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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89화 (1,079/1,794)

템빨 56권 - 17화

“지금 밖이 난리야.”

“왜? 무슨 일인데?”

“피아로 장군님께서 정복하신 영토에 이주민이 가득 찼다는군.”

“가우스 왕국령이었던 영토들 말이야...? 벌써? 에이, 설마.”

“진짜야. 모든 마을과 도시들이 더 이상 이주민을 받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실정이래.”

“허.... 고작 한 달도 안 돼서 정복한 영토에 또 고작 한 달 만에 사람을 가득 채우다니.”

“그만큼 우리나라가 살기 좋다는 뜻이지.”

라인하르트 지하 감옥은 템빨국의 어둠이다.

구족을 멸해 마땅할 대역죄인을 수용하는 장소니만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다.

수감자에게 병아리를 지급해서 키우게 만든 뒤, 그 병아리가 닭으로 자랄 동안 정을 붙인 수감자 앞에서 튀겨먹겠다고 협박하는 등.

치명적으로 잔인한 일부 고문들은 간수들 사이에서 여전히 회자될 정도였다.

만약 밖에서 꾸준히 희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지하감옥 간수들의 정신은 이미 진즉에 황폐해졌을 것이다.

“아.... 아아....”

환호하는 간수들의 대화 내용을 엿들은 사내가 망연자실했다.

그의 이름은 뷰랑.

두 달 전 멸망한 가우스 왕국 최고의 기사였던 사내다.

얼굴을 감싸 쥔 그가 네메시스 왕에게 받았던 마지막 임무를 떠올렸다.

템빨왕비를 확보해 템빨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것....

그건 아마도 전쟁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뷰랑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반 년 전부터 조국을 떠나 난민으로 위장하고 템빨국에 잠입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자신의 실패가 조국의 멸망을 앞당겨버렸다.

‘모두... 모두 나의 무능함 탓이다.’

어린 왕자조차 꺾지 못한 스스로의 나약함을 떠올린 뷰랑의 귓가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뷰랑이 감옥에 갇혔던 그날부터 옆방을 지키고 있던 죄수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가우스 왕국 출신이라지?”

“.....”

“간수들의 말은 신경 쓰지 마라. 저놈들, 너를 동요시키려고 괜한 허풍을 지껄이는 거니까.”

“....?”

“가우스가 볼품없는 소국이긴 해도 수백 년을 연명해온 저력이 있는 나라다. 생긴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템빨국 따위가 고작 몇 주 만에 정복할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

“그리고 또 뭐? 아직까지도 전화의 후폭풍을 겪고 있을 영토에 새로운 이주민들이 가득 찼다고?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대사하란 제국을 비롯해 수많은 국가가 이 땅위에 존재하는데 누가 고작 템빨국 따위로 이주하겠느냐고.”

“.....”

“여기 간수들은 미쳤어. 반 년 전쯤에는 템빨국이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더군. 어스름족 오크의 로드는 템빨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던가? 큭큭, 어때? 웃음밖에 안 나오지? 개자식들....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면 닭한테도 안 통할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삼는 건지.”

“.....”

왕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조국을 잃은 절망감.

마냥 좌절할 수밖에 없던 뷰앙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죄수의 목소리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듣다 보니 한 귀로 흘릴 수가 없게 됐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 눈치가 아닌가?

천하의 템빨국을 변방의 소국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귀하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간수들이 했던 말은 모두 사실이오. 제국은 템빨국의 혈맹을 자처하였고 어스름족 오크 로드는 그리드를 따르는 충실한 개가 되었소. 안타깝지만 가우스 왕국의 멸망도 사실일 테지.”

“....네놈도 간수들과 한 패로구나.”

벽 너머 수감자의 목소리가 사늘하게 식었다.

두꺼운 벽을 꿰뚫는 짙은 살기가 뷰앙을 긴장시켰다.

‘이만한 고수가 있다고?’

전 에트날 왕국의 생존자쯤 되는가?

“귀하는 누구시오?”

질문하는 뷰앙에게 벽 너머 죄수가 대답했다.

“내 이름은 레이도른. 한때 제국의 기둥이었던 피아로를 아득히 넘어섰다고 평가 받는 적기사단의 여섯 번째 기사다.”

“....!”

뷰앙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단 한 번의 발도로 요새를 양단한다는 그자인가...!’

살아있었다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실력자가 이토록 어둡고 답답한 지하 감옥에서 굴욕적으로 연명해왔을 줄이야!

‘템빨국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구나....!’

네메시스 왕의 말씀이 옳았다.

템빨국은 애초부터 적대해선 안 될 상대였다.

뷰앙이 깨닫는 그때였다.

“누구냐!”

쿠당탕!!

쇠창살 너머 복도가 요란하다 싶더니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뚜벅. 뚜벅. 뚜벅.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온다.

“크르릉....”

옆방 레이도른이 짐승 같은 숨소리를 흘리며 더욱 짙은 살기를 피어 올렸다.

그러다가 이내.

“다, 당신은....?”

거짓말처럼 살기를 거두고 숨을 죽였다.

이 순간 레이도른은 상처 입은 맹수가 아닌 겁먹은 강아지 같았다.

“그랜드마스터....!”

“전 적기사단의 여섯 번째 기사 레오도른. 내 예상대로 제국에 송환되지 않고 남아있었군.”

“예...? ‘전’ 적기사단이라 함은 무슨 말씀이신지....”

“세상이 변했고 제국의 새로운 정권은 너의 귀환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내 손을 잡아라, 레이도른. 네게는 이 길밖에 없다.”

뷰앙으로써는 알아듣기 힘든 대화가 이어졌다.

두꺼운 벽이 시야를 막고 있는 터라 뷰앙은 밖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서걱!

깔끔하다 못해 청명하게까지 들리는 절삭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때댕! 때대대댕!!

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레이도른을 가두고 있는 독방의 쇠창살이 잘려 떨어진 소리로 추정됐다.

‘말도 안 된다...!’

흑철을 두부 자르듯이 하다니?

믿기지 않는 경지에 소스라치게 놀란 뷰앙의 떨리는 시야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뷰앙을 가두고 있는 쇠창살 너머로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다가와 선 것이다.

젊은 미남자였다.

권태에 물든 눈동자에 어울리지 않는 열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뷰앙을 빤히 관찰한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템빨국의 책사는 지극히 실리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대에게 쓰임새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이런 골방에 가두는 일 자체가 없었을 테지.”

“.....”

“이곳에서 잊힌 채 늙어 죽어갈지, 아니면 나와 함께 세계의 이면에 도전할지 그대가 선택하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쫓겨난 신들을 다시 이 땅에 세워 타락한 신들을 단죄할 징벌자. 칠악의 화신 지크프렉터다.”

***

그리드의 고혈을 쥐어짜 발전시킨 연금술과 대현자 스틱세이의 정령술은 템빨국의 기술을 나날이 성장시켰다.

본래는 흔히 볼 수 없는 마법 수정구가 라인하르트 도처에 설치됐을 정도다.

“빠르군.”

마법 수정구로 지하감옥의 상황을 지켜본 라우엘이 흡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를 유인하기 위해 지하감옥의 위치를 유출하자마자 사태가 발생했으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인재가 필요한 그랜드마스터 입장에서 레오도른은 좌시할 수 없는 미끼였겠지.’

템빨국 입장에서 레오도른은 계륵이었다.

처음 그를 생포했을 때만 해도 제국은 템빨국의 적이었고, 템빨국은 레이도른으로부터 얻을 정보가 많았지만 상황은 급변해왔다.

이제는 레이도른보다 템빨국이 더 제국을 잘 알고 있었다.

레이도른이 충심과 자존심으로 지켜온 정보들에 더 이상 욕심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레이도른을 제국으로 송환할 수도 없었다.

레이도른은 템빨국의 모든 대소신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드를 시해하려고 했던 대역적.

그의 처분을 적당히 했다간 내부에서 반발이 생길 게 당연했다.

당연히 제국측에서도 레이도른을 환영하지 않았다.

벌써 몇 년이나 행방불명 상태였던 레오도른이 이제와 제국으로 돌아와 봤자 여러 의심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기 때문이다.

특히 레오도른은 리미트 산하에 있던 전력이 있다. 실제 성향이야 어떨지 몰라도 지금의 제국 정권은 그의 과거를 달갑지 않게 보았다.

심지어 템빨왕을 시해하려했었으니 받아들여봤자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셈이다.

‘이대로 감옥에서 늙어 죽게 만들어야하는 건가 싶었는데.’

지크프렉터를 유인하는 미끼로 써먹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간수 중에 사상자는 없습니다. 모두 잠시 기절했을 뿐입니다.”

달려온 병사의 보고를 듣는 라우엘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역시 선(善)에 가까운 인물이다.’

칠악성은 본래 악이 아닌 선이다.

인류애로 똘똘 뭉쳐 세계의 평화를 위해 신과 맞서 싸운 존재들이다.

그들이 악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신들에게 누명을 썼기 때문....

라우엘은 칠악성의 화신인 지크프렉터의 본질을 신뢰했다.

‘어서 빨리 동대륙으로 가시오. 그곳에서 쫓겨난 신들의 실체를 목격하고 그리드 님의 편에 서시오.’

템빨국의 전력을 희생할 순 없으니 당신에게 맡긴다.

중얼거리는 라우엘의 표정이 씁쓸하다.

자칫 간수들을 희생시킬 수도 있었던 그의 본질은 아마 악에 가까울 것이다.

라우엘 본인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우엘은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았다. 사람들의 비난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선택과 행동이 그리드와 템빨국을 이롭게 했으니까.

‘나 같은 사람도 한 명쯤은 있어야지.’

착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집단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라우엘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하늘의 부름 퀘스트 발생 후 딱 일주일이 되는 날.

“여긴가.”

동대륙의 최북단.

씽의 차오즈에 랭커들이 속속 도착했다.

과연 상위 0.00005프로의 하이랭커들답게 대단한 정보력과 행동력을 보유한 사람이 많았다.

“하늘의 부름을 받아 오셨소?”

퀘스트 보유자들은 병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차오즈에 막 도착한 랭커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마중 나온 병사들이 그들을 성까지 안내했다.

붉게 칠한 담과 황금색의 기와가 화려하고 강렬한 조화를 이루는 거성의 웅장한 전경이 랭커들의 기세를 조금 억눌렀다.

“흙이 안 보이네, 흙이 안 보여. 성주가 돈이 엄청 많나봐.”

“초국하고 비교해서 씽이 훨씬 더 부유해보이긴 하더군.”

“조용.”

바닥이 큼직한 대리석으로 도배된 연병장.

랭커들이 수군거리며 모여 있자니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미녀 한 명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다지 탐탁찮은 표정으로 장내의 사람들을 둘러본 그녀가 한숨 쉬며 말했다.

“하늘의 부름에 응한 것을 환영한다.”

단지 그걸로 끝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하이랭커들은 약속 됐던 보상을 얻었다.

[<하늘의 부름>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레벨이 2 올랐습니다.]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연계 퀘스트 <보물 수호>가 생성됩니다.]

<사신기 수호>

★히든 퀘스트★

알 수 없는 악인이 이미 차오즈에 잠입한 상태입니다. 언제든지 보물이 노려질 수 있으므로 엄중히 경계하며 보물을 수호해야할 것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알 수 없는 악인이 사망할 때까지 목표물을 지킬 것.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벨 2 상승.

퀘스트 실패 시:레벨 4 하락.

“....!?”

시스템은 언제나 공정하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를 좌절시킨다.

“이런 젠장! 레벨 4개 하락은 뭔데!”

누군가의 욕설 섞인 외침이 무거운 분위기를 꿰뚫고 울려 퍼졌다.

이제부턴 사생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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