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07화
‘이거 진짜 분신 맞아?’
분신의 숫자가 많을수록 분신술의 질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하나의 분신을 만들고 유지할 때마다 술자의 마력과 집중력을 크게 소모시켰으니 분신으로 인해전술을 펼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황길동은 얼핏 봐도 200명에 가까운 분신을 소환하고 있었다.
뛰고, 날아 그리드에게 쇄도해 오는 분신 전부가 똑같은 생김새를 자랑하는 반면 표정과 행동은 달랐으니 이쯤 되면 이미 분신이 아니라 제2의, 제3의 황길동들 같았다.
“큭!”
화신의 폭풍을 전개하려던 그리드가 실패하고 신음했다.
뒤편에 우거진 수풀에서 튀어나온 분신들이 그의 망토와 사지를 붙잡고 늘어지자 스킬을 사용하기는커녕 칼을 뽑을 타이밍도 놓쳤다.
갑옷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더듬거리는 황길동들의 손길에 질색한 그리드가 꿱 소리쳤다.
“어딜 만져!”
“어허! 가만히 있으시오.”
“하하! 정 싫으면 품속에 숨기고 있는 현무를 순순히 내놓든가!”
“가슴이 넓고 단단하구려!”
황길동의 분신들은 심지어 말도 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다른 대사를 외쳐 댔다.
실시간으로 말이다.
마치 모든 분신이 사고력을 지닌 것만 같았다.
여태껏 본 적 없는 분신술의 경지에 감탄을 넘어서 경악한 그리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자 애썼다. 가슴을 더듬는 분신의 안면을 밀쳐 내며 으르렁거렸다.
“젠장! 자꾸 이러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하핫, 온몸이 결박당한 상태로 뭘 하겠다는……?”
웃으며 소리치던 200명의 황길동이 일제히 표정을 굳혔다.
그저 검던 그리드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흠.”
단지 그리드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더듬을 뿐이던 분신들이 몽둥이를 고쳐 쥐었다. 하지만 끝내 휘두르진 않았다.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분신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그리드가 소리치자 거세안이 발동했다.
대상의 이로운 효과 중 일부를 차단하며, 극악의 확률로 모든 이로운 효과를 차단하는 이 궁극의 마안의 유일한 단점은 ‘통제 불능’이라는 점이었지만 그리드는 극복한 지 오래다.
스파아앗!!
분신은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므로 이로운 효과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1명의 술자로부터 비롯한 이로운 효과. 분신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 봤자 다른 버프 스킬과 중첩된 상태가 아니라면 거세안에 모조리 삭제된다.
분신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세안을 감당할 수 없는 구조, 즉 상극이라는 뜻이다.
후두두둑!
그리드의 마안에 투영된 분신들이 모조리 짚신 인형으로 변해 널브러진다. 200명이었던 황길동이 순식간에 1명이 됐다.
“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황길동이 탄성을 터뜨렸다.
“섭리를 따르게끔 만드는 마안이라. 마안 중에서도 최상위급의 마안이구려!”
“에잇, 놓으시오!”
하필이면 허리에 매달려 있는 황길동이 본체였다.
진절머리 친 그리드가 황길동을 밀쳐 내자 그리드와 마주 보고 선 황길동이 히죽 웃었다.
“마안족은 워낙 괴팍한 종족이라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템빨왕 그대는 무슨 수로 마안족 왕을 구슬린 게요?”
“그 잘난 정보력으로 맞혀 보시오.”
“흐음…….”
그리드가 아무리 쌀쌀맞게 대해도 황길동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대화를 주도했다.
“그대는 정녕 굉장한 인재요. 주작 신을 부활시킨 것으로 모자라 차오즈에서 살아 돌아온 것으로 스스로의 무위를 입증해 보였지.”
“나는 내 실력을 뽐내려고 싸운 게 아니니 칭찬은 됐소.”
“뽐내려던 게 아니다? 그럼 왜 싸웠소?”
“당연히 현무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싸운 거요.”
“외부인인 그대가 굳이 왜?”
“힘든 사람들을 돕겠다는데 출신이 무슨 상관이요?”
“…어찌 됐든 그대 덕분에 주작 신에 이어서 현무 신까지 부활했으니 큰 도움이 되었소. 고맙소.”
“반쪽짜리 현무겠지.”
“그대가 전 현무를 내놓으면 해결될 문제요. 전 현무를 죽임으로써 전 현무가 축적해 온 신앙을 물 현무에게 집중시키면 다시 완전한 현무가 탄생하게 될 거요.”
“사방신의 균형이 무너진다니까! 파멸의 권능을 잃은 현무는 더 이상 현무가 아니게 되오!”
“그 파멸의 권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을지 생각해 본 적 없소?”
황길동의 시선이 그리드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리드의 가슴에는 죽음의 현무가 안겨 있었다.
“자연을 보존함으로써 인류의 터전을 지킨다는 전 현무의 본능은 너무나도 극단적이오. 아득히 먼 미래를 내다볼 뿐 전혀 실리적이지 못하지. 파멸의 권능 탓에 인류의 문명은 몇 번이나 파괴되었고 발전하지 못해 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동성을 띠었소. 현무만 없었어도 양반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었을 거요.”
“현무가 일부러 나서서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기라도 했다는 거요?”
“물론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현무가 존재하기에 발생한 작은 사건들이 얽히고 얽혀 새로운 운명을 만들었고 인류를 퇴보시켰지.”
말을 멈춘 황길동이 죽음의 현무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백날 떠드는 것보단 당신이 직접 설명하는 편이 빠르지 않겠느냐는 태도였다.
『…이런 일이 있었어.』
어두운 표정을 지은 현무가 그리드에게 수많은 과거 중 하나를 보여 줬다.
환국이 존재치 않던 시절.
백미산 정상에 현무를 모시는 사당이 버젓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고대 씽의 젊은 왕이 현무에게 축복을 받고자 백미산에 올랐다. 물의 축복을 받아 활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무의 숨결에는 물의 권능뿐 아니라 파멸의 권능 또한 깃들어 있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젊은 왕은 무장하고 있던 갑옷을 잃었다. 그때 자객들의 화살이 날아와 젊은 왕을 죽였다.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은 씽 왕조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씽의 왕족들은 공석이 된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죽였으며 전화에 휩쓸린 씽의 문명은 백 년이나 퇴보해 버렸다.
『이뿐만이 아니야. 병든 어머니를 등에 업고 찾아왔던 젊은 사냥꾼은 나 때문에 활을 잃고 산을 내려가다가 호랑이의 밥이 되었어. 씽의 백성들을 지켜 주었던 중년의 장수는 나 때문에 칼과 갑옷을 잃고 산을 내려가다가 산적들에게 죽었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현무의 입장에선 편을 가르고 싸우는 인간들의 성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자신의 호의가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기우제를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지상에 내려갔던 적도 있어. 오랜 가뭄으로 메마른 땅을 적셔 주기 위해서였어.』
현무의 숨결이 땅의 기운을 되찾아 주었다. 시들었던 곡식들이 다시금 활력을 되찾아서 사람들은 더 이상 배를 곪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땅 위에 세워졌던 인류의 문명은 모조리 무너져서 씽의 백성들은 다시금 처음부터 도시를 세워야만 했다.
『나는…….』
그리드의 뇌리에 직접 사념을 전달하던 현무가 처음으로 발성했다.
녀석의 작은 입이 떨어지자 슬픔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졌다.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없어야 할 존재야. 그게 맞아.』
현무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삶에 대한 열망을 잃은 듯한, 그런 공허함이 느껴졌다.
“…….”
내내 유쾌하던 황길동의 표정이 처음으로 어두워진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금세 표정을 관리하더니 죽음의 현무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그리드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그거 보시오. 전 현무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소.”
순간.
“…없어.”
고개 숙인 채 침묵하던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타인에게 기대받지 못한다고 해서 삶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꾸욱…….
현무를 안고 있는 그리드의 양팔에 힘이 들어간다.
현무는 보았다.
자신의 등껍질에 새겨져 있는 흉한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그리드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그리드는 회상했다.
늘 고개 숙이고 다니던 시절의 자신을.
공부도, 운동도, 일도 못하는 주제에 음습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혐오받았던 과거의 경험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 일은 꼭 겪어야만 했던 건가?
결국 타인에 불과했던 그들에게 나를 질타하고 부정할 권리가 있었던 걸까?
“그건 누가 정하는 거지?”
“…….”
“현무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는 건 지랄 옆차기 하는 억지다. 본인들이 충분히 대비하지 못해서 당해 놓고 왜 현무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지? 왕의 갑옷이 벗겨지는 동안 호위들은 뭘 했냐고!”
다른 사람들도 문제다.
축복을 받기 전에 잠시 다른 곳에 무기와 옷을 보관해 뒀으면 될 거 아닌가?
“도시를 파괴한 사건은 어떤 식으로 변호해 줄 거요?”
“가뭄을 해결해 줬다며. 당시 사람들은 현무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도 기우제를 해서 현무를 부른 거잖아. 대가를 얻는 만큼 희생은 감수하겠다고 각오를 다졌을 텐데 그걸 이제 와 따진다고?”
“현무가 도시를 파괴한 건 그때 한 번뿐이 아니오.”
“한 번이든, 열 번이든, 백 번이든! 당시의 사람들이 먼저 각오하고 부른 걸 거 아니냐고!!”
“…….”
“제길! 멋대로 먼저 의지해 놓고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죽일 놈으로 몰아가는 건 대체 어떤 염치없는 놈의 발상이지?”
그리드가 황길동을 노려봤다.
황길동은 잠자코 있었다.
그 태연한 태도가 그리드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벽을 보고 소리치는 기분이 들었다.
“오존이 이 땅을 침략했을 때 현무는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온몸에 새기면서도 오직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고!”
“…….”
“근데 이제 와서 필요 없으니 죽이겠다고? 몸이 아닌 마음에까지 상처를 새기겠다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정말, 정말로 너무 화가 난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자 싸웠을 현무의 마음에 공감했으니까.
자신이 지킨 이들에게 부정당하는 현무의 슬픔을 엿볼 수 있었으니까.
실컷 소리치고도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그리드에게 잠자코 있던 황길동이 질문했다.
“그대는 현무의 오랜 친구요?”
“오늘 처음 봤다!”
“무슨 수로 마안족 왕을 회유했는지 알 것 같군.”
“……?”
황길동이 패랭이를 벗었다.
상투를 틀어 드러난 그의 이마엔 검흔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1센티만 더 깊었어도 황길동은 이미 망자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템빨왕 그리드, 귀하가 어떤 인물인지는 충분히 알겠소. 하니 그만하도록 하지.”
“……??”
“부유한 도시에서는 가장 큰 누각을, 가난한 마을에서는 가장 작은 객잔을 찾아 빠꾹빠꾹 우는 뻐꾸기 요리를 찾으시오. 그럼 활빈당이 귀하께 도움이 되고자 협조할 거요.”
“무슨……?”
여태까지 전부 다 연기였다고?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안도하기보다는 불쾌함을 느끼는 그리드에게 황길동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전 현무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건 진심이었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하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지. 내가 아무리 망나니라지만 감히 옛 신을 등 돌리고 싶었겠소?”
털썩, 황길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리드의 품에 안겨 있는 죽음의 현무에게 예를 다해 절을 올렸다.
“현무 신이시여, 훗날 오존을 몰아내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저의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
『…….』
절을 마치고 일어난 황길동이 다시 패랭이를 썼다. 그리고 여태껏 등지고 서 있던 제단에 다가가 은밀하게 설치해 두었던 부적을 떼어 냈다.
그러자 제단 위에 앉아 있는 푸른 등껍질의 현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글썽이는 눈동자로 죽음의 현무와 그리드를 번갈아 쳐다보는 태도를 보니 어지간히도 감격한 눈치였다.
이로써 죽음의 현무와 물의 현무가 재회할 수 있게끔 마련해 준 황길동이 그리드에게 말했다.
“아직 현무보옥을 완전히 손에 넣지 못했던 마루와 달리 파국에 머물고 있는 양반은 백호창을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소. 또한 가야에 머물며 청룡도를 지키고 있는 양반은 사신기 없이도 사방신의 권능을 구현할 수 있는 괴물이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결코 승산을 엿볼 수 없으니 잠시 휴식하며 정비하는 시간을 갖는 걸 추천하오. 초조해할 필요 없소. 귀하 덕분에 주작 신과 현무 신께서 부활하신 지금, 환국의 태도도 크게 조심스러워졌으니까.”
[활빈당의 수장 ‘황길동’과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앞으로 모든 활빈당은 당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멋대로 흘러가는 전개!
여전히 얼떨떨해하고 있는 그리드를 스쳐 지나가면서 황길동이 속삭였다.
“노검마는 가야의 마패를 지닌 귀인이나 방치해 두면 자꾸 샛길로 새는 경향이 있으므로 되도록 곁에 두시길 추천하오. 힘든 일을 겪을수록 강해지는 인간이니만큼 단련시키는 재미는 쏠쏠할 게요.”
탓.
황길동이 크게 한 걸음 내딛자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보의 개념과는 달랐다.
그의 모습이 지평선에 걸치지도 않고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축지법이오.”
놀라워하는 그리드 곁으로 다가온 노검마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리드의 가슴에 뺨을 비비고 있는 죽음의 현무를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재촉했다.
“어서 현무 신들을 재회시켜야 하는 거 아니오?”
“아, 그, 그렇지. 알겠소.”
제단으로 다가간 그리드가 죽음의 현무를 물의 현무 곁으로 내려놓자 찬란한 빛이 폭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