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11화
‘피아로가 무쌍심법까지 체득하면 무시무시해지겠군.’
당대 전설들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전대 전설들과 비교해서 경험이 너무 적었고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무쌍심법을 손에 넣은 피아로가 당대 전설의 전성기를 주도할 것이다.
확신하며 미소 지은 그리드가 전투를 복기했다.
‘일단 한 번 회(回)로 맞받아쳐볼 걸 그랬나?’
절구질의 데미지가 설령 3단 히트로 들어왔다 해도 회, 화회에 이은 신격, 그리고 또 다시 회나 화회를 연계했다면 충분히 반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 그리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션이 감당 못한다.’
회와 화회 모두 검을 휘두르는 동작이 선행되는 스킬이다.
시간 차 없이 3단 가격하는 절구질을 반격기의 연계로 맞받아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물론 절구질이 3단 히트하려면 치명타가 터져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었고 피아로가 그리드에게 반드시 치명타를 적중시켰을 거란 보장은 없다.
행운의 여신이 그리드의 손을 들어줬다면 절구질은 그리드를 1번만 가격했을 테고 이때 그리드가 반격기를 사용했다면 절구질을 쉽게 감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여러 행운이 받쳐줘야 발생하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도박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피아로와 진심전력으로 맞부딪쳐보고 싶었던 그리드의 입장에선 도박에 기댄다는 게 어불성설이었고 말이다.
‘이십만대군 분쇄검을 안 쓴 것도 정말로 잘한 일이고.’
이십만대군 분쇄검은 대상 스킬을 분쇄한다. 피아로의 절구질이 천하의 절기라고 할지언정 이십만대군 분쇄검 앞에선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절구질을 상대로 이십만대군 분쇄검을 사용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분쇄하는 스킬의 위력이 클수록 반동이 커진다는 약점 때문이다.
그리드가 절구질을 상대로 분쇄검을 사용했을 경우 무조건 50퍼센트의 생명력을 잃었다. 팔이나 어깨가 부러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눈치 못 챌 리 없는 피아로의 후속타를 감당하기란 굉장히 힘들었을 터.
차라리 힘으로 맞부딪쳐본 선택은 옳았다.
‘....실전에서는 얘기가 달랐겠지만.’
불사를 지닌 그리드는 생명력이 최소치로 떨어져도 5초의 유예 시간을 갖는다. 만약 피아로와의 대결이 대련이 아닌 실전이었다면 그리드는 그 5초를 믿고 공격적으로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련모드는 한쪽의 생명력이 최소치가 되는 순간 승부가 결정 지어지는 시스템이었으므로 그리드는 평소와 달리 신중했던 것이다.
대련이 오히려 더 실전 같은 느낌이었다.
‘불사 없이 싸우는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군.’
불사를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투에서 비교적 소극적인 이유를 그리드는 이해하게 되었다.
불사를 믿고 승부사의 기질을 발휘해온 자신과 달리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그들은 스스로를 여러모로 제약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랭커들에게도 불사 패시브가 있었다면 그들의 실력은 지금보다 배 이상 뛰어났겠지....’
집중해서 복기하다가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한 그리드의 상념이 문득 깨졌다.
“피아로 고옹!!”
템빨국의 공작 피아로.
사실 그리드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실제로 그리드는 피아로에게 존칭을 쓰고 싶었지만 피아로가 서운해 하는 바람에 관뒀다) 그를 상대로 유일하게 호통 칠 수 있는 인물.
행정관 라빗의 출현이 그리드의 시선을 끌었다.
“앞으로 일곱 달 동안 봉급 없으실 줄 아시오!!”
템빨국은 중앙집권 국가다. 국왕 그리드는 나라의 모든 자원을 독점한다.
그런 그리드가 국고를 관리하라는 중책을 맡긴 인물이 다름 아닌 라빗이었고 라빗의 권한은 실로 막강했다.
“저기, 라빗....”
라빗 행정관에게 발언을 철회해달라며 간곡히 부탁하는 피아로를 외면하기 힘들었던 그리드가 끼어들었다. 라빗에게 너무 과한 처사 같다고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라빗의 말을 듣자 함부로 말하기 힘들어졌다.
“전하, 피아로 공을 변호해주지 마십시오. 보시다시피 대연병장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건물을 다시 세우고 토목공사를 진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수천 장병을 육성하는 수준과 맞먹을 것이옵니다.”
“.....”
“손실을 메우기 위해서는 피아로 공의 7개월 치 봉급을 몰수하는 것을 포함해서 앞으로 2개월 동안 세금을 올려야할 것으로 사료되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
과연 라빗은 준비성이 철저했다.
세금 인상안이 적힌 서류와 템빨왕 그리드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을 바로 꺼내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피아로와 눈이 마주쳤다.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던 피아로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뭔가를 애틋하게 바라는 기색이 마치 사료를 기다리는 강아지의 눈빛 같았다.
한숨 쉰 그리드가 서류를 찢었다.
“연병장이 무너진 책임은 내게도 있으니까 내가 책임지겠다. 세금하고 피아로 봉급은 건드리지 마.”
아이린과 로드도 알다시피 그리드가 가족만큼 아끼는 인물이 피아로였다.
한때 스승이었고, 친구였으며, 지금은 칸을 대신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피아로는 그리드가 평생토록 함께하고 싶은 동반자였다.
이제 막 신혼살림을 시작한 피아로가 존엄을 잃고 아내에게 바가지 긁히는 일을 그리드는 원치 않았다.
그리고 당분간 세금을 올리는 일은 없어야한다고 라우엘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현재 템빨국은 백성들에게 5퍼센트~12퍼센트에 해당하는 소득세와 7퍼센트의 소비세를 부과하고 있었는데 이는 제국의 세율보다 30퍼센트 낮은 수치였고 여타 다른 왕국과 비교해서 30퍼센트 높은 수치였다.
플레이어들이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적정선을 유지하는 셈인데 여기서 세금을 잠시나마 올렸다간 대규모 이탈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기껏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플레이어들을 다시 빼앗길 여지가 있었으니 그리드로서는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환원하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저, 전하....”
그리드가 힘겹게 내린 결정에 피아로가 감격했다.
마치 아스모펠과 화해했을 때만큼 감격하는 눈치였다.
‘가장에게 있어선 돈이 우정만큼이나 귀한 거구나....’
가장의 무게를 절실히 느낀 그리드가 피아로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쥐었다.
“피아로, 나는 그대를 위해서라면 지옥 불구덩이 속에도 뛰어들 수 있어.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유대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당신의 기사 ‘피아로’와의 유대 관계가 강화됩니다.]
<유대>
현재 깊은 유대를 맺고 있는 대상 목록.
-유대 레벨 2-
★피아로★
함께 있을 시 모든 능력치 5퍼센트 상승.
유대 대상의 생명력이 위험 수위에 놓일 경우 감지 가능.
10킬로미터 범위 내에서 전음(귓속말) 가능.
-유대 레벨 1-
★브라함★
함께 있을 시 모든 능력치 3퍼센트 상승.
유대 대상의 생명력이 위험 수위에 놓일 경우 감지 가능.
“.....”
그리드 본인이 말했듯이 연병장이 박살난 책임은 그리드에게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대련을 신청한 사람이 그리드였으므로 그리드의 책임이 더 컸다.
하지만 피아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진정으로 감사하며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그를 보자 그리드는 양심의 가책마저 느꼈다.
‘왕이 갑이긴 하네.’
뺨을 긁적인 그리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메르세데스와 단테를 비롯한 기사들과 수천 명의 병사들이 잔뜩 고양된 얼굴로 그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템빨국 무력의 상징인 피아로와 동수를 이루는 전투력, 신하와 백성들을 생각해서 자신의 사비를 터는 인품....
성군의 표본과도 같은 그리드의 모습을 실시간을 목격한 그들은 하나 같이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의 왕에게 홀딱 반해버린 상태였다.
실제로.
[당신의 기사 ‘단테’와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당신의 기사 ‘싱클레드’와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피아로 때문에 그리드 휘하에 들어왔던 단테와 싱클레드.
그리드와 직접적인 교류가 적어서 다소 데면데면했던 그들의 태도가 크게 변했다.
기사답게 원래부터 충성심은 높았으나 호감도는 충성심과 또 다른 개념이니 그리드의 입장에선 큰 이득이었다.
메르세데스는 한 술 더 떴다.
“라빗 공, 감히 전하께 재산을 요구하느니 제 봉급 평생 치를 몰수하도록 하세요. 그쯤 되면 복구비로 충분하겠죠?”
[당신의 기사 ‘메르세데스’와 호감을 넘어서는 깊은 유대를 느낍니다.]
[레벨 1 유대 목록에 ‘메르세데스’가 추가됩니다.]
“충분하다마다. 오히려 남소. 메르세데스 경의 봉급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높으니 2년 치만 몰수해도 충분....”
“잠깐.”
저들끼리 이야기를 진행하는 메르세데스와 라빗을 떼어낸 그리드가 한숨 쉬었다.
“메르세데스, 너한테 월급 주는 사람이 난데 누가 누굴 걱정해? 그리고 은퇴 후의 노후자금도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함부로 돈을 써대면 쓰나? 저금 안 해뒀다가 늙어서 길바닥에 나앉으면 어쩌려고 그래?”
“.....”
안 그래도 고요한 메르세데스의 눈빛이 왠지 더 사늘해졌다.
그리드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피아로와 라빗이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동시에 백호 검을 뽑아 쥔 메르세데스가 방패를 꺼내 세우며 말했다.
“전하의 대련 신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갑자기....?
오래간만에 혜안에 노출 된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초월자의 감각이 그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피아로와 대련할 땐 발생하지 않았던 경고였다.
초월의 격은 메르세데스를 피아로보다 강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뭐지?’
무쌍심법의 유무 차이인가? 아니면 본래 메르세데스의 성장 기대치가 더 높았던 건가?
피아로와 비교해서 아직 연륜만큼은 부족한 메르세데스가 피아로보다 강하다는 판정을 받다니?
의외의 판정에 다소 혼란스러워하던 그리드가 이내 깨달았다.
메르세데스와 자신의 상성이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을.
쩌어어어엉!!
공격이 모조리 가로막힌다.
혜안과 <불완전한 예지> 패시브 스킬을 토대로 대상의 공격을 읽는 메르세데스 앞에서 속도라는 개념은 무의미했다. 즉발 공격과 반격기를 기반으로 검무를 연계시켜 간신히 빈틈을 노려본다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숭고한 용맹>과 <기사의 결의>를 활성화시켜서 방어력을 극한까지 올린 메르세데스에겐 심지어 <방패 막기>라는 패시브 스킬도 존재했다. 그녀에겐 그리드의 무자비한 공격력도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만, 아주 정말로 다행인 점은.
츠칵!
메르세데스의 공격 또한 그리드에게 별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균형 잡힌 능력치가 장점인 메르세데스에겐 피아로 같은 폭발력이 없었다. 그녀가 습득하고 베인츠식 검술의 한계이기도 했다.
메르세데스의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베인츠식 검술의 수준은 아무래도 전설 스킬과 비교해서 많이 뒤떨어졌다.
전설이 된 후 파그마의 검무를 얻은 그리드, 전설이 된 후 무상농법을 꽃피운 피아로와 달리 공격성보다 안정성이 강화된 메르세데스는 반신마저 꺾고 돌아온 그리드의 초월적인 전투지속력 앞에서 다소 무기력했다.
‘이대로는 승부가 끝나질 않겠어.’
그리드와 메르세데스가 같은 판단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은익.”
쿠와아아아아앙-!
은빛의 검기가 메르세데스의 등 뒤로 날개처럼 펼쳐졌다.
“아....”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언젠가 보았던 대천사 사리엘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숭고한 메르세데스의 모습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스렸다.
날개를 펼친 메르세데스는 모든 능력치가 큰 폭으로 상승할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비행까지 가능했다. 또한 날개 주변으로 끊임없이 검기를 방출함으로써 적으로 인식한 대상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입혔다.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방심했다간 그대로 골로 가는 것이다.
그리드도 진지하게 싸움에 임해야했다.
“원덕구.”
[<덕공>의 힘으로 당신의 기사 ‘메르세데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
얼음처럼 투명한 메르세데스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혜안을 빌려달라는 주군의 요청에 어찌 반응해야할지 몰라 0.5초 망설였다.
그러다가 이내 망설임을 버렸다.
잠시나마 망설인 스스로를 책망하고 부끄러워하며 그리드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드가 보는 풍경이 변했다.
[메르세데스가 당신의 요청에 기꺼이 응합니다.]
[메르세데스의 <혜안>이 당신의 눈에 이식됩니다.]
[<혜안>이 당신의 억제 된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에 귀속 된 <열망의 무아경> 효과가 발생합니다.]
[20초 동안 공격력이 3배 상승하고 회피력이 99퍼센트가 됩니다. 단, 방어력은 0이 됩니다.]
스파앗!
열망의 무아경에 몸을 맡긴 그리드가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선보였다.
혜안을 잃은 메르세데스의 불완전한 예지 능력으론 포착하기 힘든, 빠르고 현란한 동선으로 메르세데스의 공격을 모조리 수포로 만들었다. 그리고 혜안의 힘을 빌려 메르세데스의 방어에 존재하는 아주 일말의 빈틈을 발견하고 파고들었다.
결국.
“....졌습니다.”
열망의 무아경이 유지되는 20초 동안 너무 큰 피해를 입은 메르세데스는 그 뒤로 계속 수세에 몰리다가 끝내 패배를 인정했다.
자신의 명령을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메르세데스의 성격을 이용한 그리드의 완벽한 승리였다.
자신의 지략에 스스로 감탄하며 흐뭇해하고 있는 그리드의 귓전에 피아로의 떨떠름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항복하라고 명령을 하시지....”
“....!”
메르세데스의 강함에 위축돼 너무 집중한 나머지 대련의 본질을 망각해버렸다.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은 그리드가 아차 싶어서 말했다.
“메, 메르세데스, 다시 싸우자.”
“네, 전하.”
“미, 미안하다.”
놀림당하는 거라고 오해 한 듯하다.
메르세데스가 전혀 의욕 없는 표정으로 검을 쥐자 재차 실수를 깨달은 그리드가 황급히 사과한 뒤 화제를 돌렸다.
“피아로, 그리고 단테 공. 할 말이 있으니까 막사로....”
아, 다 무너졌네.
“성으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