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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11화 (1,101/1,794)

템빨 57권 - 14화

“아그너스....!”

100인의 강자 아니, 10인의 강자를 논할 때도 가장 끝에 언급되는 인물.

광견 아그너스.

그는 무려 지존 그리드, 검성 크라우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Satisfy 최대의 거물이었다.

“뭘 멍청하게 서있는 거지? 귀찮게 굴지 말고 약 내놓고 꺼져.”

아니, 최대보단 최악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의원 헤라는 전투에 문외한이었고 별 관심도 없었지만 아그너스의 악명은 셀 수 없이 많이 들어왔다.

사냥터에서 마주치는 플레이어를 모조리 학살하고 사냥터를 독점한다거나, NPC들을 전멸시켜 해골 병사로 부린다거나 하는 등의 비상식적, 비윤리적인 사건을 일상처럼 일으키는 악당.

최근에는 인류 최대의 적인 대악마들과 엮였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도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워낙 별세계 인물인데다가 불쾌한 소문만 가득해 그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어본 적은 없다.

꿀꺽.

아그너스의 텅 빈 금안에 소름 돋는 위압감을 느낀 헤라가 마른 침을 삼켰다.

팔다리가 벌벌 떨린다.

이건 실제적인 공포.

아그너스가 일으키는 상태이상이었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의 계약자이자 마계의 귀족인 아그너스는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대상을 공포로 마비시키는 패시브 스킬을 개화시켰다.

아그너스와 헤라가 대치 중인 그때.

“하핫...! 하하핫! 작별이다! 이 지긋지긋한 생활과도 안녕이야!!”

연신 해방을 외치던 의뢰인이 급기야 대소를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발로 차 넘어뜨린 아그너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침대 위 소년에게 소리쳤다.

“파울드 님! 어서 제게 건 족쇄를 풀어주십시오! 장장 31년 동안을 오직 당신만을 위해 봉사한 제게 자유를 보상해주소서!!”

‘31년?’

채 15세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에게 31년이라는 세월을 논하다니?

부자관계가 아닌 것을 넘어서 여러모로 기이하다.

불길함을 느낀 헤라가 침대로부터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스르륵.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소년이 눈을 뜨고 있었다.

일생동안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것처럼 창백한 피부와 상반되는 새카만 눈동자가 가만히 천장을 응시한다.

“....좋군.”

흡족한 표정을 짓는 소년의 상체가 서서히 직각으로 솟구쳤다. 그대로 떠올라 샹들리에와 가까이 선 그가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움직였다.

“가벼워. 인간 시절과 똑같이 움직일 수 있다. 혈액을 대체하는 곤륜삼의 영기가 메말라 있던 오장육부에 활력을 심어주는구나.”

‘인간 시절?’

저 소년이 설마 진짜로 리치라고?

헤라의 떨리는 시선이 아그너스에게 향했다.

이 의문을 어서 해소해달라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아그너스는 헤라를 언제라도 잡을 수 있는 토끼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퀭하니 죽어있던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낸 그가 오직 허공의 소년만을 주시한 채 질문했다.

“그 말이 사실이냐? 인간이 된 것 같다고?”

“대부분의 감각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곤륜삼을 지속적으로 섭취해야할 것 같군. 한데....”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명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던 그의 이름 ‘파울드’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대들은 누구지?”

“저, 저는 탕약을 제조해온 의원....”

금빛 이름을 보고 위축된 헤라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반면,

“그럼 어서 방금 먹은 약을 토해내라.”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아그너스는 여전히 빛나는 눈동자로 해괴한 소리를 지껄였다.

파울드가 귀를 의심했다.

“약을 토해내라고....? 청각 기능이 손상된 건가? 내가 보존 마법을 잘못 걸었을 리 없는데?”

“파, 파울드 님! 우선 제 족쇄를....!”

“체통을 지켜라, 할테츠. 네가 비록 수천 명의 사람을 학살한 악인이라 할지언정 근본은 마법사가 아니더냐. 이성과 냉정은 마법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덕목이고 자존심이다.”

“네, 네.... 죄, 죄송합니다.”

“그래서 저 사내의 신분은 뭐지?”

“으, 음?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지?”

‘세뇌 마법?’

몸종의 상태가 온전치 않다는 사실을 파악한 파울드가 그윽한 시선으로 아그너스를 더듬었다.

동시에 아그너스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대마법사 파울드의 마력이 당신을 관조합니다.]

[당신의 지력과 마나 수치가 파울드에게 공개됩니다.]

[파울드의 아티팩트 <부조리의 눈>이 당신을 관조합니다.]

[당신의 능력치와 스킬 일부가 파울드에게 공개됩니다.]

파울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바알의 계약자라고?”

파울드는 브라함 시대에 활동했던 대마법사다.

희대의 천재 브라함의 높은 벽을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던 그는 영원한 2인자, 혹은 비운의 천재라고 불리며 당대 사람들에겐 동정의 대상이 됐었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가 만든 아티팩트들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워 인류를 이롭게 하였으니까.

소위 희대의 발명품이라고 불리는 마도구 상당수가 파울드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의외로군.... 그토록 신중을 거듭해 활동해왔건만 꼬리를 밟히다니....”

마법사가 스스로를 리치로 만들 때 필수적으로 밟는 절차가 있다.

육신을 부패시켜 마나핵과 백골만을 남기는 것이다.

형(形)을 버리고 마나라는 정신체로 거듭나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부패할 육신에 애써 집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보존 마법을 유지하면 육신의 부패를 막을 수 있었지만, 굳이 왜?

보존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선 체내의 혈액을 모두 빼낸 후에 마나를 주입해서 육신의 형태를 유지해야한다. 극한의 고통을 감내해야함은 물론이고 막대한 마나가 지속적으로 소모됐다. 마법의 연구에 큰 제약이 생긴다는 뜻이다.

궁극의 마도를 추구하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의 입장에선 굳이 감당할 이유가 없는 페널티였다. 그들에게 육신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했고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단, 파울드는 경우가 조금 특이했다.

그가 리치가 된 이유는 단지 ‘미래’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만든 마도구들이 미래에는 어떤 식으로 쓰이고 있을까? 후인들은 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어쩌면 나의 의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진 않을까?

스스로의 발명품에 큰 자부심을 지닌 파울드는 단지 그게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리치가 되었고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마나와 정신력을 소비해왔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는 발전하지 못했고 다만 주기적으로 눈을 떠 잠자리를 바꿔왔다. 또한 잠자리를 바꿀 때마다 자신을 관리해줄 몸종을 구해 족쇄를 채워 곁에 두며 곤륜삼 탕약의 제조법을 넘겨줬다.

그리고 바로 오늘.

곤륜삼을 복용한 파울드는 드디어 보존 마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앞으로는 지속적으로 마나를 소비할 일도 없었고, 마나의 소비를 늦추기 위한 수면의 필요성도 잃었다.

리치이되 인간의 모습을 갖춘 그는 이제 당당히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작품들이 만들어낸 미래를 느긋하게 감상할 차례였다.

그래, 드디어 목표를 이뤘다.

한데 이 순간 바알의 계약자가 나타나다니?

망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죽음의 룬>이 아그너스에게 있음을 엿본 파울드가 신중하게 말했다.

“원하는 것을 똑바로 말해라. 단지 곤륜삼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궁극적으론 나를 수거하는 게 목적인지.”

“곤륜삼을 내놔. 그러면 돼.”

[바알의 심복 ‘체파르데아’가 분노합니다.]

-개골! 파울드를 수거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관심 없어.”

딱, 어깨 위에 앉아있는 작은 개구리를 손가락으로 때려 날려버린 아그너스가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는 <리치 파울드 수거>다.

본래는 진행할 생각조차 없던 퀘스트였다.

아그너스에게는 연인 루나와 보낼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체파르데에게 곤륜삼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턴 좌시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이곳은 방문했고, 작금의 상황에 직면했다.

“너 따위에겐 관심 없으니까 어서 약을 내놓으라고!!”

파울드가 답이 없자 조급함을 느낀 아그너스가 언성을 높였다. 흥분할 때의 습관인지, 히죽히죽 입 꼬리를 올리며 몸을 떠는 꼴이 영 보기 별로다.

눈살을 찌푸린 파울드가 설명했다.

“이미 복용한 약은 내게 완전히 흡수됐다. 네게 줄 수 있는 약은 아직 복용하지 않은 하나뿐이지.”

“킥킥! 네 배를 갈라 뒤져보면 남아있는 약 기운을 찾을 수 있겠지! 그냥 뒤져!!”

“꺄악!”

칼을 뽑아 쥔 아그너스가 데스나이트를 소환하자 깜짝 놀란 헤라가 비명을 질렀다.

반면 파울드는 차분했다.

“네가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진 모르겠다만 설령 내 배를 갈라 약을 빼앗아가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양일 것이다. 너나, 나나 더 많은 약을 조제해야해.”

“....”

“어때? 약의 조제법을 넘길 테니 직접 동대륙을 방문할 생각은 없나?”

불완전한 존재는 다루기 쉬운 법.

몸종으로 써온 할테츠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파울드는 아그너스를 잘 구슬려 통제할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 그나마 이성이 존재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발생한 오판이었다.

“널 죽이면 조제법을 드롭하는 거 아니야?”

“....?”

“널 죽여서 시체를 샅샅이 뒤져주지. 큭큭.”

“....!”

콰르르르릉!!

폭발하는 고성의 외벽 바깥으로 파울드의 몸이 튀어 올랐다. 황급히 실드를 전개해 데스 나이트들의 공격을 막던 그가 아차 놀랐다.

성쪽에서 무지갯빛의 마력이 폭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 무무드?”

콰아아아아앙!!

***

“음....”

랭킹 1위용 전용 사냥터가 생겼다.

지슈카에겐 대충 그렇게 설명한 뒤 지혜의 탑을 찾아온 그리드가 탑에 입장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탐욕. 정확히는 ‘광룡철’을 재료로 만든 아이템은 모두 착용 해제한 상태다.

현재 그리드는 아직 청룡의 부츠를 제작하기 전 단계에 착용했던 아이템들을 무장하고 있었다.

인벤토리 한쪽에는 미리 조각내 놓은 광룡철 몇 개가 똑바로 자리를 잡고 있다.

‘좋아.’

<탑의 임무>

★히든 퀘스트★

지혜의 탑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싸우는 비밀 결사 조직입니다.

그들의 주된 역할은 드래곤이라는 재앙을 억제하는 것에 있습니다.

탑에 협조하여 광룡철의 주인을 찾아주십시오!

퀘스트 수락 보상:1,000골드. 최상급 버프 물약 각 20개.

퀘스트 클리어 조건:광룡철의 주인으로부터 광룡철 탈취, 혹은 광룡철의 주인을 말살.

퀘스트 클리어 보상:용의 비늘(속성 랜덤)

무려 드래곤들을 상대로 세계를 수호하는 탑의 결사들.

그 대단한 초월자들조차도 난색을 표하는 것이 이번 광룡철 사건이다.

하지만 그리드 입장에선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다름 아닌 그리드 본인이 광룡철의 주인이었으니까.

‘용의 비늘의 성능을 봐서 브라함과 새로운 광물을 창조할 때 재료로 추가하던가 하는 편이 좋겠지?’

당연히 깰 수 있는 퀘스트를 받았을 때 느꼈던 그 짜릿함이란....

싱글벙글 미소지은 그리드가 드디어 탑에 입장했다.

[선구자의 자격으로 지혜의 탑을 방문하였습니다.]

[1층입니다.]

‘왜 이렇게 어두워?’

외부에서 본 탑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사냥한 드래곤의 시체를 보관하기 위해선지 면적은 제국의 성보다 넓었고 높이는 하늘을 꿰뚫을 정도였다.

이를 통해 그리드는 탑의 내부 풍경을 당연히 웅장하고 멋질 거라고 예상했었다. 혹시 아주 어쩌면 안목 스킬이 개화하진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도 품었다.

하지만 실제로 탑에 입장하자 그를 기다리는 것은 캄캄한 어둠 뿐이었다.

정말로 한치 앞도 보이지가 않았다.

초월자의 감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환영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리드가 슬슬 어둠에 적응할 때였다.

친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더니 내부의 전경이 그리드의 시야에 펼쳐졌다.

끝을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평야가 보였다.

“선구자의 자격을 증명해주세요. 우선 당신의 체(體)를 시험해 보겠습니다.”

[모든 아이템과 스킬, 마법의 사용이 금지 됩니다.]

“2층까지 뛰어오세요. 제한 시간은 5시간입니다.”

“....?”

아니, 염병.

손님이 왔으면 얼굴이라도 좀 보여주던가.

자신들도 어쩌지 못한 퀘스트를 해결(?)하고 찾아온 은인(?)한테 다짜고짜 똥개 훈련을 시킨다고?

그리드는 불쾌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혜의 탑의 시험을 거부할 배짱이 그에겐 없었다.

‘젠장,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순종적인 사람이 된 거지?’

근데 왜 제한 시간이 5시간이 되는 걸까?

채 1시간도 되지 않아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한 그리드가 계단 앞에 서서 물었다.

“여긴 2층으로 가는 길 아닌가요?”

“....”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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