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04화
Satisfy 역사에서 노검마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우선 암살 기록이 없다는 점이 희대의 미스터리였다.
퀘스트를 진행하여 <암살 업적>을 세우고 이를 통해서 명성과 추가 능력치를 올리는 어쌔신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암살이란 다다익선의 콘텐츠다.
한데 노검마의 암살 기록은 전무했다.
완벽한 살수가 되고자 명성을 포기하고 암살 기록을 비공개했다고 보기엔 또 무리인 것이 대놓고 랭킹 1위까지 찍었다.
세간에 이런 말이 떠돌 정도였다.
“노검마는 자신이 어쌔신으로 전직한 사실을 모르는 걸 수도 있다.”
아이디가 노‘검마’이기 때문에 나온 우스갯소리다.
노검마가 공교롭게도 체술에 능하고 장검을 주무기로 사용한 여파이기도 했다.
어쌔신의 대표 마스터리 스킬은 단검임에도 장검을 애용하며, 암습보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즐겼던 노검마의 기행들이 본래라면 하찮게 취급됐어야할 우스갯소리에 힘을 실어줬고 일종의 밈이 형성됐다.
그래서일까.
신세대는 노검마를 ‘예전에 잘 나가던 검사’로 아는 경우도 많다.
“노검마....”
노검마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이 반짝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존 그리드를 동경하고 공경하듯이 그리드 또한 노검마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했다.
무명 시절의 그리드.
열등감에 찌들어 잘나가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외면했던 시절의 그는 노검마의 아이디에 은근한 호감을 느꼈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인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아이디.
사회에 불만이 많던 시절의 그리드는 그 아이디가 좋았다.
노검마가 자신을 대신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욕해주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었다.
‘그때 내가 어리긴 어렸군.’
도대체 얼마나 꼬여있던 거냐.
과거의 자신이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린 그리드가 집중해서 노검마를 관찰했다.
예전의 그리드는 노검마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었다. 그리드 본인의 수준이 낮았으니 당시 최고였던 노검마의 실력을 보고도 명확한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다. 단지 막연하게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수많은 강적들과 생사결을 거듭하며 강해진 그리드의 안목은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끼릭.
노검마의 장검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동시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창대를 요란하게 펄럭이며 노검마의 장검에 맞물려있던 단창이 반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멀찍이 튕겨나간 것이다.
날카로운 창날이 향하는 방향에 마루가 있었다.
마루가 투척했던 단창이 도리어 마루를 공격하는 형국이 된 셈이었다.
‘손목을 쓰는 솜씨가 엄청나군.’
크라우젤을 연상시킬 지경이다.
다만, 힘이 조금 약하다.
노검마가 아니라 크라우젤이었다면 마루에게 쇄도하는 창의 속도가 1.2배 이상 빨랐을 것이다.
만약 그리드였다면 2배 가까이 빠르게 창을 날릴 수 있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에겐 저 정도의 기술이 없다.
“흥!”
콧방귀 뀐 마루가 순보를 써서 노검마의 하단에 나타났다. 그리고 어깨로 노검마의 복부를 가격함과 동시에 회전하며 발을 휘둘렀다.
노검마가 이에 반응하기 위해선 3가지의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순보라는 스킬을 이해하고 있을 것, 마루의 순보 사용 타이밍을 예측할 것, 최소 2,500 이상의 민첩성을 보유하고 있을 것.
그리고 노검마는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어깨에 복부를 가격당하는 순간 즉각 반응해서 상체를 뒤로 젖힌다 싶더니 마루의 발차기를 피했다.
심지어 반격까지 가했다.
부웅!
노검마의 칼이 강력한 풍압에 너울거리는 마루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고,
쿵!
뒤로 날렸던 발을 회수하며 노검마에게 등을 보이고 선 마루는 노검마의 품에 안기듯 등을 기울였다. 그리고 두 팔로 노검마의 목을 붙잡았다.
노검마의 목이 그대로 꺾여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 최악의 포지션이었다.
그라운드기술을 유도하는 마루의 체술은 부바트를 연상시켰고, 노검마는 지극히 불리해 보였다.
대상과 접근할수록 강해지는 마루와 순보의 궁합은 가히 최강이라고 평해도 좋았다.
‘역시 안 되나.’
그리드가 다급히 순보의 전개를 시도했지만....
[순보의 발동에 실패하였습니다.]
‘젠장!’
노검마의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등골이 오싹해진 그리드가 우선 매직 미사일이라도 날리는 그때였다.
펑!
작은 폭음이 울리더니 노검마의 몸이 연기에 휩싸였고 이내 사라졌다.
분명히 노검마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던 마루의 두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
“....!?”
마루는 물론이고 전투를 지켜보던 그리드와 봉드레 모두 의문에 빠졌다.
마루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라졌던 노검마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목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
노검마는 마루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던 것이 아니다.
기척을 완벽하게 감춰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잠시 지웠을 뿐.
사실 그의 목은 여전히 마루의 두 손에 쥐어져 있었다. 다만 마루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만약 마루가 허공을 쥐었던 손을 즉시 풀지 않았다면 노검마는 목이 꺾여 죽었을 것이다.
쩌정!
쩌저저저정!!
마루의 권과 노검마의 검이 치열한 공방을 교환하기 시작한다.
“캭 퉤.”
“....!”
“퉤퉷.”
마루의 공세를 막고 피하는 노검마가 연신 침을 뱉었다.
한두 번 뱉어본 솜씨가 아니다.
그의 침은 정확히 마루의 동공에 꽂혔고 마루는 이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슬슬 호흡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노검마가 마루를 떨쳐낼 수 있었다.
“.....”
“.....”
거리를 두고 대치하는 노검마와 마루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리드와 봉드레의 눈빛이 더 크게 요동쳤다.
노검마의 더럽고 치졸한 전투방식에 둘 모두 충격을 받았다.
정말 다행인 사실은, 다른 하이랭커들은 노검마와 마루의 전투를 지켜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장 곳곳으로 흩어진 하이랭커들은 양반의 잔당들과 싸우느라 바빴다.
뺨을 스친 가래침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눈살을 찌푸린 마루가 노검마를 비난했다.
“네겐 긍지조차 없는 것이냐?”
“너희들 양반은 인간을 벌레취급하면서도 매번 내게 긍지를 묻는구나. 인간조차도 짐승 이하의 존재에겐 긍지를 논하지 않을 진데 너희들은 대체 얼마나 겁쟁이면 하찮은 벌레에게 긍지를 논하는 거지?”
“네놈, 인간....”
“노검마.”
“....?”
“내 이름이다.”
“.....”
그리드가 확신했다.
노검마는 후로이과다.
엄숙한 표정과 말투를 고수하는 주제에 패드리퍼다.
‘아니.... 설마.’
더없이 신사적이었던 노검마의 인사를 떠올리며 애써 부정하는 그리드였지만 다른 한 가지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했다.
‘양반들이 약해졌다.’
도담을 비롯한 3명의 양반들과 교전했을 때부터 느꼈던 사실이다.
공격력, 방어력, 생명력, 속력.
차오즈에서 만난 모든 양반들은 기존에 그리드가 만나왔던 다른 양반들과 비교해서 모든 면이 뒤떨어졌다.
존재감만큼은 가람과 동급인 마루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초국에 있던 양반들이 유난히 뛰어났던 걸까?’
라는 생각은 쉽게 접는 그리드였다.
그가 주작의 부활을 떠올렸다.
‘양반은 사방신으로부터 빼앗은 숨결, 혹은 심장을 흡수해서 능력을 강화한 존재....’
대표적인 예로 주작의 숨결은 양반들의 파괴력과 생존력에 큰 힘을 실어줬었다.
하지만 주작은 부활했고 양반들은 주작의 숨결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게 됐다.
‘주작이 양반들에게 빼앗겼던 숨결에 통제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거다.’
사실상 하나의 숨결을 잃은 양반들의 스탯과 스킬의 성능이 기존과 비교해서 대폭 하락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판단함이 옳다.
즉.
‘노검마까지 합류한 이상 희망은 있어.’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온 물약들을 복용한 그리드가 다시 공방을 교환하기 시작한 노검마와 마루로부터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전장 곳곳에서 중상 입은 양반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하이랭커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봉드레에게 물었다.
“좀 회복 됐나?”
“그래. 네가 준 이 물약, 성능이 엄청나군.”
“좋아. 노검마가 마루의 발을 묶고 있는 동안 다른 양반들부터 처리하자. 보조 좀 부탁할게.”
“난 퀘스트 끝났다만.”
“....?”
“방금 황길동이라는 자가 양반으로부터 현무보옥을 탈취해준 덕분에 퀘스트가 클리어됐다.”
“...??”
“나도 의외이긴 한데. 어쨌든 내겐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다는 거지.”
“.....”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가?
어쩌면 혼자 남아 싸워야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는 그리드에게 봉드레가 히죽 웃어보였다.
“하지만 말이지. 네가 내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못 도와줄 것도 없다만.”
자부심 강한 프랑스인답게 아니, 이런 표현은 편견일 테니까 관두자. 그냥 재수 없는 미소다.
재수 없게 미소 지은 봉드레가 종용해왔다.
“자, 그리드. 어디 한 번 부탁해봐라. 내게 도와달라고 외쳐보라고.”
기고만장해진 봉드레는 그리드의 우는 얼굴이라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너무 쉽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줘.”
“....?”
“최강 얼음술사 랭킹 1위님, 제발 좀 도와줘라.”
“....엿 같은.”
이토록 쉽게 고개를 숙일 줄이야.
‘나 따위에겐 굳이 자존심을 챙길 필요도 없다는 거냐....’
역시 나 혼자서만 우리의 관계를 의식했던 것 같다.
깨닫고 낙담한 봉드레가 투덜거리면서도 그리드의 곁에 섰다.
예상치 못한 퀘스트 클리어로 잃었던 레벨을 복구한 것으로 모자라 2개의 레벨이 더 오른 봉드레의 마력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져 있었다.
“네놈에게 신세를 져놓고 갚지 않으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으니 도와주마.”
“땡큐. 아레스하고 지낸다더니 성격이 많이 유해졌네.”
“닥쳐라. 나는 봉드레다.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아. 발할라에 들어간 것도 단지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서였다.”
“기분전환 끝나면 연락해. 템빨국은 너 같은 인재를 언제라도 맞이할 준비가 돼있으니까.”
“헛소리 작작하시지?”
파지직!
봉드레가 곳곳에 얼음의 거미줄을 펼쳤다.
그리드가 감탄했다.
봉드레가 펼친 거미줄 전부가 양반들의 진로를 절묘하게 방해한 까닭이었다.
그리드에게 큰 상처를 입고 쉴 틈도 없이 하이랭커들과 싸우고 있던 양반들이 솟구치는 짜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거미줄을 깨뜨렸다.
그중 하필 그리드의 표적이 됐던 양반은 스스로 명줄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연화.”
“....!”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거미줄에 정신이 팔려 빈틈을 드러낸 것은.
한데 정확히 그 틈을 파고 들다니?
기겁한 양반이 나부끼는 푸른 검기의 꽃잎들을 조금이라도 더 피해내고자 발악했지만 요원했다.
부바트가 그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진 까닭이었다.
펄럭이는 도포.
양반들의 쓸데없이 요란한 복식은 부바트를 상대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놈...! 놔라!!”
“초연화극.”
“크아아아아악!!”
봉드레와 부바트의 적극적인 협력을 등에 업은 그리드가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전장 곳곳을 순회하며 상처 입은 양반들을 한 명씩 철저하게 박살냈다.
“우오오오오!!”
하이랭커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는 그때였다.
쿠당탕탕!!
그리드와 하이랭커들 사이에 인영 하나가 떨어져 나뒹굴었다.
넝마가 된 노검마였다.
“노, 노검마!”
싸움에 집중하느라 노검마를 잠시 잊고 있었던 하이랭커들이 뒤늦게 아차하며 그를 부축했다.
뺨이 팅팅 부어오른 노검마가 하이랭커들을 쏘아보며 피를 토했다.
“쿨럭, 쿨럭. 기껏 도와주러 온 사람을 방치하다니....”
“미, 미안합니다.”
“으윽.... 나쁜 놈들....”
“.....”
처음 등장했을 때의 포스는 온데간데없는 노검마였다.
하지만 그리드와 랭커들은 그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무려 10분 동안 방치당한 채 홀로 마루를 상대했으니 화가 날만도 하다.
저벅. 저벅. 저벅....
마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노검마와 달리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표정에 여유는 없었다.
현무보옥을 빼앗긴데다가 고작 1명의 인간에게 무려 10분이나 발을 묶이고 그 사이에 형제들을 모조리 잃은 그의 심정은 참담했다.
“치우만.... 치우만 아니었다면 이런 꼴을 겪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런 분노를 느껴보는 건 태어나 처음이다.”
한때 목표였던 가람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힘든 싸움을 예상하긴 했다.
날이 갈수록 주작의 숨결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는 걸 느끼며 내심 초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겨내리라 믿었다.
무려 20명의 형제가 곁에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들 모두 새로운 7좌의 후보자들이었다.
이 정도 전력이면 대천사 두세 마리가 나타나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자부했었다. 고작 인간 따위들에게 낭패를 겪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 은발 마족 놈이 문제였다.’
그놈 혼자서 얼마나 많은 형제들을 해친 거지?
꽈드득, 이를 간 마루가 대충 걸치고 있던 도포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부바트의 금나수를 의식한 것이다.
다른 형제들처럼 꼴사납게 발목을 붙잡히느니 방어력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인간들의 공격 따위야 머잖아 신이 될 육신으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너희들을 하나씩 철저히 짓밟아 죽인 후 황길동의 목을 따버리겠다.”
“오오!”
부르튼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던 노검마가 화색을 지었다.
“응원하겠소! 황길동 그자의 목을 꼭 따주시오!”
“....?”
알면 알수록 깨는 캐릭터다.
그리드가 노검마를 게슴츠레하게 쳐다보자 시선을 느낀 노검마가 근엄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지존께서 이해하시오. 황길동 그자가 원체 싸가지가 없어서 말이오. 더군다나....”
노검마가 하이랭커들의 상태를 쭉 훑어봤다.
숫자가 처음보다 절반은 줄어있었고 그나마 생존자들도 대부분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특히 이번 전투의 핵심이었던 부바트의 두꺼운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으며 봉드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부바트는 스태미나가, 봉드레는 마나가 바닥나기 직전 같았다.
그나마 그리드는 무사했지만 그 혼자서 마루와 싸워서 이긴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노검마가 10분 동안 싸우면서 느낀 것은 마루의 방어력이 경이로운 수준이라는 사실이었다.
설령 템빨왕 그리드라도 강철보다 단단한 마루의 몸에 생채기를 입히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어차피 우린 다 죽을 거고... 저자가 꼭 황길동의 목을 따 황천길 동무로 만들어주길 바랄 수밖에. 내 심정을 이해해주시오.”
“근데 무슨 연유로 저희를 도와주신 겁니까?”
“황길동이 나를 버리고 혼자 사라진 까닭에 길을 잃었소. 그러다가 귀하들을 발견하였는데 혼자 있는 것보단 합류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합류한 것이오. 근데 망했군. 제기랄.”
“.....”
어색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와 하이랭커들이 애써 노검마를 외면했다. 그리고 마루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청룡, 백호, 현무 3개의 숨결을 동시에 운용하기 시작한 마루의 기세가 종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폭우와 번개가 내리치며 대지가 격동했다.
“이길 수 있겠나?”
봉드레가 질문했다.
마루의 저력이 다른 양반들을 가뿐히 초월하고 있음을 엿봤음에도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자신의 곁에 서있는 사내, 다름 아닌 그리드였으니까.
기대에 찬 시선으로 그리드를 올려보는 봉드레에게 노검마가 현실을 주지시켰다.
“지존께 너무 큰 부담을 주지 마시오. 이번엔 상대가 너무 나빠. 맞서 싸우기보다 각자 살 궁리를 모색하는 편이 그나마 현명하오.”
순간.
뻐엉!!
공간이 찢어발겨지는 듯한 파공성이 울려 퍼진다 싶더니 마루가 날아와 그리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거친 폭풍우가 그리드의 시야를 흔들었고 출렁이는 대지가 그리드의 신형을 무너뜨렸으며 번쩍이는 벼락이 그리드의 전신을 관통했다.
마루는 단지 한 번 주먹을 휘둘렀을 뿐인데 이때 발생하는 부가효과가 대자연을 움직였으니 천하의 그리드라도 당할 수밖에 없어보였다.
‘망했다.’
부바트와 봉드레를 비롯한 하이랭커들이 직감했고,
‘황길동 그 빌어먹을 인간.’
노검마가 혀를 차는 이때.
쩌적! 쩌저저저적!!
그리드의 코앞까지 떨어지고 있던 마루의 주먹이 멈춘다 싶더니 급기야 돌로 굳어버렸다.
“....!”
석상이 된 건 마루뿐만이 아니었다.
그리드와 함께 서있던 하이랭커들까지 전부 돌로 굳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되었다.
멈춰버린 세계 속에서.
콰르릉! 콰쾅!!
“아이템 합체.”
도대체 전격 속성 내성이 얼마나 높은 건지, 연신 내리치는 벼락에 관통당하고도 멀쩡한 그리드가 두 자루의 검을 하나로 합쳤다.
각자 묠니르를 꺼내 쥔 갓핸드들은 마루의 주변을 선회하며 언제라도 망치를 후려칠 태세를 준비했다.
“원덕구.”
스윽.
검을 높이 치켜세우는 그리드.
그가 염원하는 것은 단순했다.
눈앞의 적을 짓뭉개는 것.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강기의 파장이 일어나며 일대의 폭우와 번개를 모조리 흩어버린다.
뻥 뚫린 하늘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절구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