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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10화 (1,100/1,794)

템빨 57권 - 13화

라인하르트는 대륙 최대 규모의 대장간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수천 개의 굴뚝에서 쉬지 않고 매연이 뿜어졌으니 본래 라인하르트의 풍경은 산업혁명 시절의 영국을 방불케 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에는 스틱세이가 있다.

정령술의 대가인 그는 바람의 정령들과 협력해 라인하르트의 공기를 실시간으로 정화시켰고, 덕분에 라인하르트의 공기와 하늘은 늘 맑고 쾌청했다.

“그랬더니 얀페이 양이 말이죠…….”

푸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황금색 밀밭.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리드와 함께 걷는 아이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리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도 기뻐 보였다.

‘어쩜 이리도 착할까.’

홀로 외롭고 쓸쓸했을 텐데 오직 즐거웠던 일, 행복했던 일만을 이야기하는 아이린의 성품이 그리드의 마음에 새삼 차갑게 와닿았다.

어느덧 13살이 된 로드가 증명하는 세월의 흐름.

이를 혼자 짊어진 아이린이 본인의 불안과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자 홀로 애쓰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그리드를 엄습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혼자 울고 있을 사람이다.’

아이린은 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머니로서, 왕비로서의 아이린이다. 야탄교에 납치당한 경험이 있는 그녀는 특히 고독과 불안에 취약했다.

“…….”

문득 입을 다문 아이린이 그리드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리드의 시선이 자신의 눈가에 새겨진 희미한 주름을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어색한 표정으로 눈가를 가리는 그녀의 턱을 그리드가 붙잡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주름을 어루만지며 맹세했다.

“우리는 같은 세월을 살아가게 될 거요.”

“전하……?”

“그대를 외롭게 만들지 않겠소.”

베리드의 인피면구의 내구력은 아직 8이 남았다.

아이린에게 신격을 부여할 기회가 최소 8번 이상 남았다는 뜻이다.

아이린의 모습으로 반드시 새로운 신격을 쌓으리라.

다짐한 그리드가 아이린과 깊은 포옹을 나눴다.

***

“와, 누구 아들인지 몰라도 진짜 장하네.”

레베카교의 행사에 참가하기로 했다는 아이린을 일별한 후.

로드를 만나고자 수련장을 찾아온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이제 몇 달 후면 14살이 되는 로드의 상태창이 예사롭지 않았다.

검술, 궁술, 창술, 체술을 비롯한 기본 전투 스킬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물론이고 다루카의 술법, 정령술, 란스티어의 술법 등의 특수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다. 심지어 안목과 현자의 지혜처럼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패시브 스킬의 등급까지 오른 상태였다.

스틱세이의 교육을 받아 쌓아 올린 지식 스탯과 아이린의 훌륭한 훈육이 크게 작용한 듯했다.

‘근데 압도적인 매력 스킬의 등급은 왜 올랐지?’

물론 매력은 후천적으로 가꿀 수 있는 개념이긴 하다.

언행과 표정을 교정하고 외모를 치장함으로써 스스로의 매력을 올리는 건 누구나 다 시도하는 일이었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드가 지닌 압도적인 매력은 보통의 매력이 아니다. 스탯이 아닌 스킬로서 기본 등급이 S였다.

이미 S등급일 때부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호감을 독차지했건만 SS등급이 되다니, 썩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저러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리드의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카심만큼이나 능숙하게 그림자를 다루는 살신 페이커의 등장이었다.

“로드의 곁은 템빨그림자단이 지키고 있으니까 걱정 마라.”

페이커는 오직 스스로의 단련과 템빨국의 보위만을 위해 활동해 왔다. 란스티어의 정수를 습득하고 급성장 중인 그는 누가 뭐래도 템빨국의 최종 병기였다.

템빨국 소속 플레이어 중 페이커보다 뛰어난 대인전 실력을 갖춘 사람은 그리드가 유일할 정도.

그가 로드의 곁을 지켜 주는 이상 그리드는 안심할 수 있었다.

“항상 고마워.”

“스스로 자처해서 맡은 역할이다.”

믿고 맡겨 주는 네게 오히려 내가 고맙다…….

페이커는 덧붙이고 싶었지만 민망해서 관뒀다. 잠시 무뚝뚝하게 침묵하더니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동대륙에서 모아 온 청룡의 숨결로 페이커에게 청룡 세트부터 만들어 줘야겠군.’

다짐한 그리드가 곧 자신을 발견하고 뛰어오는 로드를 목말 태웠다. 그리고 한참을 웃고 떠들며 식당으로 향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묘한 이질감의 정체가 뭘까?

“그때 수애 이모가 제게 말씀하셨어요.”

“그랬더니 수애 이모께서.”

“수애 이모가…….”

…한수애.

설마, 아니지?

제발, 부디 아니길 바라며 식사를 마친 그리드는 오래간만에 로드와 함께 대장간을 방문했다.

그리고 잠재력 개방을 전개, 신에 버금가는 대장장이 실력을 뽐내어 장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로드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날 만들어진 청룡 세트의 주인은 페이커였다.

***

“이게 다야?”

“네.”

“역시는 역시군…….”

베리드의 인피면구의 무궁무진한 활용법을 알게 된 그리드는 인피면구를 영원토록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수리 불가>라는 인피면구의 페널티를 어떻게든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대현자 스틱세이와 지공 브라함조차도 그리드에게 딱히 어떤 조언을 해 주진 못했고, 결국 그리드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가죽 장인들에게 매달려 보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라우엘이 수소문해 모은 장인들과의 대담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얼굴 가죽으로 만든 대악마의 작품을 감히 어떻게 해 볼 엄두조차 못 냈다.

‘내가 조심해서 사용하는 수밖에.’

아쉬움을 달랜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국하고 5일이 채 되지 않아 또다시 떠나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지난 5일 동안 일만 했다. 템빨단원들이 국대전에서 가져온 숨결들을 재료로 주구장창 아이템만 만드느라 전혀 쉬지 못한 상태였다.

하여, 라우엘은 그리드에게 며칠 쉬라고 종용하고 싶었다. 새로 정복한 영토를 한 번 둘러볼 기회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라우엘이 배려하고 있단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그리드가 미소 지었다.

“다음에 돌아오면 새 영토부터 시찰하자. 이번엔 미안하다. 너도 알다시피 너무 바빴어.”

구 가우스 왕국령의 민심은 아직 최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템빨단원들과 아스모펠이 노력하곤 있었지만 새로운 국왕이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으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당연히 그리드도 사정을 알고 있었고 방관할 생각이 없었다.

도시 민심이 높아야만 자원과 인구 생산력이 올랐으니까.

“알겠습니다. 레벨 문제를 잘 해결하고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잘 다녀오세요, 아바마마.”

“과자를 좀 구워 봤어요. 피로하실 때 하나씩 챙겨 드세요.”

“무쌍하시길.”

“다녀올게.”

가족과 친구들의 배웅을 뒤로한 그리드가 궁전을 떠났다.

의외의 인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또 모험이야?”

그리드 없는 한국을 종합 순위 1위로 만든 국대전의 영웅들.

다름 아닌 유라와 지슈카였다.

그리드가 떠날 거라는 소식을 접한 그녀들이 달려온 용건은 간단했다.

“우리도 함께 갈게요.”

양반들의 강함을 그녀들은 직접 체험한 바 있다.

그리드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적들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목격한 그녀들의 입장에서 그리드를 또다시 홀로 떠나보낸다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지 않을 자신감도 있었고.

하지만 그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의 마음이 고맙고 그녀들의 실력이 큰 도움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이번 목적지는 공교롭게도 지혜의 탑이다.

오직 선구자의 방문만을 허락하는 장소였으므로 동료를 데려갈 순 없었다.

설명을 들은 유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반면 지슈카는 파르르 치를 떨었다.

“랭킹 1위만 갈 수 있는 장소가 있었어? 으으, 부럽네.”

지슈카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드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최고가 되고 싶다는 야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자신이 지존이 되어 그리드가 자신에게 의지하게끔 만드는 것이 그녀가 그리는 최고의 이상이었다.

그리드를 무릎 위에 앉혀 두고 마음껏 주물럭거리고 싶…….

“…흠흠.”

의식의 흐름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자 얼굴을 붉힌 지슈카가 헛기침했다. 그리고 예의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만면에 그리고 선언했다.

“조만간 내가 랭킹 1위를 뺏어서 탑인지 뭔지를 독점할 거야. 그리드 너는 그때까지만 실컷 꿀 빨아 놓고 있으라고.”

“하하, 그래…….”

다음 선구자의 자격은 랭킹 1위가 아닌 ‘최초의 500레벨 달성자’다. 하지만 기껏 의욕을 불태우는 지슈카에게 굳이 태클을 걸고 싶지 않았던 그리드는 잔말 않고 자리를 떠났다.

곧 지슈카와 단둘이 남게 된 유라가 그녀를 무심하게 노려봤다.

“나보다 약한 당신이 랭킹 1위요?”

“오늘 저녁은 그리드네 집에서 된장찌개 먹어야지.”

“…바로 옆에 산다는 이유로 너무 자주 놀러 가네요?”

“응~ 어제 저녁은 삼겹살 먹었…….”

지슈카는 더 이상 놀리지 못했다.

마력의 탄환을 장전한 유라가 그녀에게 총구를 겨눴기 때문이다.

“뭐, 뭐야! 억울하면 너도 그리드네 옆집으로 이사 오든가! 다짜고짜 총부터 들이대는 미친X이 세상에 어디 있……! 꺄악!!”

“와, 저 폭주기관차가 꼼짝을 못하네.”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지슈카와 묵묵히 그녀를 뒤쫓는 유라의 모습을 발견한 템빨단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체다카 출신 단원들이 말하는 폭주기관차란 당연히 지슈카였다.

그들이 아는 지슈카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 유라에겐 한 수 접어 두는 눈치라 놀라웠다.

뭐, 유라의 별명이 마녀였다는 걸 감안해 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닌 듯하지만…….

“…그리드, 죽지만 마라.”

하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여자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니, 난놈은 난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

곤륜삼으로 제조한 탕약을 품에 꼭 끌어안은 헤라가 고요하고 음습한 마을 어귀에 진입했다.

마을의 이름은 란테토.

아들을 살려 달라고 부탁한 의뢰인의 성이 있는 곳이다.

‘설마 사계절 내내 안개가 끼어 있는 거야?’

반년 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득 찬 안개에 가려지는 시야에 흉가들의 모습이 잡힌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다. 단 하나도.

“으으…….”

푸드득, 지나가는 박쥐 소리에 놀란 헤라가 울상을 지었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그만큼 이 작은 마을의 풍경은 기이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헤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개 너머 존재하는 고성을 똑바로 시야에 담은 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저곳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었으니까.

“흡……!”

간신히 언덕을 올라 고성 앞에 도착한 헤라가 숨을 고르다가 놀라 얼어붙었다.

노크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린 까닭이다.

끼이익, 낡은 경첩 소리가 헤라의 등골을 더욱 오싹하게 만드는 가운데 의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을… 구해 오신 겁니까?”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

너무 투명해 감정을 읽기 힘든 벽안.

의뢰인은 사람이 아니라 영화에서 묘사되는 뱀파이어를 꼭 닮아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면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날 것만 같았다. 만약 이곳이 템빨국 근처였다면 뱀파이어였다고 확신했을 정도다.

하지만 다행히 이곳은 템빨국과 천 리 이상 떨어진 장소였고 의뢰인의 이빨은 뾰족하지도 않았다.

그래, 사람이다.

죽어 가는 아들의 곁을 지키느라 초췌해진 아버지의 모습이다.

“네, 구해 왔어요. 반드시 효과가 있을 거예요.”

“오오……. 자, 어서 들어오시죠.”

의뢰인이 앞장서 2층으로 올라갔고 헤라가 그 뒤를 따랐다.

드디어 아들을 살릴 수 있단 사실에 기쁜 것인지, 의뢰인의 발걸음은 무척 빨랐다. 거의 달리는 수준이었다.

“의뢰인의 말씀대로 여러 회 복용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을 조제해 오고 싶었어요. 하지만 곤륜삼 자체가 귀해서 2회분밖에 조제하지 못했어요.”

곧 환자가 있는 방에 도착한 헤라는 지체하지 않았다. 설명하며 곧장 탕약을 꺼내 잠들어 있는 소년의 입가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두근……!

멈춰 있는 듯했던 소년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적막했던 방에 울려 퍼졌다.

의뢰인이 오열했다.

“흑……! 흑흑흑! 드디어……! 드디어 해방이야!!”

“……?”

해방?

표현이 다소 이상하다.

헤라가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 귓전에 아주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리치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줄이야. 강시조차 살려 내는 약이 있다더니 진짜였군.”

“……!”

고개를 돌려 본 헤라가 경악했다.

녹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비쩍 마른 사내…….

플레이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거물 중의 거물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연신 해방을 외치며 오열하는 의뢰인을 귀찮다는 듯이 옆으로 치운 그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진 금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남은 약을 내놔.”

“아그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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