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09화
『이로써 제5회 국가대항전이 끝났습니다. 개막식 전 특집 프로그램부터 폐막식에 이르기까지, 일주일 동안의 긴 여정을 우리 BBD 방송국과 함께해주신 시청자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하늘의 부름 퀘스트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S.A그룹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국대전을 하차한 사람은 11명에 불과했고, 심지어 그들 전원 메달리스트가 아니었다.
마왕 데미안의 활약으로 세상이 들썩인 가운데 그들 몇 명의 부재가 이슈가 되긴 힘들었다.
더군다나....
1위 대한민국.
그리드가 없음에도 미국과 중국을 제치고 대기록을 세운 한국의 파급력이 워낙 컸다.
세상사람 대부분이 국대전 결과를 놓고 떠들기 바빴다.
“이게 다 크라우젤 그놈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중국의 금메달 획득 기회를 몇 번이나 앗아간 크라우젤에게 야유를 보냈고,
“라우엘의 부재가 아쉬웠던 한 해군....”
미국인들은 라우엘이라는 책사가 미국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어왔는가를 새삼 깨달았다.
만에 하나 라우엘까지 한국에 귀화했다간 큰일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라우엘의 이민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만큼 지슈카의 활약이 컸다는 뜻이다.
단체전까지 포함해 3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 한국의 종합순위 1위에 크게 기여한 그녀가 귀국하자 인천국제공항은 인파로 마비됐다.
“지슈카! 지슈카! 지슈카!!”
“지슈카 선수! 한국에 귀화하자마자 국민적 영웅이 되셨는데요! 지금 심정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미국에서도 한식을 주로 즐기시는 모습이 노출되어 국민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음식이 입맛에 맞았기 때문입니까?”
질문공세를 퍼붓는 기자들 대부분이 통역기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포르투칼어를 구사했다.
브라질 출신인 지슈카를 배려하여 점수를 따려는 의도였다.
배려에 화답하듯 미소지은 지슈카가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그리드의 조국에 도움이 되서 기쁘네요. 이제는 제 조국이기도 하지만요. 아, 한식은 아주 좋아해요. 시부모님의 음식 솜씨가 워낙 좋으신 덕분에 한식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인식이 좋아진 거 같아요.”
“시부모님이요?”
“어머, 예.비. 시부모님이요. 헤헤, 제가 아직은 한국어가 서투르네요.”
수줍게 웃는 지슈카의 모습에 기자들 모두 얼굴에 홍조를 띄었다. 시청자들 또한 열광했다.
강인한 여성상을 대표해온 그녀가 평소와 달리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자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다시 한 번 반한 것이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가운데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했다.
눈꽃처럼 하얀 살결이 유독 눈에 띄는 유라였다.
소지품을 회수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린 것인지 지슈카보다 한 발 늦게 등장한 그녀를 기자들이 반겨주었다.
“유라 양! 올해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지슈카 선수와 나란히 활약하며 한국의 1위를 견인하셨는데요!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시부모님께서 기뻐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네?”
“아, 예.비. 시부모님이요.”
정정하는 유라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웃질 않는다.
지슈카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지슈카가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개가 짖은 것 같은데?”
“....!”
수백 대의 카메라를 개의치 않고 신경전을 벌이는 두 여인의 모습에 기자들이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유라와 지슈카 모두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진심으로 그리드를 걱정했다.
‘혹시 나중에 둘 중 한 명한테 납치, 감금당하는 거 아니야?’
‘그리드를 반으로 잘라서 나눠 갖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그리드는 그런 꼴 당해도 싸지.’
‘그리드가 어서 태도를 확실히 해야지 유라하고 지슈카도 행복해질 텐데.’
‘그리드 개새.’
그리드는 결국 한 명을 선택해야한다.
그가 빨리 선택을 내려야만 선택받지 못한 쪽도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벌써 몇 년째 양다리나 즐기는 그리드의 태도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솔직히 영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부와 명예를 겸비한 세계 최고의 미녀들이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무슨 고생인가 싶었고 연민을 느꼈다.
***
‘또 누가 내 욕하나 보네.’
그리드는 라인하르트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기왕 대연병장까지 찾아가는 김에 라인하르트의 발전을 두 눈에 새기고 동대륙의 국가들과 비교해보려는 의도였다.
‘최근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자꾸 욕을 해대는 거야? 쯧.’
인파의 중심에 멈춰 선 그리드가 귀를 후벼 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쳐지나갈 뿐 시선 한 번 보내지 않았다.
후드짚업의 위력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투명 상태의 그리드를 감지하지 못했고 그리드는 마음껏 도심을 활보할 수 있었다.
“흠....”
확실히, 템빨국은 대단한 나라다.
불과 10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수백 년 동안 서대륙을 지배해온 사하란 제국과 맞먹는 문명을 자랑할 정도가 됐다.
대량의 무기 수출을 토대로 쌓아올린 경제 규모가 템빨국을 강성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초국과 씽의 문명은 사하란 제국 이상이었으니까.
양반들에게 좌지우지 당하면서도 그만한 발전을 이뤘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었다.
‘다음에 초왕에게 부탁해서 건설기술을 배워오는 게 좋겠군. 흠, 씽 왕실과도 인연을 맺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달래며 계속 걷자니 어느새 대연병장의 광경이 시야에 펼쳐졌다.
마침 수천 명의 병사들이 연병장에 진입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흙투성이인 걸 보아 훈련을 빙자한 밭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 같았다.
‘아니, 훈련을 빙자했다고 표현하기엔 밭일의 효과가 엄청 좋았지.’
피아로가 시키는 밭일은 훌륭한 효과를 발휘했었다.
피아로가 있었기 때문에 신생 국가에 불과했던 템빨국 병사들이 기존 왕국의 병사들과 비슷한 수준까지 레벨을 올릴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의 레벨이 오를수록 피아로의 훈련 효과도 줄어들었는데....’
일반 NPC의 성장에는 상한선이 존재한다.
각자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치에 한계가 있었고, 능력치가 최대에 가까워질수록 레벨 업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 둘이 함께 노력해도 병사들의 레벨을 크게 올리지 못했던 이유다.
이미 템빨국의 병사들은 한계치에 가까운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건강해졌다는 단테가 병사들의 레벨을 급성장 시켰다고?
쉽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리드가 영 미심쩍어하는 그때 마침 단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리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우엘의 말에 다소 과장이 섞였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전혀 과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테는 한 달 전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젊어져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주름은 그대로였지만 노화를 상징했던 검버섯이 사라졌고 백태 꼈던 눈이 완전히 맑아졌다. 20년 이상은 젊어보였다.
‘무슨?’
깜짝 놀란 그리드가 단테의 상세정보를 불러왔다.
이름:단테
나이:73세 성별:남성
종족:인간
칭호:배테랑
*모든 공격에 치명타가 적용되고 높은 확률로 약점 공격이 발동합니다.
*공격 시 대상의 방어력을 30퍼센트 무시하고 낮은 확률로 무장 해제 시킵니다.
칭호:노익장
*항상 치명타에 면역하며 근처에 있는 아군을 대신해서 피해를 입습니다. 아군을 대신해서 피해를 입을 때는 입는 데미지의 80퍼센트를 경감시킵니다.
레벨:482
근력:3,490 체력:1,760
민첩:2,515 지력:1,503
신위:1
스킬:[제국 검법(S)] [망량검(S)] [호위(S)] [저력(SS)]
전대 적기사단의 아홉 번째 기사입니다.
제국 검법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서 모든 적기사들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
처음 단테를 만났을 당시 그리드는 큰 안타까움을 느꼈었다.
★이 인물의 수명이 다해갑니다.
노년에 접어든 지금은 실력이 많이 약해졌으나 때때로 놀라운 저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끝을 암시하는 문장들이 단테의 상태창을 점령하고 있었으니까.
한데 그 문장들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대신 신위라는 스탯이 추가됐다.
‘아....!’
그리드가 이변의 이유를 눈치 챘다.
[<반신 살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반신 살해> 업적을 달성하여 신위 스탯이 1 상승합니다.]
양반 한결을 쓰러뜨렸을 때 얻었던 효과가,
[‘풍사’가 한결의 시체를 밟고 선 당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확인하였습니다.]
[★주의★ 당신의 기사 ‘단테’가 환국과 적대 관계를 맺었습니다.]
단테에게도 적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게 맞아. 풍사라는 놈이 나를 단테로 오해한 덕분에 단테도 반신 살해 업적을 달성한 것으로 판정 받은 거야.’
신위(神威)란 신의 위엄,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위엄을 뜻한다.
히든 스탯 중에서도 희소성과 가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리드는 10개의 신위 스탯을 달성함으로써 화공이 되었고 덕공이 되었다.
‘나 같은 경우는 10개의 신위를 쌓기 전까지 별다른 효과를 체감하기 힘들었지만....’
단테는 NPC. 플레이어와 입장이 다르다.
신의 위엄을 갖춘 존재가 인간의 수명에 구애 받아선 안 된다는 공식이 성립돼서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하.’
감격에 휩싸인 그리드가 단테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은 인피면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찼다.
단테는 막 돌아온 병사들의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쉴 틈도 주지 않고 검을 쥐게 하더니 검술 시범을 보였다.
‘제국 검법?’
그리드가 벤 제국군 숫자가 최소 수천이다. 제국 검법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단테의 검술 시범이 길어질수록 그리드의 확신은 점차 희미해졌다.
‘제국 검법보다 훨씬 더 단순한 것 같은데 강력한 느낌이....’
일단 단순해진 건 맞다.
실제로 병사들은 단테의 동작을 쉽게 따라하고 있었다.
한데 검에 담기는 기세가 상당하다. 단테가 병사들에게 제시하는 검술이 최선의 효율을 추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드가 집중해서 관찰하는 그때였다.
“단테 공은 적기사단의 전설이시죠. 단테 공께 가르침 받은 사람 중에 발전하지 못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해요.”
“....!?”
차분하고 청명한 음성이 귓전에 스며들었다.
깜짝 놀란 그리드가 고개를 돌려 보자 백발의 아름다운 기사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메르세데스였다.
그녀의 혜안 앞에선 후드짚업의 투명 효과도 무용지물이었다.
“후, 훔쳐보는 취미 따위 없어. 이건 단지 편하게 이동하려고....”
주섬주섬 후드짚업을 벗는 그리드가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였다.
메르세데스가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메르세데스는 그리드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을 할지라도 그저 신뢰하고 따를 뿐이다.
“저는 전하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전하께서 여탕을 훔쳐보신다고 해도 묵묵히 곁을 지킬 따름이에요.”
“내가 여탕을 왜 훔쳐봐....”
....그런 발상은 전혀 못해봤다.
나중에 한 번 가볼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그리드의 가슴에 메르세데스가 이마를 살포시 기댔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전하.”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이 나를 걱정하는 거야.”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의 어설픈 포옹을 피하지 않았다. 기분 좋은 꽃향기가 풍기는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살짝 올려놓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마침 피아로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드가 검을 뽑았다.
“피아로, 메르세데스. 너희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리드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템빨국의 전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