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88화 (1,078/1,794)

템빨 56권 - 16화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온다.

크워엉-!!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맹수의 포효가 아닐까.

벌써 몇 번째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리에 놀란 칠천 일당의 시선이 앞서 걷는 그리드에게 집중됐다.

그리드의 몸 위로 백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이 내리는 광경이다.

[백호의 기운과 동화합니다. <지신> 상태에 돌입해 대지의 제어권을 얻습니다.]

그리드가 바라보는 세계가 변했다.

들, 바위, 언덕, 산 등등.

지형으로 분류되는 모든 것들이 형광색을 띠며 깜빡거렸다.

눈이 어지럽다.

경사진 언덕을 노려본 그리드가 머릿속으로 다급히 평야를 그렸다.

그러자 그리드의 마나가 2천 즉시 소모되며 언덕이 내려앉았다.

언덕이 평야로 변해버린 것이다.

기적.

신의 권능이다.

백호의 가호로 지신의 권능 일부를 쓸 수 있게 된 그리드는 근처에 있는 지형을 입맛대로 변경시킬 수 있었다.

변경 가능 횟수는 1회, 변경 지속 시간은 30초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고 도움 되는 효과였다.

뿌듯한 마음으로 평야를 주파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일침을 가했다.

“땅의 신의 권능치고 너무 초라한 거 아니냐?”

평야 따위야 굳이 신이 아니라도 쉽게 만들 수 있다.

언덕이고 산이고 마법으로 때려 부수면 그만이니까.

주장하는 브라함에게 그리드가 반박했다.

“그건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

고작 자연을 보존하는 게 장점이라고?

그리드가 너무 당당하자 오히려 당황한 브라함이 생각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연이 보존될수록 마나의 농도가 짙어지니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도 평야를 만드는 지신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평할 수 있겠군....”

결과적으로 내게 좋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넘기자, 생각하는 브라함에게 그리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사실 지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건 평야뿐만이 아닙니다. 평야를 미로로 만들 수도 있는 게 바로 지신의 진짜 힘이죠.”

“근데 왜 평야만 만드는 거지? 아까 도깨비라는 족속들에게 쫓겼을 때 미로를 만들어서 가뒀으면 훨씬 수월하게 따돌릴 수 있던 거 아니냐?”

“구조를 머릿속에 즉시 그려야하는데 그게 힘들어요....”

“이해했다.”

그리드가 머리 못 쓰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브라함은 더 이상 긴 말하지 않았다.

칠천 일행과 십이지들의 시선도 있는 바, 그리드의 위엄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천재가 아닌 이상에야 처음부턴 잘하긴 힘들겠지.’

여태까지 그리드가 평야를 만들 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3초 안에 만들었다는 점.

구조를 바꿀 지형을 선택하고, 바꿀 지형의 구조를 다시 설계하기까지 단 3초 안에 해결해야하는 눈치였다.

그리드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했다.

‘천재가 아닌 사람 중에서 지신의 권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던전 마스터 정도밖에 없겠군.’

브라함이 떠올리는 던전 마스터란 포식이불족발이다.

템빨국 전역에 어느덧 30개가 넘는 던전을 건설하고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포식이불족발의 명성은 브라함의 귀에까지 들어간 상태였다.

‘조만간 세울 마탑의 지하 건설을 녀석에게 의뢰해볼까.’

브라함이 생각하는 그때였다.

“후우.”

지신의 지속 시간이 끝나고 평야가 다시 언덕으로 변하자 속도를 줄인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원래는 로또급 스킬이었겠어.’

지신은 3시간에 1번꼴로 발동 중이다.

소위 궁극기로 분류되는 스킬들과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는 쿨타임이었다.

하지만 망각해선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현재 지신은 발동 확률이 중첩된 상태라는 점이다.

만일 확률이 중첩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발동 확률이 크게 떨어졌을 테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백호 세트를 노린 게 정답이었어. 앞으로 주작의 기운을 흡수한 백호 세트를 1개 더 만들어서 백호 세트를 완성하면 지신의 발동 확률도 더 오르겠지.’

이후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현무를 부활시키고 현무의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럼 현무의 숨결 또한 주작의 숨결처럼 다른 사신의 숨결과 융합시킬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신을 부활시키는 걸 목표로 삼는다.’

모든 사신의 숨결을 입맛대로 조합할 수 있게 되리라....

찬란한 미래를 그려보는 그리드의 시야에 절경이 포착됐다.

나이 지긋한 노인의 새하얀 눈썹을 연상시키는 구름이 녹림 무성한 산의 중턱에 걸려있었다. 산을 둘러싼 강에는 무송이 반짝이며 떠다녔으니 지상의 은하수가 따로 없었다.

“바로 저곳이 백미산입니다.”

“차오즈의 초입이군.”

“맞습니다. 본래라면 족히 이틀이 더 걸려 도착했어야하는데 빨리 도착했군요.”

칠천 일행이 싱긋 웃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등반했어야할 산들을 그리드 덕분에 쉽게 지났으니 그들에게는 놀랍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날의 경험을 평생토록 회자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강가의 무송들이 요동쳤다.

“...!?”

“군대다.”

“우리가 오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나 보네요.”

강물에 파문이 일었고 이어서 땅이 흔들렸다.

저 멀리, 강 너머 먼 곳으로부터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들이 선착장을 점령하기 전에 빨리 강을 넘어야합니다!”

다급히 강가로 달려간 칠천 일행이 나룻배 몇 척 위에 올라타 노를 쥐었다. 그리고 그리드 일행에게 어서 배에 탑승하라고 손짓했지만 그리드 일행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칠천이 재촉했다.

백미강이 작다지만 나룻배로 넘기에는 녹록찮다. 본래는 여기서 큰 배를 빌릴 계획이었는데 나룻배만 남은 걸 보면 운이 나빴다.

생각하며 초조함에 소리치는 칠천을 화경이 진정시켰다.

“배에서 내리시게. 우리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군대까지 내보낸 저들이 아무런 대비도 안 해놨을 것 같나?”

“....!”

칠천이 뒤늦게 깨달았다.

나룻배 바닥에 아주 조금씩, 눈치 채지 못하는 속도로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일부러 작은 구멍을 뚫어놓은 것이다.

‘큰 배가 없는 건 우연이 아니었구나!’

배를 타고 급히 강에 올랐다간 물귀신이 될 뻔했다.

진절머리 치며 배에서 뛰어내린 칠천 일행이 그리드에게 존경어린 시선을 보냈다.

신을 연상시키는 권능을 부릴 뿐만 아니라 함정을 즉시 간파하는 지력까지 보유한 그리드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정작 당사자 그리드는 함정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우리는 날면 되는데 저런 작은 배를 뭣 하러 타.’

그리드가 감각을 집중했다.

초월자의 시력과 청력으로 강 너머 다가오고 있는 군대의 숫자를 가늠했다.

‘....일단 천 명은 넘는군.’

정확히 헤아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강을 사이에 둔 터라 땅의 울림도 불규칙하다.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릴 때 브라함이 말했다.

“기마 4천필이다.”

“....?”

화경을 제외한 칠천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견하기에도 평범하게 생긴 저 위인은 당최 누구기에 흙먼지만 보고 병력의 숫자를 가늠한단 말인가?

그리드가 공손히 대하는 것을 보아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만 선을 넘은 느낌이다.

“활빈당이 파악하기로 차오즈의 주둔 병력은 총 3천이 안 됐습니다. 한데 기마만 4천이라니.... 섣불리 단정하시는 것은 좀 아닌 듯합니다.”

칠천이 불신을 품고 말하자 화경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전설이시다. 황길동 님과 동급이야.”

“....?!”

충격적인 말.

그와 동시였다.

폴짝 뛰어오른 브라함이 그대로 플라이 마법을 전개, 백미강의 중심부까지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이어서 마나 드레인으로 마력을 증가시킨 그가 강 건너 전방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기가 라이데인.”

콰직-!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황금색 섬광의 후폭풍이 격랑을 만든다.

백미강 전체를 불시에 휘감는 전류에 의해서 강 곳곳에 물기둥이 솟구쳤고 기절한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전방의 차오즈 군대는 이미 폭발에 휩쓸려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흙먼지 속에서 비명이 메아리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기절한 물고기들이 채 깨어나기도 전에 완전히 걷힌 흙먼지 너머로 시체의 산이 보였다.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기가 라이데인이 발생시킨 자력의 여파를 이겨내지 못한 채 뒤엉켜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일격....!”

칠천 일행이 이중으로 놀랐다.

적의 숫자가 브라함이 가늠한 것과 같은 것은 물론이오, 단 한 번의 주술에 모조리 궤멸당했으니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들보다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고위 마법을 썼다고?’

기가 라이데인은 전설급 대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위인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최상위급 마법인 건 분명했다.

야탄의 첫 번째 종이자 대악마 아모락트의 대리인이었던 탈로스조차 기초마법으로 해치웠던 브라함이 고작 군대를 상대로 고위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그리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침 그리드의 곁으로 돌아온 브라함이 다소 탐탁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신에게는 공통적인 권능이 있다. 그게 뭔지 아느냐?”

“글쎄요...?”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가호를 내리는 것이지. 레베카교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떠올리면 쉽다. 레베카의 가호를 받은 놈들은 강화와 회복의 기적을 행사하지.”

“네....”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 말을 굳이 지금 하는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브라함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존이라는 놈들이 이곳의 병사들에게 가호를 내린 듯하다. 그게 아니면 병사들의 수준이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높아.”

“....!”

여태까지 양반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사태를 방관하는 듯했던 오존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사건에 개입했다는 뜻이다.

안 그래도 양반만으로 벅찼던 그리드의 입장에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주지시켰다.

“우리는 이곳에 분명히 실패를 염두에 두고 찾아왔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결코 무리하지 마라.”

“....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래, 현무보옥을 한 번에 탈취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일단은 현무보옥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적의 수준을 가늠하는 등 정보를 수집하는 게 관건이다.

기회는 이번 한 번 뿐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대륙을 넘나들 수 있다.

재차 상기한 그리드가 십이지들과 칠천 일행에게 말했다.

“다들 돌아가. 여기서부턴 나와 브라함 둘이 간다.”

“뭣...! 무슨 소리야!”

그리드보다 키가 큰 청발의 미녀가 노발대발했다.

인간으로 둔갑한 청호다.

그리드가 백호의 견갑과 각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청호는 그리드보다 한 수 위의 실력자였다.

사실 대부분의 십이지들이 그리드보다 강했다.

그리드에겐 자신들의 힘이 꼭 필요하다고 믿었던 그들의 입장에선 그리드가 돌아가자고 하자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리드가 질문했다.

“만약 오존이 나서면 감당할 수 있어?”

“....!”

당연히 없다.

십이지는커녕 사신들조차 오존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모두 힘을 잃고 봉인됐던 것이다.

“너희 중 하나라도 오존과 양반에게 붙잡혀서 봉인 당하면 사신의 부활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은 여기서 물러나는 게 맞아.”

“.....”

십이지는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나지도 않았다.

그리드와 브라함만으로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모두 쉽게 나서지 못하는 그때였다.

“우리는 템빨신을 믿어야해.”

살짝 튀어나온 앞니가 매력적인 귀여운 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토순이였다.

“템빨신은 이미 불가능한 일을 해냈어. 그를 믿고 기다리는 게 맞아.”

“....그리고 강요하지 않는 것도 맞지.”

청호가 그리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리드, 힘들면 언제라도 포기해. 너와는 상관없는 이 땅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지 마. 너에게는 우리를 책임질 의무가 없으니까.”

빙그레 웃은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이후.

단 둘이 강을 건넌 그리드와 브라함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십이지와 칠천 일행은 자리를 지켰다. 간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선전과 안전을 기원했다.

같은 시각, 차오즈에서는....

“가람을 죽였다는 건 저자인가.”

풍사의 가호를 받은 군대가 일거에 몰살당했음을 감지한 양반 마루가 흥겨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옷섶을 풀어헤친 채 단정치 못하게 앉은 그의 뒤편엔 20명의 미남미녀가 도열하고 있었다.

비록 치우의 시험에선 탈락했지만 재기를 노려온 양반들이다.

한결과 동급의 존재들이었다.

“양반이 저리 많은데.... 자칫했다간 우리 둘 다 죽는 거 아니요?”

황길동이 덮어준 돗자리 덕분에 완전히 은신한 노검마가 마른 침을 삼키며 묻자 황길동이 안심시켰다.

“걱정 마시오. 여차하면 나 혼자라도 도망치겠소.”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