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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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57권 - 01화
[서사시의 다섯 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사시의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높아진 격을 토대로 스스로의 결점을 점검합니다.]
[보유 중인 스킬 중 사용 빈도가 적은 스킬들이 존재함을 파악합니다.]
[사용 빈도가 적은 스킬들을 하나의 스킬로 취합할 필요성을 자각합니다.]
[<스킬 합성>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신위 스탯이 1 올랐습니다.]
‘어?’
초월자의 격을 쌓을 때마다 그리드는 감각이 발달하고 육체 능력이 강화되는 보상을 얻었었다.
완전한 초월자란 보다 뛰어난 감각과 육체를 지닌 존재를 칭하는 거라고 당연히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제 보니 살짝 오해한 듯했다.
‘궁극의 초월자란 단지 강한 수준을 넘어서 무결점의 존재인 건가?’
그리드는 <신살자>에서 언급됐던 ‘절대자’의 경지를 상기했다.
일반적인 경로로 절대자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초월의 격을 최대치까지 쌓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해 보였었다.
‘절대자라……. 결점이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해 보이는 이름이긴 하군.’
<스킬 합성>
사용 빈도가 가장 적은 스킬들을 선택해 하나의 새로운 스킬로 재탄생시킵니다.
사용 가능 횟수:1/1
사용 가능 횟수는 초월의 격이 3단계 성장할 때마다 늘어납니다.
“음.”
스킬에 대해서는 안 그래도 오래전부터 문제를 자각해 왔다.
아무리 강한 스킬을 많이 보유해 봤자 자원 부족과 재사용 대기 시간 문제, 그리고 지각의 한계로 전부 다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던 그리드의 입장에선 새로운 스킬을 얻을 때마다 기쁨과 부담감을 함께 느껴야만 했다.
이러다가 몇 개 스킬은 괜히 스킬 칸만 낭비하는 쓸모없는 것들로 전락하는 게 아닐까 염려했을 정도.
‘하지만 이제 걱정할 필요가 사라졌군.’
스킬 합성의 효과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진 섣불리 재단해선 안 되겠지만, 어쨌든 스킬 합성 시스템의 활성화는 엄청난 희소식이다.
초월의 격의 끝은 어디일까…….
그리드가 생각하는 동안 세상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현무의 등껍질에 달려 있던 화구가 닫히자 독무의 분출이 멈추고 어둠이 걷혔다.
다시 드러난 하늘은 맑고 파랬다.
그토록 길었던 악몽 같은 시간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낮인 것이다.
“…….”
그리드의 손에 뺨을 기댄 현무의 몸이 작아지고 있었다.
태산보다 거대한 몸집으로 도시를 압살했던 ‘옛 신’이 급기야 그리드보다 작아져 영락없는 거북이가 되었다. 길게 뻗어 나와 흉측했던 뱀의 대가리가 앙증맞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옛 신…….’
제3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교감을 나누고 있을 그리드와 현무를 바라보는 하이랭커들의 가슴이 요동쳤다.
그리드의 서사시를 통해서 현무의 정체를 파악한 그들은 이제 막 알게 된 진실들을 되짚어 보았다.
첫째, 동대륙의 신화는 대부분 거짓이다.
둘째, 거짓 신화의 주인은 양반이며, 언제부턴가 잊힌 진짜 신화의 주인은 사방신이다.
셋째, 그리드의 네 번째 서사시와 다섯 번째 서사시에서 언급된 ‘멸망할 세계’라는 것은 동대륙을 뜻하는 것이었고 멸망의 주체는 양반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양반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려고 했군.’
‘설령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신과 적대할 생각은 꿈에도 못했겠지만 말이지.’
‘하지만 그리드 너는 혼자서 싸워 온 거냐.’
모든 인간의 성격이 다르듯이 하이랭커들의 성격도 저마다 다르다.
설령 동대륙이 멸망한다 해도 이를 동정하기보다 괘념치 않을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양반의 실체를 알았다고 해도 상황에 따라서 양반의 편에 설 사람도 많았다.
원래는 그랬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도운 건 단지 도리를 행했을 뿐이야.”
지금 하이랭커들의 숨통이 붙어 있는 이유는 그리드가 행한 도리 덕분이다.
하이랭커들은 도리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
본래라면 호구 취급 받기 딱 좋은 길이다.
도리, 인정, 선행 등의 개념은 구시대적 관념이 된 지 오래였으니까.
현대 사회는 자신의 손익을 따지지 않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비웃어 왔다.
하이랭커들도 당연히 마찬가지였다.
물론 예외도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하이랭커들은 손익을 철저히 계산해 왔기 때문에 하이랭커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에 한 번쯤은 손해를 감수해도 되지 않을까?
“어이, 그리드.”
“……?”
“이번 한 번만.”
“딱 이번 한 번만 우리도 너를 돕고 싶다.”
“뭐?”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게 도리잖아. 안 그래?”
“…….”
하이랭커들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한 그리드가 잠시 말문을 닫았다.
너희들의 자질이 말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양반을 감당할 만한 실력은 못 된다.
당장의 기분에 휩쓸려서 나와 함께했다간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러 가지 말들이 그리드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리드는 끝내 이를 삼켰다.
하이랭커쯤 되는 인물들이 사리분별 못할 리 없었으니까.
그래,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후회하게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를 돕겠다는 것이다.
게임이라는 단 하나의 분야에 열중하고 최고가 된 인물들이니만큼 나름 순수한 면이 있다는 뜻일 테지.
“…마음대로 해라.”
벅찬 감동을 억누르고 피식 웃은 그리드가 하이랭커들과 나란히 섰다.
그리고 곁에서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현무에게 말했다.
“당신의 반쪽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줘.”
끄덕.
대답하듯이 고개를 끄덕인 현무가 아장아장 앞장서 걸었다.
***
“우사께서 기뻐하시겠군.”
살얼음 위를 걷는 발걸음이 신비하다.
성큼성큼, 거침없이 나아감에도 깃털처럼 가벼워서 옅게 언 얼음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았다.
“현무의 수기를 완전히 잠재우면 우사께서 홀로 생명의 탄생을 통제하실 수 있을 테니.”
털썩, 얼음으로 미끄러운 욕조 위에 대충 걸터앉고도 균형을 잃지 않는 양반의 이름은 마루였다.
옷차림이 단정한 다른 양반들과 달리 옷섶을 풀어 노출한 그의 복근은 탄탄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절대영도를 사용 후 다시 마나를 모으고 있던 봉드레가 그를 힐끔힐끔 훔쳐보자 마루가 빙그레 웃었다.
“인간이 현무의 수기를 얼리다니 실로 대단하구나. 지금의 실력을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하였겠구나.”
“가, 감사합니다.”
봉드레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상대는 신.
그래픽 덩어리에 불과한 인공지능이라고 인식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리드, 페이커, 아그너스처럼 자신에게 좌절감을 안겨 줬던 거물 플레이어들조차 평생토록 도달하지 못할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눈앞의 마루였다.
‘NPC에게 감정이입하는 놈들의 심정이 이해 가는군…….’
NPC를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정신이상자들이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히 증가했다.
봉드레가 기억하기론 그리드가 NPC와 혼인했다는 소식이 이슈가 됐던 이후부터였다.
봉드레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NPC를 동료, 친구, 연인으로 여기며 소중히 다루는 놈들과 인형하고 소꿉놀이하는 5살짜리 꼬맹이들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여러모로 다른 감상을 느꼈다.
양반들에게 압도당할 때마다 현실과 게임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이상자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게임… 맞나?’
머잖아 지구와 충돌할 거라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운석이 어떤 알 수 없는 우주의 힘을 끌어와 현실과 게임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게 아닐까?
‘비상식적’인 형태로 출현했다는 운석.
언젠가부터 거짓말처럼 소식이 사라진 그것을 떠올리며 별 해괴한 상상을 다 해 보던 봉드레가 마침 가득 차는 마나를 느꼈다.
그러자 절대영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왔다.
신의 가호 덕분이다.
아름이 붙여 준 어떤 부적의 효과로 인해서 봉드레의 마나 회복 속도는 기존보다 3배 이상 높아져 있었고 마나가 가득 차는 순간 ‘모든 마법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되는 기적과도 같은 버프를 얻고 있었다.
마루와 아름을 비롯한 양반들의 시선이 봉드레에게 집중됐다.
학예회에서 재롱떠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에 잠시 불쾌해지는 봉드레였지만 이내 다시 양반들의 존재감에 압도당하며 2개의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했다.
아이스 프로즌과 절대영도였다.
플레이어 중 4번째로 더블 캐스팅의 영역에 진입한 봉드레는 아이스 프로즌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전체에 절대영도의 효과를 적용하는 극의를 창안할 수 있었다.
발할라의 국왕, 군신 아레스가 뒤늦게 자신의 군단에 합류한 봉드레를 애지중지하는 이유다.
쩌적!
쩌저저저저저저적!!
대리석 위에 새롭게 스며 나오던 습기부터 시작해서 얕은 웅덩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완전하게 얼어붙어 간다. 욕조 안에 가득 찬 물의 표면에도 살얼음이 얼었다.
봉드레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피로감에 진이 빠지는 반면 아름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생기가 번졌다.
“생각보다 빠르겠어.”
그녀가 걸터앉아 있는 욕조 속에는 시신 수십 구가 얼어붙은 채 누워 있었다.
수백 년 된 미라처럼 거죽이 늘어진 그 시신들은 얼음 술법에 능통했던 도사들의 것이다.
봉드레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현무의 수기를 억누르고 있었던…….
***
“도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요?”
뼈를 시리게 만드는 냉기에 휩싸인 지하 수로.
고드름이 빼곡하게 내려앉은 천장을 올려다본 채 골똘히 생각하는 황길동을 노검마가 재촉했다.
“어서 시작합시다. 이러다가 뭘 해 보기도 전에 얼어 죽겠소.”
“거참 엄살이 심하시오.”
혼자서만 곰 가죽을 뒤집어쓴 주제에 노검마에게 핀잔을 준 황길동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네 번. 네 번 더 얼음이 얼면 그때 나서는 것이 좋겠소.”
“왜 하필 네 번이요?”
얼음은 3분 간격으로 얼고 있었다.
남극처럼 추운 이곳에서 족히 15분을 더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건데 냉기 저항력이 낮은 노검마의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쯤 되면 현무가 위기를 감지하고 한 번쯤 눈을 뜰 것 같아 그렇소. 현무보옥에 봉인당해 있다고는 하나 절체절명의 위기쯤은 감지할 수 있을 테니.”
노검마가 곰 가죽 속에 은근슬쩍 밀어 넣는 손을 슬며시 밀어낸 황길동이 씨익 웃었다.
“찰나의 혼란을 노리고 잠입해 현무보옥을 반드시 탈취합시다.”
“…….”
알면 알수록 얄미운 인간이다.
끝까지 곰 가죽을 독차지하는 황길동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봐 준 노검마가 한참 동안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지금쯤 밖은 완전히 초토화됐겠지.’
지하 수로에 잠입하기 전, 노검마는 정체불명의 백색 사각 건물에 모였던 하이랭커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뻔히 양반들에게 이용당했을 그들은 죽어도 이미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이참에 양반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깨닫고 두 번 다시는 동대륙에 발을 들이지 않기를 추천하네.’
하이랭커들의 명복을 비는 노검마의 귓전에 황길동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미리 퇴로를 물색하고 계시는 거요?”
“왔던 길을 되돌아봤을 뿐이오.”
“거긴 우리가 왔던 길의 정반대요.”
같은 시각, 차오즈의 외곽.
“…망신이군.”
상처투성이가 된 브라함이 주저앉아 있었다.
꿀럭, 피를 토하며 잘려 나간 오른쪽 팔을 마법으로 회수한 그가 절단면을 살펴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으로도 봉합이 힘들 만큼 절단면이 엉망인 까닭이었다.
“퉤.”
두 번이나 겪었던 영혼의 타격으로 말미암아 너무 약해진 게 문제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혐오감마저 느낀 브라함이 피 섞인 침을 뱉어 낸 자리엔 갈기갈기 찢겨져 걸레 조각으로 전락한 일곱 벌의 청룡도포가 흩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