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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83화 (1,073/1,794)

템빨 56권 - 11화

오존이 한 자리에 모였다.

풍사는 좌측에, 우사와 운사는 우측에 나란히 앉았다.

주기가 찾아와 떠난 한울의 빈자리는 그의 아들이자 오존의 일원인 소별이 대신하고 있었다.

“주작이 부활했다고.... 뭐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나.”

턱을 괸 채 말하는 소별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이 땅의 진짜 주인이었던 옛 신의 부활 소식을 접하고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풍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작이 부활하는 바람에 남방의 신앙을 잃었다. 아이들이 긴 세월 동안 노력해서 쌓아올린 신의 격이 약해질 수도 있는데 어찌 그리 태연하지?”

“기껏 신의 격을 쌓고도 인간들에게 죽어나간 양반들 말인가? 그 쓸모없는 존재들을 굳이 염두에 둘 필요가 있나?”

“소별, 말을 아껴라. 한울께서 깊은 뜻이 있어 만드신 아이들을 비방하는 태도는 옳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이를 비방이라고 매도하는 의도가 뭐지? 풍사여, 사물을 부디 객관적으로 보게. 애초에 양반들이 무능하여 인간들에게 살해당했고 그로 인해 주작의 부활을 막지 못한 것인데 어찌 한울을 입에 담아가면서까지 양반을 감싸는가?”

“한울과 우리조차도 실패를 겪어 이 땅으로 추방당했음을 잊지 마라. 누구라도 실패를 겪는 법이며 상처를 안고 성장하는 법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폄하할 게 아니라 주작의 처분을 의논하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수로 주작의 처분을 논하자는 거지?”

소별의 시선이 대전의 입구로 향했다.

짤랑, 짤랑....

남방으로부터 불어오는 온풍에 몸을 맡긴 치우가 보였다.

대전을 등진 그는 단지 편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한데 오존은 대전 안에 ‘갇힌’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풍사의 얼굴이 구겨지는 반면 소별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언정 거래를 잊지 말게. 우리는 치우의 도움을 받은 대신 그에게 죽음을 약조하였네.”

“....”

“치우는 이번 사태에 기대를 걸고 있어. 가람을 해친 인간이 신살의 자격을 지녔다고 믿고 있지. 우리의 개입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걸세. 그렇지 않나? 치우.”

짤랑.

치우가 고개를 돌렸다.

“맞다. 나는 너희를 인계에 내려 보낼 생각이 없다.”

오존을 완전히 자신의 밑에 두고 있는 듯한 말투.

매번 들어도 적응되지 않고 불쾌하다.

풍사가 얼굴을 붉혔고, 우사와 운사는 조용히 눈과 귀를 닫았다.

참다못한 풍사가 언성을 높였다.

“아이들을 해친 인간을 그냥 가만히 놔두라는 말인가?”

“그래.”

치우는 너무나도 쉽게 대답했다.

그 탓에 말문이 막힌 풍사가 잠시 이를 갈다가 말했다.

“....알겠다. 네가 말하는 인간을 징벌하지 않고 놔두겠다. 다만 주작은 다시 봉인해야한다. 우리가 당장 인계로 내려가 주작을 봉인하겠다.”

“그 또한 허락할 수 없다.”

“...?”

풍사가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한 발 양보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치우의 태도가 바뀌지 않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신살의 자격을 지녔다는 인간을 보호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주작의 봉인까지 방해하는 건 전혀 이해가 안 됐다.

“불허의 이유를 밝혀라. 납득할만한 이유가 아니면 거절하겠다.”

“신살의 자격을 지닌 인간이 주작의 아홉 번째 심장을 품었다.”

“뭐?”

우리조차 손댈 수 없었던 그것을 고작 인간 따위가?

풍사는 물론이고 여태껏 잠자코 있던 우사와 운사까지 깜짝 놀랐다.

내내 무표정했던 소별의 눈에도 이채가 떠올랐다.

치우가 재차 말했다.

“주작의 봉인은 인간을 약화시킬 것이다. 하니 주작의 봉인을 허락할 수 없다.”

“....”

풍사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뿐이었다.

이내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은 그가 치우에게 물었다.

“설마 양반들이 나서는 것까지 말릴 생각은 아니겠지?”

인간이 신살의 자격을 지녔다는 것은 즉 ‘진짜 신’이 될 자격을 지녔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가짜 신밖에 될 수 없는 양반들보다 격이 높다는 뜻이니 치우에겐 양반들까지 막을 권리가 없었다.

양반들을 막는 순간 인간이 지녔다는 신살의 자격을 의심한다는 뜻이 됐으니까.

불확실한 대상을 보호하겠답시고 오존을 막은 셈이 됐으니 치우는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한다.

역시나.

“...양반은 규제하지 않겠다.”

치우는 풍사가 예상한 그대로의 답변을 내놓았다.

풍사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뭐 괜찮겠지.”

모든 사회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가치를 지닌 건 아니다.

누군가는 타인보다 뛰어났고 누군가는 타인보다 열등했다.

그건 신 또한 마찬가지다.

신들 사이에도 높고 낮음이 있었으니 당연히 양반들 사이에도 고하가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인간에게 죽은 가람의 위치는 높은 편에 속했다.

특별히 빼어난 재능을 타고난 아이답게 양반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성정 자체가 차분하지 못해 스스로를 연마하지 못했다.

가람이 스스로 공부하고 단련한 기간은 고작 최근 몇 년에 불과했다.

반면 현재 인계에 남아있는 양반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람과 비견되는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긴 세월 동안 꾸준히 연마해왔다.

그중 특히 미르가 군계일학이었다.

미르는 훗날 대천사 리파엘과 대적할 양반이었으니 특별한 게 당연했다.

‘한울께서 양반을 만드신 이유는 일곱 대천사의 대항마를 키우기 위함이셨다. 일곱의 대천사 중에서도 리파엘은 나조차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난적이었고.’

먼 옛날의 역경 리파엘과 먼 미래의 희망 미르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려본 풍사가 이죽거렸다.

“신살의 자격을 지녔다는 그 인간이 양반조차 넘어서지 못하고 쓰러진다면 그때는 우리가 나서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마라.”

“좋다. 고작 여기서 좌절할 녀석이라면 기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뜻일 테니 집착하지 않으마.”

딸랑.

치우의 목에 걸린 방울이 맑은 소리를 토했다.

어딘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내가 여기에 있노라. 내게 끝을 다오.’

노래하듯 중얼거린 치우가 대전을 떠났다.

***

“....?”

어깨를 감싸는 견갑의 형태를 신중히 구상하며 망치질하던 그리드가 문득 행동을 멈췄다.

아득히 머나먼 곳으로부터 들려온 어떤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용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워낙 깊은 한이 서려있어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방금 들었어요?”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대기의 마나를 모조리 통제함으로써 날카로운 감각을 세우고 있는 브라함이라면 조금 전 말의 내용을 정확히 포착했을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한데 브라함은 영문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뭘 말하는 거지?”

“누가 뭐라고 떠드는 소리 못 들었어요?”

“전혀 모르겠다만.”

‘이 양반이 잠깐 졸았나?’

그리드가 신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청호와 경자, 토순이의 반응도 똑같았다.

“우리도 못 들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환청을 들은 거 아니야?”

신수들은 그리드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벌써 이틀 째 쉬지 않고 일했으니 당연히 걱정됐다.

이틀 동안 그리드는 계속 땀에 절어있었고 괴로운 표정도 자주 지었다.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안 들렸으면 됐어.”

환청 따위가 아니다.

분명히 누군가 뭐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중해야할 때다.

의문을 접은 그리드가 잠시 멈췄던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패시브 스킬로 거듭난 <대장장이의 인내심>, <대장장이의 숨결>과 화공의 칭호 효과가 동시에 적용되며 그리드의 작업 능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쩌엉!

2개의 숨결을 흡수한 탐욕 위로 번개가 떨어진다.

그것은,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가 휘두른 망치였다.

쩌적!

탐욕이 정확히 두 개로 나뉘었다.

그리드는 우선 하나의 탐욕을 용광로에 넣어 제련했다. 그리고 쇳물로 뽑아 다시 단련하고 재련했다.

따앙! 따앙! 따앙!!

망치질 횟수가 늘어날수록 탐욕의 모습이 바뀌어갔다.

완전한 팔각형의 철판으로 변했다.

드래곤의 비늘 하나를 통째로 떼어놓은 듯한 형태다.

‘여기서부터 진짜다.’

어깨를 감싸는 모양새가 되게끔 철판을 접어야한다.

둥글게 만다는 느낌이다.

종이도 아닌 철판을, 그것도 지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인 탐욕을 말이다.

까강. 깡.

그리드의 망치질이 조심스러워졌다.

마치 아이린을 쓰다듬을 때처럼 살살 달래듯이 철판의 가장 자리를 두들겼다.

갓 핸드들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각반을 만들고 남았던 베리드의 가죽을 다른 모루 위에 펼쳐놓더니 무두질을 시작했다.

그리드의 근력과 손재주 스탯을 50퍼센트 적용 받고 고급 대장장이 기술을 마스터하고 있는 갓 핸드들의 무두질 솜씨는 장인급 대장장이의 솜씨 못지않았다.

현재 그리드가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 기술> 효과로 20퍼센트 상승한 손재주 스탯을 보유했기에 더욱 더 눈부신 솜씨를 발휘했다.

퍽! 땅! 퍽! 땅!

4개의 망치가 교차할 때마다 베리드의 가죽의 흉진 부분들이 빠르게 복구되어간다.

그리드가 한쪽 견갑의 형태를 완전히 바로 잡은 시점엔 이미 대부분 복구되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완벽하진 못했다.

베리드의 가죽을 완전히 복구한다는 건 대장장이 장인에게도 힘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 잘했어.”

갓 핸드들에게 가죽을 건네받은 그리드가 직접 무두질에 나섰다.

갓 핸드들이 거의 복구해놓은 가죽을 완벽하게 복구해버렸다.

소요한 시간은 고작 10분에 불과했다.

그리드가 처음부터 혼자 작업했을 때와 비교해서 10배 이상 빠른 속도였다.

갓 핸드들이 큰 도움을 줬다는 뜻이다.

“탐욕이라....”

브라함이 중얼거렸다.

탐욕의 모태가 된 <파브라늄>의 창조자인 그는 탐욕을 볼 때마다 감회를 느꼈다.

빌어먹을 파그마 놈과 함께 만든 파브라늄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아쉬웠다.

파그마와 함께했던 흔적이 지워진 것은 좋았지만 자신의 업적이 사라진 것 같아 씁쓸한 것이다.

아련한 눈빛으로 갓 핸드를 바라보는 그의 귓가로 그리드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이름은 그라비늄으로 해야겠어요.”

“...?”

“생각해보니까 그라비아늄은 좀 억지 같더라고요. 탐욕으로 다시 만들 우리들의 새로운 광물 이름말입니다.”

“.....”

브라함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진동이었다.

하지만 낯설 뿐이지 불쾌한 감각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드의 그, 브라함의 라를 따서 그라비늄인 것이냐?”

“네.”

‘우리’의 광물이라....

히죽, 히죽.

자꾸 솟구치려하는 입 꼬리를 간신히 억누른 브라함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까짓 이름 따위야 멋대로 지어라. 다만 성능만큼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할 것이다. 그 기간이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다. 아니, 10년이나 100년이 될 수도 있겠지.”

“10년? 100년요?”

“그래.... 그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남아라.”

“아니, 아무리 그래도 뭔 100년....”

쩌엉!

브라함의 터무니없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마지막 망치질을 끝냈다.

각반이 완성된 것이다.

[<주작의 가호가 깃든 백호의 각반>의 제작에 성공하였습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하였습니다.]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은 한시적으로 활성화된 스킬입니다. 신화 등급 아이템 제작 횟수가 누적되지 않습니다.]

[백호의 기운이 폭사하면서 청호에게 축복을 내렸습니다. 백호의 후손인 청호는 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청호 너 오늘 많이 거저먹는다?”

“어, 어흥. 감사의 표시로 내 가죽을 주겠....”

“장난이야. 축하해, 정말로.”

“고맙다흥....”

이후의 작업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무기, 투구, 망토 총 세 부위에 아이템 착용이 가능했던 경자와 달리 청호는 한 부위, 토순이는 두 부위 아이템만 착용 가능했기 때문이다.

청호에게 한 벌의 두루마기를, 토순이에게는 패랭이와 저고리를 만들어준 그리드가 북쪽의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나먼 북쪽 끝에 씽이 있다.

씽은 <현무보옥>을 보관하고 있는 국가 즉, 현무가 봉인당해 있는 국가다.

‘남은 투구와 장갑은 이동하면서 만들기로 하고 슬슬 출발하도록 하자.’

부지런해서 손해 보는 경우는 드물다.

짐을 꾸린 그리드가 청호에게 부탁했다.

“현무를 섬기던 십이지들을 데려와줄래?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