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08화
찬란하게 솟구치는 빛줄기가 멋진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엉금엉금.
빛을 배경 삼은 두 현무가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상냥한 시선을 보내며 이마를 맞댔다.
『고마워....』
현무는 본래 하나였다.
죽음의 현무와 물의 현무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왠지 울컥해졌다.
죽음의 현무가 남기는 마지막 목소리를 가슴 깊이 새기며 소리쳤다.
“기억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아야할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고마워.』
그저 감사를 되풀이하는 죽음의 현무의 목소리가 이내 완전히 흩어졌다. 그 따스한 음성의 잔재는 하늘과 땅, 그리고 강과 바다에 녹아들며 세계를 축복으로 물들였다.
[사방신 현무가 완전한 부활에 성공하였습니다!]
[★히든 퀘스트★ <현무의 수호자>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현무의 등껍질>을 획득하였습니다. 현무와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다시금 하나가 된 현무는 아름답고 거룩했다.
현무의 푸른 눈동자가 투영하는 북방의 모든 풍경이 풍요로 넘쳤다. 백미산을 지붕처럼 덮은 거대한 등껍질은 온갖 악업으로부터 북방을 수호해줄 우산을 상징하는 듯했다.
“전 현무, 잊지 않으마....”
먼 하늘을 올려본 그리드가 잠시 감상에 젖었다.
어디까지나 잠시였다.
『나는 여기 있는데 왜 떠난 존재 취급해?』
현무가 태클을 걸자 그리드의 감상도 끝났다.
험험, 민망해서 헛기침한 그리드가 지상을 굽어보았다.
백미산 아래로 펼쳐진 평야를 가득 채우며 자라난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이 그를 벅차게 만들었다. 자신의 노고가 만들어낸 더 나은 세상의 모습을 감상하며 느끼는 감격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훌륭한 보상을 얻었다는 사실 또한 기쁨의 요인 중 하나였다.
인벤토리를 연 그리드가 현무의 등껍질을 꺼냈다.
등껍질이라는 이름 때문에 방패가 아닐까 예상했지만 틀렸다.
초월자 사백이 만든 <진화의 표식>처럼 몸에 새기는 종류의 아이템이었다.
<현무의 등껍질>
등급:신화
사방신 현무의 가호가 깃든 표식입니다.
신체에 부착 시 300의 능력치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독에 완전히 면역하며 수중 호흡이 가능해집니다.
물 속성 마법과 스킬 사용 시 속성 데미지가 50퍼센트 추가됩니다.
독 속성 마법과 스킬 사용 시 속성 데미지가 50퍼센트 추가됩니다.
콧대 높은 양반들이 인간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표식의 개발을 시도했던 이유가 드러났다.
‘양반 놈들은 이걸 재현하고 싶었던 거구나.’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성능이다.
칸의 유작 발할라 덕분에 이미 만독불침의 효과를 누리고 있는 그리드였지만 일말의 아쉬움도 느끼지 못했다.
300의 능력치 포인트만 해도 30레벨의 가치나 다름이 없는데 대량의 속성 데미지까지 추가된다니 놀라울 지경이다.
‘수중에서 호흡이 가능해지는 것도 엄청 크지.’
일단 물에 빠져 죽을 일이 사라졌으니 생존력이 올랐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세이렌마냥 물속에 존재하는 무대에서 활동하기도 훨씬 수월해질 테고.
심지어 표식은 아이템 슬롯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몸에 직접 문신처럼 새기면 그걸로 끝이다.
이쯤 되면 동대륙에서 얻은 물리적 보상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보상이 아닐까 싶다.
즐거운 마음으로 현무의 등껍질을 살펴보던 그리드의 표정이 문득 어두워졌다.
능력치 포인트가 그에게 레벨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킨 까닭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레벨 상태가 납득이 안 되네.’
그리드가 이번 차오즈 전투에서 쓰러뜨린 양반의 숫자는 총 13명이다.
그중 3명의 양반은 거의 혼자서 해치운 셈이나 다름없었고 나머지 10명의 양반을 해치웠을 때의 기여도도 압도적인 1위였다.
하필 거물인 마루가 자폭해버렸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리드는 자신의 레벨이 최소 2개 이상 오를 것으로 전망했었다.
하지만 정작 오른 레벨은 하나에 불과했다.
현재 그리드의 레벨은 408이다. 심지어 보유 경험치도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레벨을 올릴 때마다 경험치 필요량이 2배씩 커지는 거 같은데....’
과장이 아니라 실제 체감이 그렇다.
본래 레벨 업이 힘든 게임이라곤 하지만 403레벨 이후부턴 정도가 지나쳤다.
‘사실상 곧 만렙이라는 뜻인데 이게 말이 되나?’
지금 막 현무의 등껍질을 얻은 것과 같이 그리드는 온갖 히든 피스를 섭렵해왔다. 덕분에 레벨 이상의 강함을 발휘하는 것이며 양반과도 싸워 이기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보통의 플레이어는 그리드와 사정이 달랐다. 그리드만큼 많은 히든 피스를 얻은 플레이어는 한 손에 꼽아도 좋을 정도로 적었다.
그들이 훗날 그리드와 똑같은 레벨을 달성할지라도 양반과 싸워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이 NPC를 따라잡기 위해선 최소한 레벨이라도 높아야하는데.’
고작 400레벨 초반대가 플레이어의 최대 성장치라고?
이게 맞을까?
‘아니, 틀려. 뭔가 잘못 됐다.’
양반은 수준이 너무 높으니 제외한다고 해도 대악마, 대천사, 일부 어긋난 이종족 등 플레이어의 잠재적인 적은 매우 많다.
플레이어가 세계관을 주도하진 못할지언정 최소한 중심을 잡을 정도의 위치에 오르려면 어느 정도 성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한데 시스템이 레벨 제한을 걸어버린다?
플레이어들의 희망을 빼앗는 처사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괴감을 느끼다가 지쳐 게임을 포기하고 말 것이다.
플레이어들의 레벨 정체 현상은 S.A그룹이 원하는 그림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내가 뭔가를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레벨 업을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사냥, 그리고 퀘스트.
물론 제작 반복을 통한 레벨 업도 가능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산직업군 유저들에게나 허용되는 일종의 혜택이다. 레벨이 오를수록 효과도 미미해졌다.
그리드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사냥이나 퀘스트를 통해서 레벨을 올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한데 이 순간 그리드가 한계에 직면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여기서부턴 레벨을 올리는 수단이 따로 있는 거다. 사냥과 퀘스트 외의 방법이....’
물론 단순하게 특정 레벨 구간만 경험치 필요량이 높은 걸 수도 있다. 409레벨, 410레벨을 달성한 후엔 다시 또 경험치 필요량이 낮아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냥 그때를 기다리기보단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궁리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런 고민은 원래 크라우젤이 했어야하는 건데.’
그리드는 지존이라는 위치가 새삼 부담스러웠다.
가장 앞서가는 만큼 남들은 아직 겪지 못한 고충들을 먼저 겪는 경우가 생겼으니 힘들고 고독했다.
‘가만.’
레벨을 올리는 방법으로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던 그리드가 문득 지혜의 탑을 떠올렸다.
오직 선구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그곳은 지혜의 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정보를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이거 지혜의 탑을 들러봐야겠는데.’
물론 그 전에 휴식부터 필요하다.
동대륙에 온 뒤로 한시도 쉬지 못한 그리드는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있었다.
브라함의 무사안위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피아로에게 무쌍심법의 묘리를 전해주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린과 로드, 그리고 메르세데스가 보고 싶었다.
국대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동료들과 회포도 나누고 싶었고.
“그런데 노검마 님.”
“음?”
현무의 웅장한 모습에 매혹된 듯 현무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노검마가 그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드는 주저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템빨단에 들어와 주세요.”
아쉽게도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지존께서 나를 직접 초빙해주시니 큰 영광이오. 하지만 난 이미 소속되어 있는 세력이 있소이다.”
“혹시 그게 모래왕국 가야입니까?”
“....황길동 그 인간이 또 뭐라고 떠들어댔나 보군.”
“가야의 마패라는 건 뭐죠?”
“미안하지만 아직은 말해줄 수 없소. 지존을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규칙이기 때문이오.”
“알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서대륙 귀환 주문서를 꺼냈다.
“다음에 꼭 다시 뵙겠습니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요. 반드시. 그때는 마패가 무엇인지도 설명해주겠소.”
역시 노검마는 신사적인 사람이다. 아이디를 이상하게 곡해한 것은 내 인성이 썩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며 노검마에게 꾸벅 인사한 그리드가 현무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지내. 만나서 기뻤다.”
『그, 그리드.』
“응?”
『....가끔씩은 나를 찾아와줬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그리드의 몸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이내 그리드가 남긴 빈자리를 바라보는 현무와 노검마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특히 노검마는 목에 가시가 박힌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모래 왕국.
그 오명을 부정하지 못했음에 마음이 불편했다.
‘미르.... 두고 보자.’
이를 간 노검마가 현무와 작별한 후 백미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이제는 갈 수 없게 된 가야를 아쉬워하며 다시 씽의 수도로 향했다.
그러다가 반나절이 지나서야 자신이 가야로 가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금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매번 길을 헷갈려 시간을 손해 보기 일쑤인 노검마의 레벨은 아직 380도 되지 않았다.
***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응?”
하늘을 날아 성벽을 지나치던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평균 레벨이 기존보다 20 가까이 높았기 때문이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한 달을 조금 넘었을 뿐인데 무슨 수로 저렇게 빨리 레벨을 올린 거지?’
그리드는 템빨국 병사들의 이름과 레벨, 소속을 알 수 있다.
국왕의 기본적인 권한이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 외에도 거리를 순찰하는 치안대 병사들과 연병장에 모여 훈련 중인 중앙군 병사들 모두 레벨이 크게 오른 것을 확인한 그가 서둘러 궁전에 입장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어. 그런데 라우엘, 또 무슨 요술을 부렸길래 병사들이 이렇게 빨리 성장한 거야?”
심지어 왕실 근위대 병사들의 레벨도 올랐음을 확인한 그리드가 마중 나온 라우엘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라우엘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전하와 상담하고 싶었습니다. 단테 공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저번에 전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랬지.”
“근데 그 양반, 어째 갈수록 활력이 넘치십니다.”
“....?”
“전하께서 동대륙으로 떠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부터 갑자기 활동량이 늘어난다 싶더니 급기야 굽었던 허리가 완전히 펴졌습니다. 피부에 가득했던 검버섯도 씻은 듯이 사라졌고요.”
“...??”
“그리고 솔선수범해서 병사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병사들의 레벨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올랐....”
라우엘이 설명을 멈췄다.
등 뒤 계단을 올려보는 그리드의 눈동자가 갑자기 미친 듯이 떨렸기 때문이다.
뒤따라 고개를 돌려본 라우엘은 팔에 깁스를 대고 있는 브라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루비 양께서 제대로 치료해주셨군.’
천하의 브라함이 팔이 잘린 채 돌아온 모습을 봤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드는 이미 몇 번이나 죽어서 렙따만 잔뜩하고 돌아오는 게 아닐까 걱정했을 정도다.
“브라함!”
라우엘을 지나쳐 단번에 층계참까지 뛰어오른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호통쳤다.
“빌어먹을! 메테오 쓴 다음에 바로 도망치라니까 왜 굳이 남아서 싸우다가 팔이 부러지고 난립니까?”
막 차오즈의 성터에 진입했을 당시.
마루가 ‘은발 마족의 희생’을 언급했을 때 그리드는 이성을 상실했었다.
마루의 말투가 마치 브라함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했기 때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분노에 정신을 지배당했었다.
하지만 또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드는 브라함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
<유대>
현재 깊은 유대를 맺고 있는 대상 목록.
★피아로★
★브라함★
유대 레벨 1.
함께 있을 시 모든 능력치 3퍼센트 상승.
유대 대상의 생명력이 위험 수위에 놓일 경우 감지 가능.
무려 영혼의 동반자다.
만약 브라함이 진짜 큰 위기에 처했다면 그리드가 모를 리 없었다.
하니 그리드는 브라함에 대한 걱정을 떨쳐낼 수 있던 것이다.
한데 제길, 빌어먹을.
지금 보니 깁스를 대고 있다.
전설의 대마법사가 깁스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다.
“힐로 즉시 치유 못할 정도면 뭐,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기라도 했었습니까? 아니 대체 왜 미련하게 남아서 싸웠던 거냐고요.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그리드는 모른다.
브라함의 팔이 참혹하게 찢겨나갔었다는 사실을.
마법의 힘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수준으로 훼손 된 그 팔을 성녀 루비가 고쳐줬다는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했다.
아니, 평생이 지나도 모를 것이다.
브라함이 함구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니까.
“넌 네가 미덥다고 생각하나보지?”
“윽.”
“주제넘게 지껄이지 말고 비켜라. 난 바쁜 몸이다.”
흥, 콧방귀 뀐 브라함이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깁스 때문에 옷을 입기 불편한 것인지, 맨몸 위에 망토만 달랑 걸친 그의 모습은 같은 남자가 봐도 선정적이었다.
“천 쪼가리라도 걸치고 싸돌아다니....”
그리드가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후후훗, 아주 바람직하군요.”
계단 아래 라우엘이 브라함을 쌍수 들고 환영했다.
“그 상태로 도시 한 바퀴만 돌아주십시오. 오늘 하루 자식을 여럿 만드시어 템빨국의 무궁한 발전에 기여를....”
“지랄 났다, 지랄 났어.”
절레절레 고개 저은 그리드가 자리를 떠났다.
단테의 상태를 확인하고 피아로에게 무쌍심법의 구결을 알려줄 겸 대연병장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