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18화
“이곳에 우리가 지켜야 할 보물이 있는 건가요?”
“보물이라는 게 사신기라지? 사신기 중에서도 현무보옥일 텐데 취급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사항 있소? 예를 들어서 불을 멀리해야 한다든지.”
“적의 용모파기는 전혀 없는 겁니까?”
“적의 침입이 발생할 시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근처에 적의 침입을 저지할 함정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설치해 두었죠?”
사각의 건물.
출입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 괴상한 구조물 곁으로 안내받은 랭커들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혼란과 격분은 모두 잠재운 상태였다.
레벨 4 하락의 페널티…….
어디까지나 퀘스트를 ‘실패’했을 때 발생하는 페널티니만큼 동요할 필요 없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대답을 좀 해 주시죠.”
지피지기는 가장 기본적인 승리 공식이다.
한데 정작 의뢰인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가장 협조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의뢰인이 의욕적이지 못한 건 심각한 문제였다. 애써 마음을 바로잡고 퀘스트에 임하고 있는 랭커들의 의욕까지 꺾어 버리는 태도나 다름없었다.
‘뭐 어쩌자는 거지?’
의뢰인.
연병장부터 이곳까지 랭커들을 안내한 흑발의 미녀 ‘아름’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랭커들의 속마음은 타들어 갔다.
성격이 사나운 사람은 아름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고 싶다는 욕망마저 느꼈다.
하지만 차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름의 이름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부분의 랭커가 그녀의 복식을 보고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양반이다.
동대륙의 신.
플레이어는 결코 넘보지 못할 무력과 권력을 거머쥔…….
얼마 전 그리드가 쓰러뜨렸다는 ‘정체불명의 반쪽짜리 신’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인 것이다.
“후우.”
허벅지부터 트여 있는 청색의 도포를 펄럭인다 싶더니 곰방대를 꺼내 문 아름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뭔가 영 꺼림칙한 눈치다.
아무래도 그녀는 지금 이 상황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는 듯했다.
“고작 인간들이 시선을 나란히 맞추는 것으로 모자라 질문을 일삼고 대답을 재촉하다니 난감하구나. 마음이 영 불편해.”
‘지랄하고 있네.’
아름의 불손한 언사에 랭커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양반이 등장하면 하던 일도 멈추고 절부터 올리는 동대륙인들의 풍습은 그들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대륙인들의 풍습이다.
애초에 랭커들은 양반이 존경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간을 가축처럼 취급하는 광경을 몇 번이나 목격해 왔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정중히 대하는 중인데 아름은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랭커 몇 명이 대놓고 똥 씹은 표정을 짓는 바로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무지몽매하여 동방의 문화를 모르고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한기에 둘러싸인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아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어서 로브를 벗는 그의 정체는 자리의 모두가 이미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한낱 인간 따위에 관심 없으시겠지만, 오래전부터 풍문으로 듣고 선망해 온 신께 눈도장을 찍고 싶은 심정으로 본인을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봉드레. 얼음의 주술을 다루는 도사입니다.”
“얼음의 주술이라…….”
봉드레 덕분에 자칫 험악해질 수 있던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담배 연기 뱉는 것을 핑계로 계속 한숨 쉬던 아름이 곰방대를 다시 품에 돌려 넣더니 봉드레에게 흥미를 보였다.
“너에게는 따로 맡기고 싶은 일이 있으니 따라오너라.”
“저희는……?”
“너희들은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 된다. 이건 침입자의 얼굴이다.”
덩그러니 남겨지게 생긴 랭커들이 당황해서 묻자 아름이 그들에게 초상화 한 장을 던져 주었다.
백발노인의 초상화였다.
주름진 얼굴에 기름기 하나 없어 메마른 고목처럼 보였으나 눈빛만큼은 생기를 잃지 않고 날카롭게 번뜩였으니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누구지?’
서방인이다.
한데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랭커들에게 아름이 설명을 덧붙였다.
“검사다. 풍사께서 이르시길 그자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우레가 터지고 폭풍이 휘몰아쳤다는군.”
‘이 비쩍 마른 노인이 그토록 파괴적인 검술을 구사한다고?’
다소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이는 랭커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단테 공……!”
“……?”
모두의 시선이 사내에게 집중됐다.
검사 랭킹 12위, 통합 랭킹 403위에 빛나는 방랑검객 렉플렉이었다.
“뭐야, 렉플렉? 저자를 알아?”
“알다마다. 글러시안 왕국을 떠돌 때 만났던 기연이다. 황금기 제국의 솔로 넘버 나이트였던 거물이야.”
“황금기 제국의……!”
“내가 정말 큰 도움을 받았었지. 하지만 이상하군. 그때 당시만 해도 단테 공은 노쇠한 상태였는데…….”
단테는 육신이 저물고 감각이 둔해져서 검의 위력을 끌어내기 힘들다고 토로했었다. 검보다 다루기 쉽고 적은 힘으로도 큰 위력을 발휘하는 메이스를 애용했을 정도였다.
한데 몇 년이 지난 지금 와서 폭풍과도 같은 검술을 구사했다고?
신의 주목까지 받을 정도로 위력 넘치는 검술을?
“설마 초월자가 된 건가……?”
“……!”
수백 명 하이랭커들과 양반 아름의 뇌리에 단테라는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단테의 이름을 되새길수록 템빨국에 있는 73세 노기사 단테의 혈색은 건강하게 변해 갔다.
“단테 공, 어째 점점 더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피아로가 연병장에서 연마 중인 단테를 보고 묻자 단테가 허허 웃었다.
“글쎄…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몸이 가볍소. 나라는 존재 자체가 견고해진 느낌이 들면서 의욕이 충만해지고 몸에 힘이 넘친다고 할까.”
“허……! 그것이 바로 농부들의 힘입니다!”
“농부들의 힘?”
“우리가 땀 흘려 재배한 쌀과 밀을 먹어 주는 사람들이 늘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땅 위 모든 농부들이 항상 그와 같은 바람을 품고 밭일에 매진하고 있지요. 특히 레이단의 농부들이 열정적입니다. 단테 공께서 건강해지신 이유는 레이단산 농작물을 드신 덕분일 겁니다.”
“허허, 일리가 있구려.”
“그렇지요. 하하하.”
그리드가 없는 동안 가우스 왕국을 정복하고 돌아온 피아로.
오래간만에 다시 농부의 삶으로 돌아와 마음을 치유하고 있던 그는 건강해진 단테를 보자 더욱 큰 행복을 느꼈다.
‘옛 동료와, 스승과 다시 함께하며 웃을 날이 찾아올 줄이야.’
이 모든 게 그리드 전하의 축복이다.
깊은 감사를 느낀 피아로가 기도했다.
‘무쌍하소서.’
***
[당신의 석상에 참배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입니다.]
[현재 <영웅왕 그리드의 석상>의 경배율은 최대치입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당신의 손재주 스탯이 30퍼센트 상승하고 아이템 제작 시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확률이 소폭 상승합니다. 또한, 검무 계열 공격 스킬의 시전 속도가 20퍼센트 빨라집니다.]
이제는 일상이다.
그리드는 며칠에 한 번씩 이와 같은 알림창을 목격하고 있었다.
손재주 상승과 검무 시전 속도 상승 버프가 사실상 영구히 적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리드는 자만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순간 사람들의 참배도 멈출 거라는 사실을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
알 수 없는 이들의 기도에 감사하며 고개 숙였던 그리드가 다시금 고개를 들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저 멀리, 사각형의 백색 건물이 보였다.
다시 봐도 이질적인 건물이었다.
고대 중국의 도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차오즈의 전반적인 풍경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경비도 무척 삼엄했다.
건물까지 향하는 모든 길목마다 중무장한 병사들이 가득했고 건물 근처에 복잡하게 배치된 구조물들에선 수상한 마력이 감지됐다.
“도사들을 복병으로 심어 둔 걸까요?”
“아니, 사람 대신 아티팩트를 설치해 놨군.”
브라함이 온갖 건물의 기와 끝마다 걸려 있는 홍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리드가 안력을 돋았다.
모든 홍등에 각기 다른 색깔의 종이가 삽입돼 있었다.
‘부적…….’
한결과의 전투에서 그리드는 부적의 위력을 체험했다.
부적은 소모품이라는 점 외엔 딱히 단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아티팩트였다.
부적의 색깔, 부적에 쓰인 글씨에 따라서 보호, 차단, 공격, 저주 등 다양한 성능을 발휘했고 부적의 배치에 따라서 그 위력이 극대화되기도 했었다.
‘그런 부적을 수천 개나 깔아 놓다니…….’
역시 저곳이다.
저 기이한 사각 건물에 현무보옥이 보관되어 있다.
확신을 품던 그리드가 이내 의문에 휩싸였다.
‘아니, 너무 뻔한데? 오히려 함정 아닐까?’
누가 봐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물.
‘바로 이곳에 현무보옥이 있다’고 스스로 외치는 듯한 삼엄한 경비…….
너무 뻔해서 도리어 수상하다.
“…저거 함정이겠죠?”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스스로 생각해 봤자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으니 지공의 조언에 의지해 보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함정일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상대는 양반이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할 정도로 오만한 놈들이 현무보옥을 은밀한 곳에 숨겨 놨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군.”
브라함은 시대를 초월하는 강자, 바로 전설이다.
그렇기에 강자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꿰뚫는다고 자부했다.
“저건 함정이라기보다 도발일 것이다.”
“…….”
그리드의 귓가에 양반들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바로 이곳에 현무보옥이 있다.
빼앗을 수 있다면 어디 빼앗아 보아라…….
“…넘어가 줄 수밖에 없는 도발이군.”
그리드의 의욕이 들끓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건물로 날아가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진정했다.
그리드는 상기해야만 했다.
이번 목적은 승리가 아닌 정보의 수집이다.
적의 전력을 되도록 소상히 파악하고 향후 거사에 유의미하게 활용하는 것이 목표다.
지금은 사각 건물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브라함.”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브라함이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어 그리드에게 돌려줬다.
“길은 내가 열어 주마.”
“그리고 즉시 서대륙으로 귀환하세요.”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인피면구를 뒤집어썼다.
단테와 켄트릭의 얼굴은 이미 소비했으므로 잠시 고민하다가 아스모펠의 얼굴을 빚었다.
동대륙에서도 최북단인 이곳 차오즈에서 아스모펠을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아주 만에 하나 플레이어가 있더라도 아스모펠을 쉽게 알아보긴 힘들 테지.’
워낙 일개 병사로 분장한 채 활약한 경우가 많았던 아스모펠이다.
그리고 실제로 피아로, 메르세데스와 비교하면 활약이 적어서 그리드의 기사 중에 유명세가 가장 덜했다.
하지만 혹시 몰라 도살귀의 가면까지 착용한 그리드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의 시선은 오직 사각의 건물을 주시할 뿐이다.
길목마다 포진한 수천 명의 병사들과 건물마다 설치되어 있는 부적은 괘념치 않았다.
전설의 대마법사가 함께였기에.
“메테오.”
“…엥!?”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쾅!!
이건 과하다.
적의 수비 병력과 함정을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도시 자체를 파괴할 작정인가?
불타는 운석들이 도시 전체를 초토화시키는 광경에 기겁한 그리드가 브라함을 돌아보자 브라함이 재촉했다.
“어서 가라.”
“…당신은 피해요! 알았죠?”
지체할 때가 아니다.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여러 말을 간신히 억누른 그리드가 운석의 폭발 속에서도 무사한 사각의 건물을 시야에 담은 채 몸을 날렸다.
이어서.
“…사백이 아니군.”
그리드가 떠난 자리를 두 명의 양반이 대신했다.
하필 근처에 있던 양반들이 대주술을 발동한 술사를 포착하고 날아온 것이다.
자신을 낯설어하는 그들에게 브라함이 이죽거렸다.
“나를 누구라 착각하느냐. 우주의 별을 끌어올 수 있는 법사는 세상에서 이 몸이 유일하거늘.”
키이이이잉-
영창도 없이 소환된 바람의 톱날이 양반들의 몸을 베었다.
***
“응? 역시 아까 그곳에 현무보옥이 있는 거 아니오?”
황길동의 뒤를 쫓아 지하 수로를 달리던 노검마가 지상으로부터 들려오는 폭음에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황길동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냉기(冷氣)가 수기(水氣)의 범람을 막으니 얼음술사를 데려간 장소에 현무보옥이 있는 것이 맞소. 본디 양반이란 놈들은 음흉하기가 그지없어 눈에 보이는 대로 믿어선 안 되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