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12화
“단테 공, 좋아 보여서 다행이군요.”
그리드가 왕좌에 앉는 순간 궁궐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주인 잃은 왕좌가 연출했던 쓸쓸함이 걷히고 전율적인 위엄이 공간에 가득 찼다.
마른 침을 삼킨 단테가 공손히 대답했다.
“대현자 스틱세이 님의 말씀에 따르면 템빨국의 정기와 제 체질이 잘 맞는다고 합니다. 특히 라인하르트의 수질이 뛰어나 물의 정령과 상성이 좋은 제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진단하셨습니다.”
“그게 건강과 젊음을 되찾은 비결이다?”
단테는 노년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그리드를 만났다.
백태 낀 눈과 세월이 쌓은 아집으로 뿌예진 시야 탓에 그리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었다.
가벼운 언행과 상반되는 위엄, 젊음 뒤에 숨긴 연륜, 도발적인 눈빛에 깃든 통찰.
무엇 하나 확실히 엿보지 못한 채 막연히 대단한 분이겠거니 생각해왔을 뿐이다.
“정확히는 전하의 은총 덕분이지요. 전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저를 거두어주신 덕분에 템빨국의 백성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건강을 되찾은 덕분에 그리드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된 단테는 새삼 느끼는 바가 컸다. 속으로 감탄을 거듭하며 그 옛날 황제를 대할 때보다 더 공손히 그리드에게 조아렸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제 덕이 맞습니다. 스틱세이의 진단은 틀렸고요. 단지 체질에 맞는 곳에 산다고 해서 수십 년이나 젊어질 수 있다면 세상 그 누가 늙어 죽겠습니까?”
“험험.”
그리드가 필요 이상으로 생색을 내자 당황한 피아로가 헛기침했다.
물론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단지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으므로 당당했다.
“하지만 단테 공, 제가 귀공께 드린 건강과 젊음에는 아주 큰 부작용이 있습니다.”
“....?”
그리드가 반쯤 장난삼아 말하는 줄 알았던 단테와 피아로가 정색했다. 주군께서 진지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청했다.
“동대륙의 신들이 귀공을 적대하게 되었죠.”
“....!”
두서없는 말에 황당할 지경이다.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는 그들 앞에 인피면구를 꺼내놓은 그리드가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잠시 후 스틱세이가 도착하자 그리드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허.”
“그런 일이!”
그리드가 한결을 쓰러뜨리고 풍사에게 목격되기까지의 일화 아니, 신화를 접한 단테와 피아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면 단테 공은 신벌을 받게 되는 겁니까?”
걱정하며 묻는 피아로에게 스틱세이가 대답해주었다.
“아닙니다.”
스틱세이는 단호했다.
“쫓겨난 신들은 서대륙에서 잊힌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신화를 기억하고 숭배하는 이가 적으니 그들의 영향력은 서대륙까지 미치기 힘들지요. 몇 번 보여준 바 있듯이 인간을 현혹해 동대륙으로 유혹하는 정도가 현재 그들의 한계일 겁니다.”
“그럼 단테 공께서 서대륙에 계시는 이상 무사하다는 뜻이오?”
“그렇지요. 이번 사건은 단테 공에게 무조건 이로운 것입니다. 굳이 동대륙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환국의 표적이 될 일이 없고, 적게나마 신격을 쌓은 덕분에 앞으로 무병장수할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오오!”
피아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드의 곁에 시립하고 있는 메르세데스 역시 작게 안도했다.
다만 단테 본인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의 불안을 읽은 그리드가 스틱세이에게 질문했다.
“단테 공께서 신앙의 대상이 되면 양반들처럼 반신이 될 수도 있는 건가?”
“불가합니다. 작은 신격을 쌓고 신앙의 대상이 됐단 이유만으로 반신이 될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엔 신이 넘쳐났겠지요. 사이비 교주 출신의 신들이요.”
“왜 안 되는 거지?”
“태생의 문제입니다. 신이 신을 만들기 위해 빚은 양반들과 달리 단테 공은 평범한 인간 출신이므로 신의 자격을 얻기 힘들지요. 물론 전하처럼 아주 대단한 기연을 얻거나 신화의 주역이 되어 신격을 계속 쌓아간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그건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건 전하께서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드를 바라보는 스틱세이의 눈빛이 한없이 따뜻했다.
말투와 호칭이 전보다 훨씬 공손해졌다 싶더니 그리드가 세운 대단한 업적을 듣고 존경심을 품은 듯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단테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떻습니까? 신화가 될 정도의 업적을 세우면 반신이 될 수도 있다는데.”
“저는 전하와 달라 신화가 될 정도의 업적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설령 가능하다 할지언정 인간이고 싶습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건강히 오래 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합니다. 아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단테가 그리드에게 절을 올렸다.
“전하,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배신자라는 누명만을 남긴 채 비참하게 세상을 떠날 뻔했던 저를 거두어주신 것으로 모자라 새로운 삶을 쥐어주신 전하께 어찌 은혜를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피아로 시대의 적기사들은 모든 걸 잃었었다.
당연히 단테도 마찬가지다.
단테를 배신자로 공표한 제국은 그의 두 아들과 며느리들은 물론이고 손주들에게까지 연좌제를 물어 형장의 이슬로 만들어버렸다.
새 삶을 얻은 단테는 자신이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꽃조차 피우지 못하고 죽은 손주들의 이름을 자신이 대신해서 세상에 남겨주겠노라 다짐했다.
[당신의 기사 ‘단테’와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단테는 평생 당신에게 충성할 것입니다. 단, 당신이 그릇 된 명령을 내릴 경우 목숨을 걸고서라도 진언할 것입니다.]
베테랑.
다해가는 수명 탓에 능력치가 큰 폭으로 떨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적기사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실력을 지닌 단테가 그리드의 진정한 기사로 거듭났다.
그리드는 기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지만 애써 침착하고자 노력했다. 단테의 손을 맞잡고 응원을 건네더니 이어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한데 단테 공, 도대체 무슨 비법이 있기에 병사들을 저토록 빠르게 성장시킨 겁니까? 라인하르트의 병사들은 대부분 한계치까지 성장한 상태라 벽에 가로막힌 상태였을 텐데요?”
일반 NPC의 능력치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한계치에 가까워질수록 레벨 성장 속도가 느려진다. 네임드 NPC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플레이어보다 성장속도가 느린 존재가 바로 보통의 NPC였다.
물론 모든 능력치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해서 레벨 업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느리게나마 레벨을 올릴 수 있었고 레벨 업을 통한 공격력, 명중률, 각종 저항력과 내성 등의 상승효과를 똑같이 누렸다.
다만 누차 강조했듯이 느릴 뿐이다.
한데 단테는 고작 한 달 만에 병사들의 레벨을 평균 20 가까이 올렸다.
“한계라.... 확실히 대부분의 병사들이 체(體)를 완성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기(技)와 심(心)은 미숙했으니 발전의 여지가 아직도 많습니다.”
“....?”
심기체(心技體).
비반이 강조했던 개념이다.
그리드는 그것이 특별한 경지에 오른 존재들이나 언급할 수 있는 히든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왔다.
한데 일반 병사들의 성장을 논하는 이때 대수롭지 않게 튀어나오다니?
짐짓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단테가 설명해주었다.
“대부분의 병사가 평범한 청년이니만큼 한계는 분명히 있지요. 그들이 극한까지 체(體)를 단련한다고 해봤자 큰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또한 오랜 시간 전력으로 질주하지도 못하죠. 하지만 기(技)를 익히면 큰 바위를 잠시나마 들어 올릴 수 있고 더 나아가 다치지 않는 법을 터득할 수 있으며, 심(心)을 쌓으면 조금 더 긴 시간을 전력으로 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알기 쉬운 풀이다.
기(技)는 말 그대로 기술, 심(心)은 마음가짐을 뜻했다.
“제가 한 일은 간단합니다. 병사들에게 더 적은 힘으로 검을 휘두르는 방법을 제시했고, 더 쉽게 적을 죽이는 방법을 숙달시켰습니다. 지쳤을 때 잠시 더 버틸 수 있는 근성을 심어주었습니다. 기본 중의 기본이지요. 하지만 이미 체(體)를 완성하고 있던 라인하르트 병사들에겐 이 기본이 큰 효력을 발휘했던 거고요. 심기체의 균형이 맞춰지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벽을 깨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던 겁니다.”
“음....”
더 좋은 기술을 가르치고 정신력을 단련시켰다....
단테는 쉽게 말했지만 사실은 어려운 일이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조차 병사들을 이토록 급성장 시키진 못했었다.
적어도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부분에서 만큼은 베테랑 노기사 단테의 실력이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앞서간다는 뜻이 됐다.
“단테 공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단테 공 덕분에 템빨국의 군대가 대륙 최고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입니다.”
세계 최고라는 말은 차마 못하는 그리드였다.
동대륙 병사들의 레벨이 워낙 높았으니까.
이를 눈치 챈 단테의 눈빛이 뭔가 굉장히 뜨거워졌다.
“전하께서 기대하시는 것 이상의 성과를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로 듬직하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피아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테가 젊음과 건강을 되찾은 이유를 알게 된 시점부터 계속 그리드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가 표정을 고쳤다.
“그간 제 활약을 말씀드릴 것 같으면 라인하르트의 모든 병사들이 어디서든 밭을 개간할 수 있게끔 토질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무상검법의 기원을 다시 한 번 말해줘.”
“....제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던 검술입니다. 이 검술이 정확히 어떤 경위로 가문에 전해진 건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서대륙에 존재하는 그 어떤 언어로도 구결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동대륙 기원의 검술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구결을 해석했기에 숙달할 수 있던 건가?”
“제가 과연 무상검법에 숙달한 건지는 자부하기 힘듭니다. 가주들이 대대로 자신 나름의 방법으로 구결을 해석해 후대에 전달하는 식으로 발전시킨 검술이므로 사견이 많이 붙어있죠. 원본과는 크게 달라진 상태일 겁니다.”
“혹시 전전대 검성 비반도 같은 가문 출신이야?”
“비반이요....? 아예 관계가 없는 인물입니다.”
“흐음.”
무려 수백 년 전의 인물이다.
설령 피아로의 가문과 비반 사이에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해도 모종의 이유로 기록되지 않았거나 기록이 파기됐다면 피아로가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쌍심법이라는 것이 있다. 비반이 창안한 심법이지.”
“허, 이름부터 대단한 심법이로군요.”
“그걸 내가 익혔어.”
“....?”
비반은 경고한 바 있다.
탑의 정보를 유출할 경우 큰 화가 뒤따를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그리드는 탑의 정보를 유출하지 않았다.
단지 비반이라는 개인의 정보 중 하나를 유출했을 뿐이다.
심지어 비반 스스로가 먼저 제3자 메르세데스에게 유출했던 정보를 말이다. (비반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부터 그걸 당신에게 가르쳐주려고 해.”
의미심장하게 말한 그리드가 메르세데스와 스틱세이를 번갈아 보았다.
우선 대현자 스틱세이.
그에게는 학습과 교육이라는 패시브 스킬이 있다.
충분한 정보만 있다면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쉽게 가르치는 능력이다.
그리고 메르세데스는 혜안을 통해서 무쌍심법의 정보를 낱낱이 파헤친 상태였다.
이 둘이 힘을 합친다면 피아로에게 무쌍심법을 전수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
‘그리고 만약 정말로 무상검법이 비반의 무쌍검과 같은 거라면 무쌍심법의 구결이 무상검법을 완성시키는 힌트로 작용할 수도 있다.’
거기까지 떠올린 그리드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전전대 검성이자 현재는 지혜의 탑의 결사로 활동 중인 비반.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인 그의 힘을 피아로가 흡수해 자신만의 것으로 승화시킬 경우 피아로는 과연 얼마나 강해질까?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흐를 지경이다.
“메르세데스, 지금부터 스틱세이와 협력해서 피아로에게 무쌍심법의 구결을 가르쳐줘.”
“네.”
이건 탑의 비밀을 유출하는 행위가 아니다.
비반 스스로가 앞장서서 제3자 메르세데스에게 전수해준(?) 무쌍심법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보다 자격 있는 사람에게 배포하는 ‘선행’이다.
비반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필시 기뻐할 테지.
‘....는 개뿔. 일단은 비밀로 하도록 하자.’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무력이 필요했다. 언젠가 다시 동대륙을 방문할 때 당당히 함께 데려갈 수 있는 강력한 무력이.
‘비반, 나중에 반드시 은혜를 갚겠..... 후.’
재차 마음을 다스리던 그리드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방금 전 내린 명령을 철회했다.
“이 일은 보류하자.”
어차피 지혜의 탑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우선 비반의 허락부터 구하는 게 수순이 맞다.
그를 존중해야함이 옳을뿐더러 혹시 모를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이만 해산.”
잠시 쉬자.
그리고 선구자의 자격으로 지혜의 탑을 방문하자.
계획한 그리드가 자리를 떠났다. 아이린과 로드를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