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23화
보물이 있어야할 공간에서 튀어나온 저 괴물은 양반들의 권속이 맞는 걸까?
같은 편이라고 보기엔 괴물의 태도가 여러모로 이상하다.
그리드를 적대하지 않을뿐더러 양반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돕지 않았다.
“일단 저 괴물은 제3세력이라고 추측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아도....”
“웃기지 마. 네가 동대륙의 신화를 잘 모르나본데 사방신은 양반들을 섬기는 신수야. 무조건 양반들의 편이라고.”
“넌 아직도 저게 현무로 보이나?”
“대가리 위에 떡하니 현무라는 이름을 띄우고 있는데 그럼 현무가 아니고 뭐냐?”
“달라. 사방신의 벽화 속 현무는 푸른 눈이 아름다운 백사의 머리를 달고 있었다. 신비롭고 신성한 느낌이었지 저런 끔찍한 몰골이 아니었어.”
“그럼 뭐 저게 가짜라도 된다는 거야?”
“당연히 가짜죠. 성스러운 신수가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을 리 없잖아요. 실제로 양반들의 위기를 외면하고 있잖아요.”
“.....”
“우리가 설령 양반을 적대한다고 해도 저 괴물이 우리를 표적으로 삼을 리 없어. 우리는 선택해야 된다.”
지켜야할 보물 대신 괴물이 튀어나온 시점부터 하이랭커들은 양반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양반들에게 입맛대로 이용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자존심 강한 하이랭커들의 입장에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러던 차에 홀연히 나타나 양반들과 싸우는 그리드의 모습을 보았으니 여러모로 혼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부바트처럼 그리드를 도와야 돼.”
“레벨 4개를 잃어가면서까지? 무슨 의리로?”
랭커들의 의견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상황의 추이를 조금 더 지켜봐야한다는 의견과 양반들에게 배신당하기 전에 먼저 배신하고 그리드의 편에 서자는 의견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의견이 갈릴 일도 없었다.
굳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리드의 편에 설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좀 특별했다.
“그리드는 퀘스트 버프를 받고 있는 상태야. 시스템이 그리드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고.”
“....확실히.”
랭커들은 ‘백발 그리드’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회상했다.
퀘스트 버프로 강화됐던 백발의 그리드는 야탄의 첫 번째 종을 손쉽게 학살했다.
야탄의 첫 번째 종이 죽어야만 진행되는 에피소드가 존재하기에 시스템이 그리드에게 힘을 실어준 케이스였다.
시스템의 가호라는 것이다.
하이랭커들도 한 번쯤은 겪어본 일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 그리드가 반신을 살해했다는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었지. 그때 신과 대적할 수 있는 힘을 한시적으로 얻은 게 분명해.”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리드가 신과 싸워서 이겨야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여 그리드에게 버프를 내린 것이다.
“지금의 그리드를 적대하는 건 엄청난 위험이 동반된다는 뜻이야. 만약 우리가 양반의 편에 서서 그리드가 퀘스트에 실패하게 되면 시스템이 그리고 있던 세계관이 붕괴되고 우리에게까지 화가 미칠 여지가 있어.”
“단순히 4개의 레벨을 잃는 것보다 뼈아픈 손실이 생길 수도 있겠군....”
지존 그리드는 하이랭커들조차 평생을 바쳐도 이룰 수 없을 업적들을 수없이 남겨온 인물이다.
그가 진행 중인 퀘스트 내용이 평범할 리 없다.
세계관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임무를 부여받았기에 신과 대적할 정도의 힘을 시스템에게 부여받은 것이다.
하이랭커들의 사고는 거기까지 쉽게 도달했다.
하지만 섣불리 선택하진 못했다.
그리드의 편에 설 경우 발생할 페널티가 너무 컸다.
레벨 4 하락...
복구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한 페널티다.
하이랭커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그때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이랭커들은 반사적으로 보호 스킬과 마법을 전개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반면 그리드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갑작스러운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진 하이랭커들을 도담이 노려봤다.
“너희들은 곧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
“....!”
그리드를 도운 부바트를 원망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던 우리에게까지 적개심을 품는다고?
하이랭커들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양반들의 편으로 남겠다는 선택지를 잃게 됐다.
‘우리를 쉽게 버리는 걸 봐선 처음부터 버릴 생각이었던 게 맞군.’
‘처음부터 싸워야할 운명이었던 거야.’
생각하며 무기를 고쳐 쥐던 하이랭커들이 움찔 놀랐다.
짙은 흙먼지 너머에서 번쩍이는 뇌광을 목격한 까닭이다.
그리드와 오크로드 테루찬의 격전을 목격했던 하이랭커들은 저 뇌광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파지직!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뇌광이 도담을 관통했다.
휘청.
도담의 신형이 무너졌다.
목에서 피를 뿜은 그가 경악성을 토했다.
“뇌....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다섯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잊힌 신화의 회상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콰르르릉!
[그는, 잊힌 신을 재현하였다.]
[거짓 신화로 덧칠된 땅 위에 진실의 낙인을 새겼다.]
“....!!”
하이랭커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양반들을 관통하고 지나가며 청룡의 형상을 만드는 그리드의 행동을 따라서 써내려지는 서사시가 그들을 전율시켰다.
그리드의 서사시를 실제로 목격하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가....
테일렌 협곡에서 목격했던 최초의 서사시 이후 처음이다.
하이랭커들은 심지어 감격마저 느꼈다.
자신들이 그리드를 대체 얼마나 선망해왔는지 새삼 실감했다.
반면 그리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사시가 왜?’
숙적 가람을 쓰러뜨렸을 때도, 사방신 중 하나인 주작을 부활시켜 초국의 역사를 크게 바꿨을 때도 서사시는 반응이 없었다.
그 탓에 그리드는 서사시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는 훨씬 더 큰 업적을 세워야만 새로운 서사시가 써질 거라고 예상했었다.
한데 고작 한결 수준의 양반 3명을 해쳤다고 새로운 서사시가 써내려지다니?
‘대체 기준이 뭐야?’
[양반 ‘도담’을 해치웠습니다.]
[양반 ‘나길’을 해치웠습니다.]
[현무의 숨결을 2개 획득하였습니다.]
[백호의 숨결을 1개 획득하였습니다.]
[청룡의 숨결을 1개 획득하였습니다.]
[청룡의 도포를 2벌 획득하였습니다.]
[부러지지 않는 연검을 2개 획득하였습니다.]
“....?!”
도담과 나길을 잿빛으로 산화시키고 검을 회수하던 그리드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오싹 놀란 그가 고개를 들어 2개의 붉은 태양을 보았다.
거대한 현무의 눈이었다.
‘언제부터?’
현무는 등장 이후 계속 하늘을 향해서 포효할 뿐이었다.
인지 없는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이 순간 뚜렷한 감정을 품은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크윽....”
그리드가 뒷걸음쳤다.
공포로부터 비롯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현무의 거대한 눈동자에 깃든 수백수천 가지의 감정 중 가장 명확한 것은 증오와 분노였고 그리드에게는 이를 마주볼 용기가 부족했다.
무려 신의 분노다.
보고만 있어도 저주를 받을 것만 같았다.
아이템 강화 확률과 득템 확률이 0퍼센트대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이 생길 정도로 현무의 시선에는 강력한 저주가 담겨있는 듯했다.
‘더럽게 살벌하네.’
주작은 한없이 따스했던 반면 현무는 한없이 차갑다.
인간쯤이야 살기만으로 갈기갈기 찢어죽일 기세다.
이건 아무리 봐도 사방신이 아니다.
그리드가 재차 생각하는 그때였다.
『신살자.』
어둡고 차가운 음성이 그리드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현무의 목소리였다.
『네가 주작을 먹었구나.』
‘주작을 먹어?’
갑자기 황당한 헛소리를 듣자 어이없어하던 그리드가 이내 말뜻을 헤아렸다.
‘내가 주작의 심장을 품은 것을 보고 오해하는 건가?’
십이지들은 말했다.
주작의 9번째 심장은 주작의 근원 중 하나로 주작의 목숨 그 자체라고.
오존조차도 그것은 취할 수 없었다고.
그런 중요한 심장을 품고 있는 인간이 나타났으니 현무가 오해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
그리드가 뭐라고 설명할 틈도 없이 현무가 이어 말했다.
『지상에 얽히는 불꽃과 격류를 보며 떠올렸다.』
서사시에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그가 새긴 진실의 낙인이 옛 신의 기억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나’는 없어도 되는 신이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었던 사람들이 만든 ‘우리’의 석상이 ‘나’의 숨결에 닿아 무너져 내렸던 광경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지상에 축복을 속삭일 때마다 인류는 문명을 잃었고 사람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있어선 안 되는 신이었다.』
『‘나’는 ‘우리’를 위해서 ‘나’를 지우고 싶었다.』
[상처 입은 옛 신의 바람이 그에게 닿았다.]
『나는 영원히 눈 감고 싶었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을 가두는 구슬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하지만 구슬은 깨어졌고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다시 들추게 되었으니 심히 괴롭다.』
『살신의 업을 쌓은 인간이여. 주작을 삼켰듯이 나 또한 삼켜다오.』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파괴신 죽이기>
퀘스트 난이도:???
사방신 현무의 반쪽 자아가 소멸을 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숨통을 끊어주길 바랍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현무의 반쪽 자아 살해, 혹은 봉인.
퀘스트 클리어 보상:칭호 <신살자> 획득.
<신살자>
신을 죽인 ‘절대자’입니다.
초월의 격이 최대치로 성장하고 모든 공격력이 2배 상승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뭔 소리야?”
[퀘스트를 거부하였습니다.]
『....?』
“난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안 돼. 다만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어. 당신은 누구보다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신이었다는 거야. 십이지들이 한 말이니까 확실해.”
『....아니다. 십이지들이 말한 ‘나’는 내가 아닌 ‘우리’를 뜻하는 것이었을 터다.』
자기 자신을 불신하는 현무의 태도를 통해서 그리드는 눈치 챘다.
어째서 서사시가 발동했는지.
그리드의 과거와 현재 모두를 목격하고 데이터화시킨 시스템은 그리드야말로 현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
“더 길게 말해봤자 소용없어.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당신을 해칠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까.”
『나를 죽이면 너는 절대적인 힘을 얻을 수 있....』
“세상사람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
[그는 옛 신의 바람을 외면하였다.]
[누군가를 희생시켜 얻는 힘은 그가 원하는 힘이 아니었기에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봐. 내가 당신이 사람들하고 재회할 수 있게끔 도와줄게. 그러니까 일단 진정해.”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여러 인연의 도움을 받아 올곧게 자라난 나무가 새로운 가지를 뻗는 순간이었다.]
[아직은 작은 가지였다.]
『.....』
그리드가 내미는 손을 현무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건드리면 톡하고 부러질 것만 작디작은 손을 뭐 어쩌라고 내민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현무의 표정을 읽은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안 부러져. 잡아.”
『....』
쿠우우웅!!
한참을 망설이던 현무가 무릎 꿇었다.
점처럼 작은 그리드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리드의 손에 뺨을 대었다.
『제발.... 제발 도와줘라, 인간. 나의 반쪽 자아가 아주 깊고 위험한 곳에 봉인된 채 양반들의 꼭두각시로 이용당하고 있다.』
[상처 입은 옛 신이 작은 가지에 기대었다.]
“나만 믿어.”
[가지는 부러지지 않았다.]
[멸망할 세계를 지탱할 희망은 아직 작지만 단단했다.]
....
...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서사시의 다섯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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