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 02화
아장아장.
“.....”
아장아장.
‘느려!’
거북이처럼 작아진 현무의 이동속도는 거북이마냥 느렸다.
시간을 황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이랭커들의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
하지만 감히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는 신일뿐더러, 정작 랭킹 1위에 빛나는 그리드가 태연했기 때문이다.
‘무려 신인데 깊은 뜻이 있겠지.’
‘맞아. 누구보다 초조할 현무가 느리게 걷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급할수록 기어가라는 말도 있잖아.’
‘그리드도 그걸 아니까 잠자코 있는 걸 테고.’
‘급할수록 기어?’
하이랭커들이 납득하고자 노력하는 이때 그리드는 새로운 시스템을 파악하고 있었다.
합성 가능한 스킬 목록 즉, 사용 빈도가 적은 스킬의 목록을 열람했다.
1.꺾을 수 없는 정의 - 최근 100회 전투 중 15회 사용
2.연속 찌르기 - 최근 100회 전투 중 6회 사용
3.스피어 샷 - 최근 100회 전투 중 2회 사용
‘몬스터와의 교전도 최근 전투에 포함되는군.’
그래야만 목록에 표기된 비율이 맞다.
‘패시브 스킬은 포함되지 않는 거고.’
만약 패시브 스킬이 포함됐다면 <보우 마스터리>도 반드시 목록에 있었을 것이다. 최근의 그리드는 활을 쏘지 않았고 보우 마스터리가 활성화될 일도 없었다.
‘고유 스킬도 제외....’
내가 가장 적게 사용한 스킬은 무엇인가?
자문했을 때 그리드가 가장 처음 떠올렸던 스킬은 <자아 부여>다.
그리드가 여태껏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스킬이 바로 자아 부여였다. 국대전 서버에서 사용하긴 했지만 그건 본 서버와 별개다.
그리고 다음으로 떠올린 스킬이 <제(制)>다.
강력한 광역 군중제어기인 제를 그리드는 한때 애용했지만 최근에는 대규모 전투에서만 활용했다.
어지간한 상대는 굳이 제를 걸지 않아도 쓰러뜨릴 수 있었고, 정작 강한 상대는 상태이상 저항률이 높아서 제의 실효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스킬 모두 합성 가능 스킬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자아 부여는 전투 관련 스킬이 아니라서 제외된 듯 했고, 제는 여러 융합검무에 영향을 미치고 있거나 영향을 미칠 여지가 있는지라 제외된 듯했다.
“흐음....”
그리드가 근래의 전투들을 돌이켜보았다.
즉시 발동 광역기라는 장점을 지닌 <꺾을 수 없는 정의>는 마찬가지로 즉발 광역기되 ‘허탈’이라는 무지막지한 상태이상을 적용시키는 <락(落)>을 얻은 뒤로 사용빈도가 더욱 줄었다.
다단히트 스킬인 <연속 찌르기>는 ‘데미지와 무관하게 일정 횟수의 공격을 무조건 흡수’하는 유형의 실드를 파훼할 때나 활용했고 <스피어 샷>은 땅에 떨어진 창이 보일 때나 주워 던져 변수를 창출하는 용도로 활용했다.
‘....사용 횟수가 적을 뿐이지, 꺾을 수 없는 정의를 제외하면 다 적재적소에 활용해 왔는데?’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애용하지 않으니 무의미하여 결점이다.
초월자의 격이 주장하는 이와 같은 논리가 실제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생각하기에 사용 횟수가 적은 스킬들은 자신의 결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력이었지.
‘사실 꺾을 수 없는 정의도 락과 연계하면 순간 폭딜을 노려볼 수 있다.’
락으로 범위 내 모든 대상에게 피해를 입히고 방어력 하락을 유발, 이어서 꺾을 수 없는 정의를 연계.
이 콤보도 계수만 놓고 보면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다.
단지 기회비용이 아까워서 사용을 자제할 뿐이다.
락 다음 꺾을 수 없는 정의를 연계하느니 더 강력한 융합검무나 무패왕의 검술을 연계하는 편이 훨씬 더 위력적이니까. 꺾을 수 없는 정의는 자원이 정말 빠듯하거나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겹쳐서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나 사용....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리드가 깨달음을 얻었다.
꺾을 수 없는 정의, 연속 찌르기, 스피어 샷 전부 다른 무언가로 ‘대체가 가능’한 스킬들이었다.
그리드에겐 꺾을 수 없는 정의보다 강력한 광역기, 연속 찌르기보다 효용성이 뛰어난 <연(聯)>과 연의 융합 검무들이 있지 않은가.
창을 투척하는 스피어 샷?
그리드는 굳이 스피어 샷이 없어도 창을 집어던질 수 있다. 아니, 창이 아니라 세상 모든 무기를 주워서 집어던질 수 있다. 물론 공격력 계수가 평타로 적용돼 위력은 떨어지겠지만 애초에 스피어 샷은 위력을 보고 쓰는 스킬이 아니라 변수 창출의 용도로 활용해왔다.
꺾을 수 없는 정의와 연속 찌르기, 그리고 스피어 샷 모두 지금의 그리드에겐 ‘없어도 되는 스킬’인 것이다.
검무 사용에 딜레이가 있고 보유 스킬 종류가 적음에도 지금보다 자원 한계가 컸던 과거엔 비장의 한 수라고 포장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스킬 칸 낭비.... 시스템의 객관적인 평가군.’
그리드가 쉽게 얻은 것은 없다.
꺾을 수 없는 정의, 연속 찌르기, 스피어 샷 모두 고군분투한 끝에 얻었던 스킬들이니만큼 애착이 깊었다.
하지만 이제는 애착을 버릴 때가 왔다.
*3개의 스킬을 합성해 1개의 새로운 스킬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초월자의 격이 발생시킨 시스템.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스킬은 초월자가 애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높은 효용성을 자랑할 터.
‘받아들이자. 하지만 이번 전투가 끝난 후에.’
지금 당장 기존의 스킬을 버리고 새로운 스킬을 얻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새로운 스킬이 어지간히 단순하지 않는 이상 그리드의 오성(悟性)으로는 즉시 적응하기 어렵다.
최후의 전투를 눈앞에 둔 지금은 본래의 실력을 갈고닦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냥핫핫! 지옥 같구나, 지옥 같아!”
“.....”
그리드는 복기했다.
조금 전 양반들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고 궁리하며 단점을 죽이고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애썼다.
이건 습관이다.
한 번이라도 거르면 불안해 손이 떨릴 지경의.
“지옥 같아냐아앙!!”
“조용히 좀 해라.”
잔뜩 신난 노에가 계속 시끄럽게 떠들자 참다못한 그리드가 어포를 집어던졌다.
기껏 집중하기 위해서 소환한 호위가 도리어 집중을 방해했으니 웃기지도 않았다.
‘신난 이유야 이해된다만.’
앞서 걷는 현무의 등껍질에 시선을 고정했던 그리드가 애써 외면해온 주변의 풍경을 둘러봤다.
지금은 어포에 정신 팔린 노에의 표현대로 이곳은 지옥이었다.
부를 과시했던 찬란한 문명도, 활력이 넘쳤던 거리의 사람들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멸망한 도시의 풍경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잔혹했다.
지옥 출신의 마수인 노에 입장에선 고향에 온 기분일 것이다.
....지옥 출신 마수치고 바다생선을 좋아한다는 게 웃기지만.
바스락.
어느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밟자 재가 되어 흩어진다.
“.....”
그리드의 가슴이 지끈 아파왔다.
갑작스러운 재앙을 피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으니까.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전부 다 내 잘못이다.’
브라함이 대량 살상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시를 초토화시킨 이유는 오직 그리드를 위함이었다.
그리드가 앞길을 열어 달라 부탁했기에 브라함은 최선의 결과를 도출했을 뿐이다.
그래, 이 지옥을 만든 당사자는 다름 아닌 그리드 자신이었다.
‘....미안하다.’
끓어오르는 죄책감을 단 한 마디의 사과로 털어낸다.
게임과 현실을 구분한다.
이기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평소의 그리드는 NPC를 인간처럼 존중하고 아꼈으나 경우에 따라서 예외를 뒀다.
대상이 ‘적’, 혹은 ‘타인’일 경우.
이런 경우 그리드는 NPC를 인간이 아닌 그래픽 덩어리로 인식하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쉽게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그렇기에 여태껏 그 많은 적들을 베어올 수 있었다.
누군가는 염치없고 소름 돋는 놈이라고 비웃겠지만 그리드는 당당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텐데 어쩌라고.’
애초부터 나는 ‘내 사람’만을 소중하게 여겼던 이기적인 놈이다.
필요 이상의 잣대를 들이대지 마라.
“....?”
마음을 독하게 먹고자 애쓰며 걷던 그리드가 제자리에 멈칫 섰다.
용케 무사한 누각들 사이에서 대량의 인기척을 느낀 까닭이었다.
스팟!
반사적으로 신속한 몸놀림과 대장장이의 분노를 전개한 그리드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여자, 남자, 아이, 어른, 노인을 구분하지 않는 수천 명의 인파를.
“히, 히익!”
“....당신들은 누구지?”
멍해진 그리드가 묻자 하나 같이 겁에 질린 사람들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저, 저희는 이곳 차오즈의 주민입니다.”
“....!”
“해, 행색이 하나 같이 낯선 것을 보아 이국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혹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십니까?”
“저희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을 뿐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른다 싶더니 장소가 바뀌어 있었어요.”
“모두 당황해 서로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려는데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도시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곧 괴수가 나타나더니 밤이 찾아와 저희는 뭘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이곳에 멀뚱멀뚱 숨어있을 수밖에....”
울컥.
사정을 헤아리게 된 그리드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브라함의 호의를 읽은 것이다.
‘브라함 당신.... 내가 또 같잖은 죄책감에 휩싸일 걸 알고....’
매스 텔레포트로 민간인들을 피신시킨 건가.
전설의 대마법 메테오를 사용하는 와중에도?
“빌어먹을....”
템빨국 공인 텔셔틀 스틱세이는 말했었다.
매스 텔레포트는 크게 3종류로 나뉜다.
첫째, 시전자와 시전자의 주변 반경에 있는 대상을 단체로 이동 시키는 매스 텔레포트.
일반적으로 알려진 매스 텔레포트다.
스틱세이가 애용하는 마법이기도 했다.
둘째, 시전자가 지정한 범위 내에 있는 대상을 단체로 이동 시키는 매스 텔레포트.
일반적인 매스 텔레포트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다. 이 마법의 술식을 완성할 수 있는 인간은 전설의 대마법사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셋째, 시전자가 특정한 대상을 단체로 이동 시키는 매스 텔레포트.
관념을 실체화시키는 궁극의 마법이다.
보통 10위권에 드는 상위 대악마들이 애용한다고 한다.
‘자신을 따르는 악마들’을 대상으로 지정해 인계로 날려버리는 형태로.
혼혈종 중에서도 브라함과 마리로즈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궁극의 매스 텔레포트는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했다.
스틱세이가 마리로즈의 위험성을 경고할 때 설명했던 내용들인데 이 순간을 위한 복선이 되어줄 줄은 몰랐다.
“잠시 이곳을 떠나계시오. 이곳은 곧 더 큰 전화에 휩쓸릴 테니.”
그리드가 굳이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뻐끔뻐끔.
현무가 주둥이를 우물거리자 검은 액체의 방울들이 퐁퐁 튀어나오더니 주민들의 몸을 감쌌다.
“어맛!”
“허어!”
검은 방울에 휩싸인 주민들의 옷과 소지품이 모조리 재로 변해 사라졌다. 하지만 다행히 방울의 색이 검어서 밖에선 그들의 알몸이 보이지 않았다.
둥실둥실.
주민들을 태운 방울들이 하늘 위에 떠올랐다.
“우와아....”
주민들은 겁먹지 않았다. 도리어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끼며 방울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내가.... 지켜줄게....』
현무의 어렴풋한 목소리가 차오즈 주민들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그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옛 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혀, 현무 님....”
거북이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알아본 주민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현무에게 다가가고자 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을 태운 방울은 더욱 높이 날아올라 차오즈 외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고마워....』
“아니, 저들을 구한 건 내가 아니라 내 친구야.”
눈을 끔뻑이며 인사하는 현무에게 자랑스럽게 웃어준 그리드가 다시 길을 걸었다.
현무는 그리드와 랭커들을 궁궐로 안내했고 궁궐의 풍경 또한 도심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많은 것이 무너져 있었다. 죽은 병사들이 흘린 피가 대지를 붉게 적신 상태였다.
“으으....”
그리드의 뒤를 따라 걷는 하이랭커들이 몸을 움츠렸다.
그리드와 싸웠던 양반들의 무위를 상기하자 덜컥 겁이 나는 것이었다.
우리가 과연 도움이 될까.
한 순간의 감정으로 평생 후회할 미친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이내 단념한다.
그들이 그리드를 따라나선 이유는 은혜를 갚기 위함도 있지만 개인의 권리를 위해서기도 했다.
도담의 적의를 받았던 시점부터 그들은 <하늘의 부름> 퀘스트의 실패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레벨 4 하락의 페널티를 겪었다는 뜻이다.
억울했다.
만회해야만 했다.
반드시 복수하고 싶었다.
‘네놈들이 먼저 우리를 희생양으로 이용한 주제에.’
‘단지 방관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적대하다니, 거지같은 양반 놈들.’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괘씸한 놈들이다.
하이랭커들이 재차 결의를 다지는 그때였다.
『지금이야.』
폐허가 된 성터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작은 궁전.
현무를 봉인했던 백색의 사각 건물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그 건물 앞에 일행이 도착하자 갑자기 주변에 냉기가 휘몰아쳤다.
이어서.
『싫어....! 싫어엇!!』
또 다른 현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드와 하이랭커들의 시야에 각기 다른 알림창이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 <현무의 수호자>가 발생합니다!]
[협동 퀘스트 <복수>가 발생합니다!]
콰아아앙!!
그나마 멀쩡했던 궁전의 천장을 꿰뚫고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랐다.
아름답고 신비한 구슬.
현무를 가두고 있는 사신기, 현무보옥이었다.
“어딜!”
현무보옥을 노리고 뛰어오르는 양반들을 발견한 그리드가 급히 버프 스킬을 전개하고 날아올랐다.
이미 3명의 양반과 싸워서 이긴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가람과 동격의 존재를 마주하기 전까진 말이다.
“하핫, 뭐야? 어떻게 다들 무사한 거야?”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드의 몸은 이미 지면에 처박힌 상태였다.
꿈틀꿈틀.
갑자기 후두부를 강타한 충격을 떨쳐내지 못하고 움찔거리던 그리드가 힘겹게 고개를 들자 마루라는 이름의 양반이 팔짱을 끼고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발의 마족이 너희를 지켜준 거야? 스스로를 희생해서?”
“뭐...?”
“....?”
그리드의 눈이 악귀처럼 변하자 긴장감 하나 없이 떠들던 마루가 움찔 놀랐다.
끼릭!
지면에 처박힌 그리드는 불꽃을 당기고 있었다.
아니, 저건 활이다.
불꽃을 태우는 활.
아이템 복제 스킬로 재현한 주작궁이 주작의 9번째 심장에 반응해 종전과 차원이 다른 기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날아오르라!!”
“큭....!”
현무보옥을 챙기고 있던 양반들과 그들을 등진 채 그리드를 마주보고 있던 마루가 떨어지는 불의 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