 사람 하나가 떨어졌다.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중년인이었다. 곧게 뻗은 눈썹과 맑은 눈동자, 그리고 단정한 옷차림과 올곧은 자세.
전체적인 인상이 명망 높은 학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실제로 무기도 소유하지 않았다.
“선구자 그리드, 만나서 반갑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조금도 낯설지가 않군.”
“....?”
낯설지 않다고?
설마 어떤 마법을 이용해서 나를 관찰해왔던 걸까?
‘광룡철에 대한 것도 이미 파악한 거 아니야?’
광룡철 회수 퀘스트는 수포로 돌아가는 건가?
탐욕을 회수 당하면 어쩌지?
“지난 몇 달 동안 변소에 갈 때마다 그대의 이름을 듣느라 고역이었거든.”
“네? 변소요?”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드에게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소. 흠, 일단 시험을 시작하도록 할까. 내 이름은 아벨리오. 붓으로 세상을 그려온 탑의 7좌외다.”
“....?”
붓으로 세상을 그려왔다?
그리드가 아벨리오의 직업을 유추했다.
마침 도화지를 펼친 아벨리오가 붓을 꺼내 물감을 묻히고 있었다.
‘화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삐까소의 지존도(至尊圖)를 목도한 시점부터 화가의 저력을 파악했던 그리드가 긴장하며 목검을 고쳐 쥐었다.
도화지 위에 점을 찍은 아벨리오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해칠 생각 없으니 긴장을 푸시오. 공격은 그대의 특권이며, 나는 단지 막아낼 뿐이니 안심하고 집중하시오.”
더없이 친절한 말투.
확실히, 탑의 결사들은 선구자 그리드를 존중하고 있었다.
깨닫고 긴장을 완화시킨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갑니다.”
텅-!
느리다.
모든 신체 능력이 10배 가까이 떨어진 그리드의 인지가 육체의 속도를 초월한다.
온 몸에 족쇄가 채워진 기분.
그리드는 이 답답함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연(聯)!”
파그마의 검무, 검호 파그마의 검무, 그리고 그리드의 검무에 이르기까지.
검무가 발전함에 따라서 연 또한 변화를 거듭해왔다.
연은 이제 속도라는 개념에 구애 받지 않았다.
그리드의 민첩성이 어떻든지 간에 일단 발동하는 순간 무조건 1초에 20회의 검격을 날린다.
핏-!
피피피피피핏!!
느릿하게 달려온 그리드가 급속도로 빨라져 휘두르는 검격에 휩싸인 아벨리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괜찮군.”
촤학-
아벨리오가 붓을 털었다. 그러자 도화지 위에 물감이 뿌려졌고 정확히 20개의 결이 그려졌다.
동시에.
쩌저저저저저정!!
도화지 바깥으로 튀어나온 20개의 결이 그리드가 날린 20개의 검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림에 의도를 싣고, 그것을 실체화시키는 능력.
오러 마스터 휴렌트와 망상가 흑요를 연상시키는, 정말이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화가의 능력에 경탄한 것이다.
아벨리오 또한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리드는 눈치 채지 못한 사실이지만, 아벨리오의 고개는 1센티미터 가량 돌아가 있었다.
그리드의 공격이 일으킨 기류를 타고 발생한 바람의 칼날을 피해내기 위한 동작이었다.
‘이건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좋군. 비반이 이자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즐거워했던 이유가 있었어.’
그리드가 1초 동안 검을 휘두른 횟수가 정확히 20회임을 ‘눈으로 읽은 뒤’ 딱 그에 맞춰 반응했던 아벨리오는 자신이 그리드를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자칫했다간 바람의 칼날에 뺨을 베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그리드는 락(落)을 연계하고 있었다.
연의 기세로 파고들 수 있었던 공간을 그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쩌엉!!
아벨리오가 도화지에 급히 그린 ‘선’이 락의 출수를 막았다.
“....!”
아무리 민첩성이 떨어진 상태라지만 즉발기에 반응하다니?
당황하는 그리드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검무에 브라함식 마법이 깃들지 않았다면.
즉, 연으로 인해서 윈드 커터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벨리오는 이렇게까지 진지하지 않았을 거고 락에 대한 반응이 다소 늦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머리카락 정도는 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윈드 커터에 베일 뻔한 아벨리오는 그리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 또한 좋은 기술이오.”
‘좋다.’라는 평가는 아벨리오가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평가였다.
전설이 된지 20년도 채 안 되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훌륭하다는 극찬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으니까.
“파(派)!”
“나쁘지 않아.”
“살(殺)!”
“괜찮군.”
“극(極)!”
“좋소.”
“화(花)!”
“이건 실망인걸.”
“초연화(超聯花)!”
“....흠?”
“연살화극(極殺花落)!”
“제법....!”
편하게 선 채 그리드를 평가하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던 아벨리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처음으로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무수히 흩날리는 꽃잎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배경에 위협을 느낀 그가 반사적으로 세상을 ‘덧칠’했다. 물통에 가득 들어있던 물감을 허공에 뿌려 그리드가 만든 풍경을 덮어버렸다.
[연살화극(極殺花落)이 소멸하였습니다.]
‘뭐라고?’
기껏 화에 초연화를 거쳐 연계시킨 4융합 검무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파쇄 당하다니?
경악하는 그리드에게 아벨리오는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훌륭하군....”
극찬.
아벨리오 본인은 자신이 이런 평가를 내리게 될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기대에 차올랐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는 만족하지 못했다.
고작 물감을 뿌려서 궁극기를 지워버려 놓고 훌륭하다고?
‘놀리나!’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잠재력 개방을 썼다. 그는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아벨리오에게 어떻게든 한 방 정도는 먹여주고 싶었다.
한데.
“이건 안 좋소.”
처음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아벨리오가 도화지에 해일을 그려 그리드를 휩쓸리게 만들었다.
“어푸...!!”
그림을 실체화시키는 능력부터가 사기인데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감당이 어렵다. 휴렌트가 오러를 형상화시킬 때 발생하는 딜레이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갑자기 닥쳐오는 해일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그리드가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물론 능력치가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면 천하의 아벨리오도 저토록 느긋하게 그림을 그릴 순 없었을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능력치가 떨어진 상태로 치르는 시험이다. 이 상태에서도 뭔가를 할 수 있음을 증명하라는 것이 시험의 목적일 텐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니 답답했다.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해일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스피어 샷을 전개한 그리드가 아벨리오를 향해 창을 투척했고, 아벨리오가 이를 피하기 위해 잠시 도화지에서 시선을 떼는 순간을 노려 삼십만대군 잠행검의 사용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벨리오는 도화지를 보지 않고도 붓질을 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노끈을 그려 그리드의 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젠장....!”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그리드가 분해하는 그때 아벨리오의 침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와 심에 부담을 주는 기가 너무 많아 육신과 정신이 갉아 먹히고 있군.... 발전하기 위해선 교정이 필요하겠는데.... 흠, 쉽지 않겠어.”
“....!”
그리드는 직감했다.
이건 레벨 성장에 대한 단서가 분명하다.
안내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3번째 시험에 통과하신 걸 축하드려요. 선구자 그리드, 지혜의 탑은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