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8화
<기묘한 마력의 돌>
등급:신화
종류:소모품
대상 아이템의 등급을 돌의 등급과 동일하게 성장시킵니다.
무게:1
‘다행이다.’
그루, 나은, 한결, 하랑, 그리고 가람.
다섯 양반의 죽음을 양분삼아 성장한 마력의 돌을 긴장한 채 쥐고 있던 그리드가 안도했다.
백호의 각반이 신화 등급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돌의 소비를 고민할 필요가 사라졌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제 좀 긴장이 풀리네.’
오래간만에 대장일하고 기분 좋은 땀을 흘린 그리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계속되는 양반들과의 격전으로 지쳤던 몸과 정신이 드디어 일상적인 감각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다.
지난 몇 주 동안이 비정상적으로 힘들었을 뿐이다.
진정하자. 즐기자.
몇 번이고 되뇐 그리드가 빙그레 밝은 미소를 그렸다.
“너희들 모두를 지금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줄게.”
그리드는 신수들에게 호의적으로 다가갔다.
깊은 호감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경자, 토순이, 청호와 호랑이들...
하나 같이 밉지 않은 친구들이다.
큰 신세를 지기도 했고, 앞으로 함께 싸우게 될 전우이기도 했다.
그리드가 추측컨대 십이지들의 싸움도 이제부터 시작일 테니까.
‘당장 청호만 해도 백호의 후손이야.’
십이지 중에 주작이 아닌 다른 사신의 후손들이 포함됐다는 점이 중대한 사실을 시사했다.
십이지가 섬기는 신은 주작 하나가 아닌 사신 전부일 거라는 점이다.
‘옛날에는 십이지들도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져 지냈겠지.’
하지만 사신들이 모두 봉인당한 이후 결집해 이곳에 숨어 지냈을 공산이 크다. 환국에 의해서 갇힌 걸 수도 있다.
따앙! 따앙!
그리드가 삼지창의 제작에 돌입했다.
수인족과 오랜 기간 교류해온 그는 제법 많은 삼지창을 만들어왔고 꽤 훌륭한 제작법도 습득한 상태였다.
또한, 경자와 싸워 이긴 경험도 있다.
경자의 전투 스타일을 꿰고 있었기에 그녀가 원하는 무기가 대략 어떤 형태일지도 유추 가능했다.
특정 스킬이나 스탯이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다.
그리드 개인이 그간 쌓아올린 경험과 지식의 힘이었다.
‘켈로브 삼지창이 좋겠어.’
켈로브 삼지창은 창대의 끝이 꺾여 형태가 다소 기이했다.
표적을 당겨오는 용도로 설계된 것이지만 간혹 지지대로 삼아서 전투에 변수를 창출하는 용도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경자는 꼬리로 땅을 짚는 습관이 있었다.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꼬리를 다리 대신으로 삼아서 짧은 다리가 지닌 한계점을 극복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했다.
‘꼬리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지지대로 삼을 수 있게 되면 경자 고유의 전투 스타일이 강화될 거다.’
망토는 무조건 란스티어의 망토가 좋다.
경자는 육탄전을 즐기는 반면 착용 가능한 방어구가 투구와 망토로 한정되어 있었으니 그 2개의 방어구로부터 최대한 많은 방어력을 끌어올려야했다.
‘적어도 템빨에 한해서는 인간이 최고네.’
모든 부위를 방어구로 싸매고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의 경이로운 신체에 감사하며, 그리드는 작업에 집중했다.
백호의 숨결과 탐욕을 제련하고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백린목의 불길로 흑철을 녹여 유니크 등급의 켈로브의 삼지창을, 제법 노련해진 솜씨로 직접 재단한 퓨리 미노타우르스의 가죽과 카멜리안 로드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레전드리 등급의 란스티어의 망토까지 제작에 성공했다.
‘가만.’
이어서 꼬깔 투구를 제작하려던 그리드가 멈칫했다.
‘이거 괜찮나?’
표준어는 고깔이지만 어쨌든 꼬깔이라고 이름 지은 이 투구의 방어력은 매우 탁월하다. ‘며칠 밤낮 동안 연마한 흑철’이 필요하다는 전제 조건만 충족하면 굳이 벨리알의 가죽을 혼합하지 않아도 높은 방어력을 자랑할 정도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외관이 쓰레기라는 점이다.
착용자를 바보로 보이게 만들 지경이라 우스갯거리가 되기 십상이었고, 이는 ‘한심한 비화’를 탄생시킬 여지를 줬다.
꼬깔 투구가 퇴화형 아이템인 이유다.
일반적인 아이템의 등급은 고정되거나 성장하게 마련인 반면 꼬깔 투구만큼은 등급이 하락한다는 부작용을 안고 있었다.
단지 외관 때문에.
‘....뭣같이 생기긴 했지.’
비죽 솟은 투구의 끝부분을 다듬어나가던 그리드가 잠시 작업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야 <최초의 왕> 칭호 효과 덕분에 투구 위에 왕관을 덧씌울 수 있다지만 경자는 달랐다.
머리 위에 달랑 이거 하나만 쓰고 다녀야하는데 사람들이 그녀를 바보취급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랬다간 신앙이 약화될 우려가 있었다.
‘그냥 좀 부족하더라도 적당한 투구를... 아니, 경자가 왕관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왕관을 만들어줄까....’
왕관은 방어력이 낮은 대신 부가 스탯이 많이 붙는다.
차선책으로 썩 나쁘지 않다.
그리드의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그리드 곁에 바짝 붙어 선 채 작업을 지켜보던 경자가 동그란 눈을 반짝였다.
“멋져....! 왕관 멋져! 끝이 뾰족해서 죽은 내 남편의 송곳니가 떠올라! 빨리 쓰고 싶어!!”
“.....”
....심금을 울리는 감상이다.
울컥한 그리드가 다시금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잠재력 개방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기까지 남았던 9시간을 정말 알차게 다 써서 창, 투구, 망토 삼종의 무구를 모두 완성시켰다.
유니크 이상 등급의 아이템을 만드는데 평균 하루 이상을 소모했던 시절과 비교해서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화공의 효과 덕분이다.
작업 속도를 2배나 상승시켜주는 패시브 스킬 <의지의 불꽃>이 있었기에 실현가능한 능률이었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앗!!”
도대체 얼마만일까.
아주 오래 전 인간들에게 선물 받았던 낡은 장비들.
이성을 상실하고도 소중하게 다뤄왔던 그것들을 대신해 새로운 장비를 무장한 여왕 쥐 경자가 토실토실한 양 볼에 홍조를 띄운 채 환호했다.
눈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레이저라도 쏠 기세였다.
“묘옹! 묘옹! 묘옹! 여왕 전하 만세에!!”
“묘옹! 묘옹! 묘옹! 인간 친구 만세에!!”
여왕 쥐의 신하들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리드와 여왕 쥐를 향한 그들의 예찬은 떠들썩했으나 숲의 새들은 떠나가지 않았다. 도리어 함께 지저귀며 합창을 이뤘다.
영물의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십이지 경자와의 호감도가 50 상승하였습니다.]
[경자를 따르는 신하들이 당신의 우군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쥐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쾅!
경자가 시범적으로 내지른 창이 대기에 파장을 일으켰다.
속도와 위력 모든 면에서 그리드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일격이었다.
과장 좀 보태서 가람의 창술보다 더 대단해보였다.
‘이게 십이지....’
양반과 같은 반신으로 분류되나 양반과 달리 진실한 신앙으로부터 비롯한 존재들.
동물인지라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경향이 있고 신체적인 단점도 많았지만 그리드의 눈에는 대단해 보일 뿐이다.
그리드는 십이지와 꼭 동료가 되고 싶었다. 그들의 힘을 빌려 아직 남아있을 동대륙의 난관들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 바람을, 그리드는 솔직하게 표출했다.
“앞으로 함께 싸워달라는 의미에서 주는 선물이야. 나를 도와줘. 나는 남은 사신들도 모두 부활시키고 싶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말을 덧붙이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드가 남은 사신들을 부활시키려는 이유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적인 의도들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공손히 부탁하는 그리드를 경자가 또 다시 끌어안아주었다.
“착한 인간.... 내가 해야 할 부탁을 네가 하는구나.”
[십이지 경자와의 호감도가 20 상승하였습니다.]
[십이지 경자의 세력과 완전한 동맹 관계를 구축합니다.]
[하수구의 쥐들조차도 당신과 템빨국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
..
!!
[★템빨국 일부 소도시에서 창궐할 예정이었던 역병이 사라집니다★]
[★템빨국에서 살고 있는 쥐들이 자신의 청결을 신경 쓰기 시작합니다★]
“....!”
기대 이상의 성과다.
경자와 진정한 동료가 된 것으로 모자라 쥐라는 종 자체를 템빨국과 동맹 관계로 만들어버렸다.
혹자는 고작 쥐하고 동맹을 맺은 게 뭐 대수냐고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당장 창궐할 수도 있었던 역병이 쥐들의 협조로 사라진 것이다.
역으로 이용하면 타국을 역병으로 물들일 수도 있으리라.
‘대가를 치르긴 해야 할 테지만 말이지.’
템빨콘을 소환해 스태미나 회복 속도를 높인 그리드가 딱딱하게 굳은 빵과 미지근한 물을 꺼내 허기를 달랬다.
잠재력 개방 스킬도 다시 활성화됐으니 곧바로 견갑을 제작할 계획이었다.
이번 재료도 당연히 탐욕과 백호의 숨결이었다.
어느새 꺼진 용광로에 다시금 불을 붙이는 그리드를 빤히 관찰보던 토순이가 물었다.
“덕신이여. 각기 다른 속성의 숨결을 함께 재련하진 않는 거야?”
좋은 발상이다.
두 종류 이상의 숨결을 하나로 재련할 경우 한 개의 아이템에 두 가지 속성이 붙을 것이다.
물론 그리드도 시도해봤었다.
하지만.
“안 되더라고. 숨결의 기운이 조화되지 않고 상충했어.”
숨결 간의 속성이 서로 충돌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숨결의 녹는점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 원천적인 문제였다.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용광로 안의 온도를 2개로 나누진 못했으니 2개의 숨결을 함께 재련한다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니.’
그게 불가능했던 건 어디까지나 ‘인간’ 대장장이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잠시나마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가 될 수 있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을까?
그리드는 인간의 젖꼭지가 왜 2개인지 생각해보았다.
인간의 형상은 신을 본떠 만든 것이므로 신과 인간의 생김새가 같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또한 겉모습은 인간이었다.
젖꼭지도 2개였다.
그리고 그 2개의 젖꼭지는 각자 다른 색상의 불꽃을 불태우고 있었다.
왼쪽 젖꼭지에는 청염을, 오른쪽 젖꼭지에는 적염을.
각자 온도가 다른 불꽃이었다.
‘젖꼭지.... 2개.... 각기 다른 불꽃....’
그리드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얽혀졌던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나도 젖꼭지에 불을 지피.... 는 개뿔.’
잘못 맞췄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생각을 정리했다.
‘신에 필적하는 기술, 기술로 인해 성장하는 손재주와 스킬 효과, 그리고 각기 다른 2개의 불꽃....’
불을 꼭 젖꼭지에 붙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용광로로 대처하면 된다.
2개의 용광로에 동시에 불을 붙이고 동시에 풀무질하면 된다.
‘....도전해볼 가치가 있어.’
결론을 내린 그리드가 휴대용 용광로를 하나 더 추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과 몸은 금방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입가엔 미소가 번져있었다.
반면 십이지와 호랑이들의 표정은 잔뜩 굳었다.
혼자서 자꾸 젖꼭지, 젖꼭지를 되뇌는 그리드의 상태가 영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흥. 발정기인가 보다.”
그나마 수컷 호랑이들이 이해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