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9화
양반들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카라스의 복구 작업이 불과 며칠 만에 막바지에 이르렀다.
초국의 뛰어난 기술력과 주작의 가호, 그리고 플레이어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삼위일체가 되어 이뤄낸 결과다.
그렇다.
플레이어들은 카라스를 떠나지 않았다.
카라스의 신민들이 가장 힘들어할 때 그들의 곁을 지켜주었다.
의원 헤라 역시 마찬가지다.
진즉 탕약을 만들었음에도 카라스에 남은 그녀는 헌신을 다해서 부상자들을 치료해주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로해주었다.
플레이어들의 마음속에 환국을 향한 적대심이 자리 잡았다.
“절대! 절대로 비밀로 해야 돼요! 아셨죠?”
카라스를 떠나기 전.
헤라가 자신을 배웅 나온 플레이어들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이쯤 되면 앵무새가 아닌지 의심이 생길 지경이다.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플레이어들이 헤라의 등을 떠밀었다.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빨리 가버려.”
지난 며칠 동안 헤라와 플레이어들은 긴밀한 유대를 맺었다.
함께 힘을 합쳐서 양반들에게 저항하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카라스의 신민들을 도와주다보니 정이든 것이다.
애초에 힘든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카라스에 남은 사람들이니만큼 성향이 비슷해 금방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꼭이에요!”
“어휴, 이봐. 우리도 그리드가 싫지 않아. 굳이 민폐 끼쳤다가 적으로 돌릴 배짱도 없고 말이야. 그리드가 동대륙에서 뭘 하고 다니든지 절대로 소문 낼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말라고.”
베리드 레이드 시점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진 그리드가 환국과 적대하고 있으며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 등등.
카라스의 플레이어들은 의도치 않게 많은 정보를 알게 됐지만 굳이 소문낼 생각이 없었다.
득보단 실이 컸으니 조심하는 게 당연했다.
이들은 대부분이 랭커.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이다.
“좋아요. 다음에 봐요. 힘든 일 있으시면 언제라도 연락 주시고요.”
재차 확답을 들은 헤라가 드디어 카라스를 떠났다.
자신을 도와줬던 은인 ‘켄트릭’의 정체가 그리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이런 식으로나마 그리드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토록 정의로운 분이신 줄은 몰랐어.’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지존은 고고한 존재다.
선과 악을 논하기에 앞서서 별세계 인물처럼 다가왔다.
지존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따위에 관심조차 갖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지존의 모습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평범한 사람들조차 외면하는 약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고, 약자를 외면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비난하기보다 그들 역시 감싸 안아주었다.
목격자조차 적은 외지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은 채, 그는 누군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들었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심리학자는 그리드의 저변에 깊은 열등감과 보상심리가 깔려있을 거라고 분석했었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인물이라고 평가했었다.
돌팔이였다.
그리드의 실체는 전혀 달랐다.
절로 존경심이 드는, 세상에 정말로 드문,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이 순간 헤라의 짧은 기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드를 위해 기도해줄 것이었다.
***
그리드는 매 순간에 충실해왔다.
영혼마저 갈아 넣는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
아직 성공하지 못했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재능이 부족했고 운마저 따라주지 않아서 실패를 겪어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재능을 찾았다. 조금 정도의 불운쯤이야 무시해도 될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그때는 섣불리 시도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휴대용 용광로의 제작을 마친 그리드가 헥세타이아와의 승부를 떠올렸다.
아직 갓 핸드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갓 핸드를 희생시켰었다.
갓 핸드의 경험치를 포기하고 녹여 검의 재료로 삼았다.
그래야만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게 당시 그리드의 최선이었다.
그래, 최선이었다.
그 이상은 없다고 보았다.
2개의 숨결을 동시에 재련한다는 선택지는 배제했었다.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시점에선 2개의 숨결을 동시에 재련한다는 게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시스템적으로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었지.’
누차 말하지만 사신의 숨결은 최고위 등급의 제작 재료다.
하나의 숨결로 만드는 아이템만으로도 신화 등급이 탄생할 정도였다.
한데 2개의 숨결을 합쳐서 아이템을 만든다?
상식 범위 바깥의 아이템이 탄생할 여지가 있었다.
밸런스 타령하기 좋아하는 S.A그룹이 잠자코 보고 있을 리 없다는 게 당시 그리드의 확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리드의 기술은 발전했고, 적들의 강함이 상식 범위 너머에 있었다.
2개의 숨결로 아이템을 만드는 일은 이론적으로도, 시스템적으로도 이제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다.
“후우.”
심호흡하는 그리드의 표정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좌우에 하나씩 휴대용 용광로를 세워둔 그가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더블 캐스팅하곤 차원이 다른 난이도일 거다.’
최대 트리플 캐스팅까지 가능케 해주는 <벨리알의 지팡이>.
현재는 브라함에게 있는 그것을 그리드도 사용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애용하지는 못했다.
그리드에게는 벨리알의 지팡이를 활용할만한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더블 캐스팅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었다.
더블 캐스팅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1개의 마법 주문을 외치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다른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했는데 그리드의 순발력으로는 실현이 어려웠다.
하물며 2개의 광물을 동시에 재련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2개의 용광로의 온도를 각기 다르게 조절하기 위해서는 풀무질하는 양발의 움직임을 달리해야했다.
2개의 용광로에 따로 넣은 숨결들을 동시에 녹여내기 위해서는 양손의 움직임 또한 같아선 안 됐다. 숨결마다 재련방법이 다른 만큼 요구하는 동작이 달라서였다.
즉, 사지를 죄다 따로따로 움직여야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모든 행동에 근거가 있어야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
용광로에서 2개의 숨결을 꺼낸 뒤 하나로 단련하는 작업.
그 작업을 30초 내에 끝내야한다.
제아무리 고열에 녹인 광물이라고 해도 20초 이상 상온에 노출될 경우 표면부터 빠르게 굳어갔기 때문이다.
2개의 숨결이 완전히 굳기 전에 완전한 하나로 융합시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 작업을 실패할 경우 숨결 중 하나는 버려야 돼.’
어중간하게 합쳐진 숨결을 다시 분리하기 위해선 다시 녹여야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쪽의 숨결이 손상될 것이고 가치를 잃을 것이다.
‘....아니, 실패는 염두에 두지 말자.’
그리드가 부정적인 생각을 접었다.
자신에게는 헥세타이아 신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음을 상기했다.
바로 갓 핸드의 존재 여부다.
갓 핸드는 그리드의 능력치 일부를 계승했을 뿐더러 어설프게나마 대장장이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적어도 재련 과정에서만큼은 갓 핸드의 보좌를 받을 수 있다.’
용광로의 온도를 조절하는 작업 즉, 풀무질은 갓 핸드도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
온도를 일정 수준까지 높이는 일은 그리드가 직접 나서야만 가능했지만, 그 온도를 잠시나마 유지시키는 일은 갓 핸드의 능력만으로 충분했다.
‘갓 핸드가 대신 페달을 밟아주면 중간 중간 다리를 쉴 수 있어. 그때 양손의 움직임에만 집중해서 녹은 광물을 동시에 뽑아내면....’
이후의 단련 작업은 자신이 더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2개의 광물을 30초 내에 완전한 하나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그리드의 계산으로는 아슬아슬하게나마 가능했다.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이 활성화 됐을 때 강화되는 손재주와 스킬 수치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29초~36초 안에 해낼 수 있었다.
‘6초만 더 있었으면 완벽하게 가능했을 텐데.’
조금 더.
자신이 조금 더 집중하고, 조금 더 잘하면 된다.
결국 나 자신에게 모든 게 달려있다.
화르륵!
휴대용 용광로의 작은 아궁이에 장작을 넣은 그리드가 불을 지폈다.
백린목을 장작으로 삼은만큼 가히 폭발적인 불꽃이 일어나 용광로의 표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드는 백호의 숨결과 청룡의 숨결을 하나로 재련할 계획이었다.
백호와 주작의 조합으로 방어력과 회복력 상승의 시너지를 노리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기왕이면 세트 아이템 효과부터 완성시키고 싶었다.
‘청룡의 부츠는 이미 있으니까 이번 아이템이 세트 효과를 얻게 되면 청룡 2세트와 백호 2세트를 동시에 노려볼 수 있어.’
굳은 결의를 다진 그리드가 2개의 숨결을 꺼내 각기 다른 용광로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예상치 못한 태클이 들어왔다.
“그건 좋지 않아.”
토순이였다.
“뭐가?”
그리드가 당황했다.
2개의 숨결을 같이 재련해보라는 의견을 내놨던 토순이가 정작 저런 반응을 보이니 이해가 안 됐다.
행동을 멈추고 설명을 요구하는 그리드에게 토순이가 말해주었다.
“사신은 인류의 염원으로 탄생한 인류의 수호신이야.”
“근데? 다 아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왜?”
“사신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만 인자해.”
“....?”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는 자신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그중 백호 신과 청룡 신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야. 두 분 다 호승심이 강해서 만나기만 하면 싸움이 일어나.”
“.....”
“두 신은 서로 융화될 수 없는 성격인 거야. 두 신의 숨결 또한 마찬가지고.”
“....혹시 둘이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 백호가 이겼어?”
“그걸 어떻게...? 그건 십이지 중에서도 백호 신과 청룡 신을 섬겼던 아이들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리드가 영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현무의 숨결은 괜찮아? 현무의 성격이 가장 흉포할 거 같은데.”
사신 중 유일하게 죽음, 소멸과 관련이 있는 신이다.
인공적인 물질을 부정하는 습성이 있어 대장장이와 상성도 나빴다.
그리드는 현무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현무의 숨결이야말로 다른 모든 사신의 숨결과 조화가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토순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현무 신의 성격이 가장 온순하셔.”
“....아, 그러냐.”
별로 신빙성은 없지만 더 이상 논해봤자 소용없다.
현무의 숨결 자체를 제대로 재련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무슨 수로 다른 숨결과의 조합을 노린단 말인가.
‘그럼 결국 주작과 백호의 조합을 노려야겠군.’
청룡의 세트 효과를 노리지 못한 건 아쉽지만 사실 주작과 백호의 조합이야말로 궁합이 더 좋다.
마음을 달랜 그리드가 양쪽 용광로의 온도를 충분히 조절한 뒤 주작의 숨결과 백호의 숨결을 집어넣었다.
화르륵!!
두 개의 용광로에 동시에 풀무질하는 그리드의 두 다리가 바쁘다.
하지만 그리드는 쉬지 않았고 용광로 속 숨결들이 점차 녹기 시작했다.
“갓 핸드!”
손을 움직이기 전, 그리드가 도움을 요청했다.
한쪽 용광로의 풀무질을 고스란히 갓 핸드들에게 맡긴 뒤 자신은 양팔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콰르륵....
작업에 작업이 이어진 끝에 붉은 쇳물로 변한 숨결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개의 숨결은 동시에 모루 위에 얹어졌고 그리드는 망치를 휘둘렀다.
‘제발....!’
그리드는 열망했다.
더 좋은 아이템을.
더 강한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