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13화
국가대항전 3일차.
미국은 라우엘의 부재를 뼈저리게 체감해야했다.
<공성전>에서 중국의 용 하오의 전략과 전술에 처참히 당해버린 것이다.
교란, 화공, 복병, 기습 등.
하오가 세운 작전들이 하나 같이 절묘하게 작용해서 미국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
본대와 함께 적진에 고립됐다가 간신히 홀로 귀환한 크라우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성조기가 꽂혀 있어야할 아군의 성이 적의 소굴로 변해있었다. 새빨간 오성홍기가 크라우젤을 비웃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설마 그 함정에서 살아남을 줄이야.... 진정으로 존경하오.”
성벽 위.
궁사들을 거느리고 선 하오가 크라우젤에게 권고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무의미한 저항은 말고 순순히 항복해주시오.”
하오가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단 두 명.
그리드와 크라우젤이다.
그중 특히 크라우젤을 오래 전부터 선망해온 탓에 몇 년 전부턴 크라우젤을 따르고 있었다.
물론 부하가 됐다는 뜻은 아니다.
크라우젤은 파벌을 만들 생각도 없었고, 하오가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크라우젤 님, 결단을.”
크라우젤이 검을 버리지 않자 하오가 재차 권고했다.
그를 비롯한 중국인 선수 전원이 찰랑이는 미늘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소드 브레이커 옵션을 보유한 갑옷이었다.
작년, 크라우젤에게 낭패를 안겼던 그리드의 소드 브레이커에 어지간히도 깊은 감명을 받은 눈치다.
“깃발이 꽂힌 지 벌써 3분 째다. 네게 남은 시간은 2분밖에 없어.”
중국 선수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나 같이 기세들이 등등했다.
성을 점령하고 있는 아군의 숫자는 서른이나 남은 반면 크라우젤은 혈혈단신.
단 2분만 버티면 되는 중국 입장에선 압도적으로 유리한 수성전이다.
이변은 결코 없다는 게 중국 선수들의 계산이었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설진도, 시청자들도 모두 국적을 불문하고 중국의 승리를 점쳤다.
단 한 명.
스파앗-!
크라우젤을 제외하고 말이다.
“윽?”
크라우젤이 던진 검이 성벽 위까지 날아오자 놀란 중국인 선수들이 좌우로 물러남과 동시에,
파핫!!
성벽 위 중국인 선수들의 틈새에 꽂힌 검과 성벽 아래 있던 크라우젤의 위치가 교체됐다.
“....!?”
수성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크라우젤의 침입을 허락한 중국인 선수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우왕좌왕하지 않고 금방 정신을 수습하더니 크라우젤에게 스킬을 쏟아 부었다.
이때 크라우젤의 ‘창’은 회전하고 있었다.
까가가가가강-!
물의 흐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창술이 중국 선수들의 미늘 갑옷을 베지 않고 후려친다.
“쿨럭....!”
충격을 견디지 못한 중국 선수들이 허공에 떠올랐고,
스파앗-!
크라우젤은 검 한 자루를 새롭게 꺼내 집어던졌다.
표적은 500미터 거리 바깥의 높은 첨탑.
오성홍기가 꽂혀있는 지점이었다.
“막아라!”
마침 착지한 중국 선수들이 있는 힘껏 무기를 내질렀다.
크라우젤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그들보다 한 박자씩 빨랐다.
그들이 착지했을 때 크라우젤은 이미 신형을 띄우고 있었고, 그들들이 무기를 내질렀을 때 크라우젤의 위치는 이미 검과 교체돼 있었다.
스파앗-!
크라우젤의 신형이 첨탑 앞에 나타난다.
펄럭이는 오성홍기가 그의 바로 코앞에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오성홍기로 손을 뻗는 크라우젤의 등을 강력한 에너지가 덮쳤다.
크라우젤이 성벽에 오른 시점부터 용의 날개를 펼쳐 첨탑까지 날아온 하오가 쏜 브레스였다.
“천하의 조자룡도 미부인은 버려야했소!!”
혼자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번 기회에 절실히 깨닫게 해주겠다....
의무감마저 느끼며 외치는 하오의 공격에 크라우젤은 대응하지 못했다.
깃발을 취하고자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었을 때 들어온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오의 기습 타이밍이 너무나도 완벽했다.
만약 하오가 <의지> 스탯을 개방한 상태였다면 그리드 이후 최초로 크라우젤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람이 됐을 것이다.
“....!”
하오의 창이 크라우젤의 등을 찌르기 직전 멈췄다.
핏-!
피피피피피핏!!
눈에 보이지 않는 검기가 하오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벤다’는 의지가 깃든 검성의 무형지기다.
예리함 면에서만큼은 그리드의 무형지기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큭....! 크아아아악!!”
촤하하하학-!
용의 비늘을 둘러 충격을 견디던 하오의 날개 한쪽이 베이며 분수 같은 피가 솟구쳤다.
비행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이었다.
추락하는 그의 시야에 오성홍기를 뽑아내는 크라우젤의 뒷모습이 보였다.
창천에 다시금 성조기가 장식됐다.
“크라우제엘!!”
하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추락하는 몸을 돌보기보다 다시 한 번 브레스를 쏘았다.
크라우젤의 불사는 아직 이곳에 당도하기 전부터 소모됐을 터.
동귀어진할 각오였다.
자신이 크라우젤을 데려갈 수만 있다면 남은 동료들에 의해서 중국이 승리할 테니까.
그렇다.
템빨단원들과 마찬가지로 하오 또한 공과 사를 구분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하오의 입에서 쏘아진 황색의 빛줄기가 하늘을 갈랐다.
브레스는 반용족의 궁극기.
사용자의 생명력을 소모할뿐만 아니라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랜덤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자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적중률과 위력만큼은 레전드리 스킬에 준한다.
그마저도 진짜 용의 브레스와 비교하면 하찮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플레이어에겐 절대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검성의 검은 세상 모든 걸 벨 수 있기에.
스칵-!
“....!”
황색의 빛줄기가 반으로 쪼개진다.
크라우젤의 검이 빛줄기를 가른 것이다.
‘보다 강대한 적들’을 염두에 두고 그가 새롭게 창조한 검술엔 스킬 삭제의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핫.”
쿠우웅!!
실소를 터뜨린 하오가 차가운 대지 위에 떨어졌다.
용의 날개와 비늘을 잃은 그의 육신이 잿빛으로 산화했고 세상이 침묵에 빠졌다.
성조기 아래 우뚝 선 크라우젤은 지존으로 군림했던 시절보다 압도적인 위압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
“와....”
씽의 수도 양저우에 도착한 그리드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마차 20대가 나란히 이동할 수 있을법한 대로가 전역에 깔려있는 양저우의 규모에 놀란 것이다.
설마 제국 수도 타이탄 이상의 대도시가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다.
“이 나라에는 작은 게 없네.”
식자재부터 건물에 이르기까지 씽은 정말 모든 게 컸다.
심지어 여성들의 마음도 커보였다.
대부분 치파오를 입고 있는 길거리 여성들의 모습을 넋 놓고 감상하는 그리드의 옆구리를 토순이가 콕콕 찔렀다.
“템빨신, 템빨신. 정신 차려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요.”
쳐다본다고?
‘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촌놈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이질감에 고개를 갸웃거린 그리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거리를 지나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드 일행을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드가 이유를 깨달았다.
“세상에 저런 미인들이 어디서 단체로 나타난 거지?”
토순이와 경자, 그리고 청호와 방울이를 비롯한 십이지들.
현재 그리드와 동행중인 그들은 인간으로 둔갑한 상태였고 하나 같이 절세의 미녀가 되어있었다.
‘이목이 쏠릴 만도 하지.’
그리드야 십이지들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았지만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의 사정은 또 달랐다. 남자들은 십이지들에게 첫눈에 반한 듯했고 여자들은 동경의 시선을 보내왔다.
그리드가 한숨 쉬었다.
‘또 뻔한 레퍼토리가 시작되겠네.’
뻔하다.
이제 슬슬 대가집 도련님이 나타나서 십이지들에게 찍쩝거릴 것이다.
그러다가 일이 잘 안 풀리면 몸종에게 시비를 걸 텐데 여기서 말하는 몸종이란 당연히 그리드였다.
‘평범한 남자가 이런 미녀들하고 함께 있으면 당연히 몸종으로 착각하겠지.’
이번만큼은 브라함도 포함이다.
현재 브라함은 인피면구를 써서 얼굴을 평범하게 꾸미고 있었다.
그리드와 같은 취급당하기 딱 좋은 상태라는 뜻이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소?”
역시나.
한 눈에 봐도 고급진 도포를 입은 귀공자 한 명이 그리드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리드는 이 삼류엑스트라가 어떤 대사로 십이지들에게 작업을 칠지 지켜봤다.
한데 의외로 귀공자는 십이지가 아닌 그리드에게 말을 건넸다.
심지어 정중한 태도로 말이다.
“나는 이곳 양저우를 대표하는 와룡표국의 장남 칠천이라고 하오. 공자의 복장을 보아하니 초국에서 오신 귀인 같은데 존함을 여쭤도 되겠소?”
“내 이름이 왜 궁금하오?”
“이런 미녀 분들과 함께 먼 이국까지 여행오신 공자의 모습을 보아하니 제대로 풍류를 아시는 분 같아 친해지고 싶어 그렇소. 마침 벗들과 함께 술 한 잔 하러 가는 길인데 동행하시지 않겠소?”
“....!”
그리드가 커다란 감격에 휩싸였다.
몸종취급을 받기는커녕 미녀들을 거리는 풍류공자로 받들어지자 어깨가 으쓱해졌다. 안 그래도 최근 외모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던 차였는데 자존감이 확 상승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칠천의 손을 맞잡고 객잔으로 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거절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해야 할 일이 있....”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빤히 노려보는 브라함과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브라함은 굉장히 불만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왜요?”
그리드가 속삭여 묻자 브라함이 쯧쯧 혀를 찼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심산이냐?”
“아....”
그리드가 당면한 과제를 떠올렸다.
우선 정보를 수집해야했다.
현무보옥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했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무려 이 도시를 대표하는 상단의 장남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일단 대화를 나눠서 손해 볼 상대는 아닌 것이다.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좋소! 한 잔 합시다!”
“오오! 과연 풍류를 아시는구려!”
그리드가 힘차게 대답하자 화색을 띄운 칠천 일행이 그리드 일행을 이끌고 커다란 객잔으로 향했다.
술 한 잔 값으로 은전이 아닌 금전을 받을법한 최고급 객잔이었다.
객잔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큰 방으로 안내를 받은 그리드가 살짝 들떴다.
처음 찾은 나라에서 여태껏 본적 없던 진미를 공짜로 맛볼 수 있게 생겼으니 기대감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빠꾹빠꾹 우는 뻐꾸기 요리와 은하주를.”
그리드 일행을 자리에 앉힌 칠천은 술과 음식부터 주문했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음식이었지만 그리드는 딱히 실망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러나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비싼 음식을 주문한 듯싶었다.
‘비싼 음식이 맛없을 리 없지. 이 나라 고급음식은 얼마나 맛있으려나.’
사실 그리드는 짬뽕, 라면, 삼겹살, 캔 참치, 소시지 등의 싸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한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초국 궁전에 머물면서 고급 음식에도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초국 궁전에서 먹었던 산해진미가 그만큼 입맛에 맞았다.
칠천이 웃는 낯으로 물었다.
“주작 신께서 부활하시어 남방에 신령한 축복이 내렸다고 들었는데 어떻소? 확실히 살기가 좋아졌소?”
“그야 당연....”
대답하려던 그리드가 어떤 이질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칠천을 지그시 노려보며 반문했다.
“무슨 수로 주작의 부활 소식을 접한 거지?”
주작의 부활 소식은 환국에 의해서 철저히 차단됐다.
아직 남방 외부로 전달되지 않았고 이는 시스템적인 힘이었다.
칠천이 평범한 NPC라면 주작의 부활 사실을 인지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싱글싱글 웃던 칠천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활빈당의 정보력을 우습게봐선 안 되지.”
벌컥!
방문과 창문이 열리며 복면인 수십 명이 쏟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칠천의 일행 중 하나가 그리드의 목에 검을 겨눴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칠천이 사늘하게 읊었다.
“오존이 설치한 결계에 의해서 남방은 고립되었고 초국의 백성들은 남방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너희들이 평범한 초국의 백성이었다면 이곳 씽까지 찾아오는 게 불가능했을 텐....”
칠천의 말이 도중에 멈췄다.
그리드가 전개한 <지신>으로 인해 칠천과 그의 일행을 비롯한 복면인들이 죄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리드가 검을 뽑아 칠천의 목에 겨눴다.
<지신>의 효과가 끝나고 칠천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됐을 땐 이미 상황이 역전되어 있었다.
“지긋지긋한 고구마 전개 관두고 빠르게 진행하자. 나는 양반들을 쓰러뜨리고 주작을 부활시킨 템빨왕 그리드다. 너희들은 내 편이냐, 적이냐?”
“당연히 같은 편입니다!”
칠천이 즉각 대답했다.
단지 존재감만으로 자신과 동료들을 돌처럼 굳게 만든 그리드의 신기에 놀란 그는 거의 사색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