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7화
각반의 종류는 다양하다.
단순하게 종아리에 두르는 각반이 있는 반면 골반부터 허벅지, 혹은 종아리까지 덮는 각반도 있었다.
당연히 보호 범위가 넓은 각반일수록 높은 방어력을 자랑했지만 민첩성이 떨어졌다. 착용에 높은 근력과 체력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물며 재질이 가죽이 아닌 금속일 경우 항시 둔화 상태를 각오해야할 정도로 페널티가 극심한 방어구가 바로 각반이었다.
하체에 가중되는 무게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직업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짧은 각반을 즐겨 쓰는 이유다. 템빨국 군대에 보급한 <양산형 그리드의 각반> 또한 짧은 각반이었다.
물론 그리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따앙! 따앙! 따앙!!
모루 위에서 <탐욕>이 단련되어간다.
<강화된 백호의 숨결>과 섞어 제련한 탐욕으로 그리드는 우선 여러 개의 경첩을 만들었다.
각반을 착용하더라도 움직임에 지장이 없게끔 여러 관절 부위를 만들 의도였다.
“말도 안 돼....”
그리드 곁에 쌓여있는 흑금색의 금속 중 하나를 이빨로 깨물어본 청호가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금속을 쉽게 단련할 수 있지?”
“어흥? 이게 뭐 어떻다고....”
청호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 호랑이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나섰다. 청호가 뭐라고 말릴 틈도 없이 금속을 획 집더니 깨물어보았다.
찌르릇!
노랑 털이 쭈뼛 선다.
왕자 무늬가 파르르 떨린다.
호랑이의 거구가 전기를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투둑.
부러진 틀니가 바닥 위에 떨어진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호랑이들이 경악했다.
“어, 어흥! 뭐,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흥!!”
동료의 희생 덕분에 탐욕이 얼마나 단단한 금속인지 알게 된 호랑이들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황당할 법 했다.
탐욕은 그리드가 망치질할 때마다 순순히 형태를 바꿨으니까.
인절미처럼 부드러워 보일 지경이라 침이 꿀떡, 꿀떡, 넘어갔을 정도니 이토록 단단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수밖에.
토순이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멍청한 호랑이들. 덕신께서 백린목을 장작으로 삼았을 때부터 알아봤어야지.”
백린목의 흉포함에는 신수들도 혀를 내둘러왔다.
쉽게 자를 수도 없을뿐더러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하는 것이 바로 백린목이었다.
한데 그리드는 백린목을 장작으로 삼아서 용광로에 불을 지폈고 거칠게 일어나는 화염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덕신의 진가는 무력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야.”
단야 솜씨 또한 신의 경지에 올라있음이 분명하다.
긴 세월을 살아온 토순이는 한때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었는데 그녀가 본 그 어떤 대장장이보다 그리드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사신들을 봉인시킨 무구를 만든 인물조차도 그리드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할 거라는 게 그녀의 분석이었다.
‘비처럼 내렸던 수많은 무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덕신께서 만들어 오셨던 무구들이었던 게로군.’
그가 만든 무구들이 그를 향한 신앙의 계기 중 하나였으리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토순이가 다리를 꼬며 집중할 때였다.
탐욕의 단련을 끝낸 그리드가 품에서 가죽 뭉치를 꺼냈다.
군데군데 찢겨져 질이 나빠 보이는 가죽이었다.
커다란 상처를 입고 죽은 짐승의 가죽이라도 벗겨온 듯했다.
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형편없는 가죽이구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는 만큼 청호는 자신의 가죽에 큰 자부심을 지녔다.
가죽에 일가견이 있는 그가 봤을 때 그리드가 꺼낸 가죽의 질은 정녕 최악이었다.
“설마 그걸 써먹겠다는 것이냐?”
“응. 가죽이나 천을 안쪽에 덧대야 착용감이 좋아지고 외부에서 오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거든.”
그리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청호가 으르렁거렸다.
“아서라. 그따위 가죽을 쓰느니 차라리 나의 가죽을 벗겨 써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즉, 가죽을 벗는 건 죽었을 때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하지만 청호는 신수다.
가죽이 벗겨져도 죽지 않고 회복했다.
물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그쯤이야 그리드를 위해서 인내할 수 있었다.
“자! 내 가죽을 벗겨라! 커흥!!”
청호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주작을 부활시켜 십이지와 남방을 해방하고 ‘미래’를 안겨준 세계의 은인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자처했다.
“오? 고맙다.”
그리드는 마다하지 않았다.
무려 신수가 자신의 가죽을 내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베리드의 가죽보다 좋을 수도.’
아니, 무조건 더 좋을 거다.
신수는 완전한 반신.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22위 대악마일지라도 신수와 비교해선 격이 떨어진다.
주섬주섬 챙기고 있던 베리드의 가죽을 내려놓고 단도를 꺼낸 그리드가 성큼성큼 청호에게 다가갔다.
그러다가 문득.
바들바들.
청호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챘다.
사색이 된 호랑이들이 청호를 미친 놈 보듯이 하고 있단 사실도 깨달았다.
‘미친.’
너무 당당하게 가죽을 벗기라기에 쉬운 일인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닌 듯하다.
말 그대로 동물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는 잔악한 짓을 벌일 뻔했다.
한숨 쉰 그리드가 칼을 돌려 넣었다.
“정신 나간 소리 관둬. 그리고 뭔가 착각하나 본데, 이 가죽 보기보다 좋아.”
22위 대악마 베리드의 가죽이다.
훼손된 부분은 무두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다.
따앙!
각반의 형태가 완성된 탐욕을 치우고 모루 위에 베리드의 가죽을 올려놓은 그리드가 무두질을 시작했다.
찢어지고 구멍난 부분들을 평평하게 만들어 완벽하게 메웠다.
잠재력 개방으로 등급이 상승한 대장장이 기술, 그리고 서사시의 호응으로 인해 발달한 손재주가 있었기에 실현시킬 수 있는 신기였다.
“윽....”
걸레짝이나 다름없던 가죽을 깔끔하게 메우는 그리드의 솜씨에 놀라 찬사를 보내던 십이지와 영물들이 일제히 코를 틀어막았다.
지독한 악취를 느낀 것이다.
가죽으로부터 피어오르는 마기가 십이지와 영물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여왕 쥐 경자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리드, 그건 멀리해야할 물건 같아. 더러워.”
“음....”
대악마를 향한 신수들의 적개감이 그리드에게는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사실 그리드는 마기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오랜 시간 흑화와 암흑의 룬을 애용해온 만큼 마기를 도리어 친숙하게 느꼈다.
‘하지만 일반적으론 마기를 꺼려하는 게 당연하지.’
마기는 대악마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개 신이란 대악마와 적대했다.
인류의 염원으로 탄생해 오직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사신과 십이지의 입장에선 더더욱 대악마가 꺼려질 것이었다.
대악마란 인류 최대의 적이었으니까.
“뭐, 걱정하지 마.”
그리드의 마지막 말이었다.
따앙! 따앙! 따앙!
십이지들이 뭐라고 떠들던 말든 그리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무두질한 가죽을 각반의 안쪽에 덧대는 시점부터 무아지경의 상태에 돌입했다.
화르르륵!
그리드의 망치로부터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공> 칭호가 발생시킨 <의지의 불꽃>이었다.
[<의지의 불꽃> 효과로 작업 속도가 2배 상승합니다.]
[<의지의 불꽃> 효과로 현재 제작 중인 아이템에 <화공의 숨결> 옵션이 귀속됩니다.]
<화공의 숨결>
화염 공격력 20퍼센트 상승.
화염 내성 50퍼센트 상승.
의지 스탯 5퍼센트 상승.
쿠오오오오오!!
그리드의 망치에 깃든 불길이 보다 거세질수록 단련 중인 각반이 붉게 달아올랐다. 단단해지기를 거듭했다.
“됐군.”
내내 잠자코 서있던 브라함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고,
쏴아아아아!
찬란하면서도 따스한 백색의 빛이 큰 독 쥐 군락 전체를 뒤덮었다.
브라함과 십이지를 제외한 모든 영물들이 너무나도 밝은 빛을 감당치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천지를 지탱하는 백호의 각반>의 제작에 성공하였습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하였습니다.]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은 한시적으로 활성화된 스킬입니다. 신화 등급 아이템 제작 횟수가 누적되지 않습니다.]
[백호의 기운이 폭사하면서 청호에게 축복을 내렸습니다. 백호의 후손인 청호는 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천지를 지탱하는 백호의 각반>
등급:신화
세트 아이템(백호 세트)
내구력:무한 방어력:1,200
*땅 속성 내성 +60%
*암흑 속성 내성 +40%
*하반신 피격 시 방어력 +30%
*하반신 피격 시 높은 확률로 피해 무시.
*하반신 피격 시 높은 확률로 <가시>를 방출. 날카로운 돌의 가시가 대상에게 입은 피해량의 50퍼센트에 해당하는 반사 데미지를 입히고 회복 효과를 감소시킵니다.
*스킬 <백호 자세> 생성.
*스킬 <백호 울음> 생성.
*스킬 <울부짖어라!> 생성.
*패시브 스킬 <대지의 화신> 생성.
*지형이 협곡인 장소에서 방어력 10퍼센트 상승.
*지형이 협곡인 장소에서 광역 스킬의 위력이 20퍼센트 상승.
*22위 이하의 대악마와 조우 시 대상의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을 10퍼센트 저하.
*파괴에 이를 정도의 손상을 입을 시 5초 동안 내구력이 최소치로 고정. 이 효과가 끝난 후 내구력 10퍼센트 복구. (재사용 대기 시간 24시간)
★스킬 <바위> 생성.
★스킬 <지신> 생성.
잠시 신과 필적하게 된 대장장이 그리드가 제작한 각반입니다.
골반부터 무릎까지 덮는 각반이지만 재료로 사용한 고차원적인 기술과 <탐욕>의 유연한 탄성 덕분에 움직임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강화된 베리드의 가죽>을 안감으로 삼아 더욱 높은 방어력과 암흑 속성 저항력을 겸비하였습니다.
<강화된 백호의 숨결>이 베리드의 가죽에 깃든 경질화 특성을 강화시켰고 탐욕이 이를 온전히 흡수하는 과정에서 사방신 중 하나인 <백호>의 능력 일부가 우연적으로 구현되었습니다.
강화된 백호의 숨결이 착용자에게 신화적인 가호를 내립니다.
그리드의 서사가 담겨있습니다.
★3개의 세트 아이템 장착 시 방어력과 생명력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착용 조건:그리드
무게:600
<백호 자세>Lv.1
백호의 자세를 취합니다.
공격력이 80퍼센트 감소하고 이동할 수 없게 되는 대신 방어력이 198퍼센트 상승합니다.
활성화 시 마나 소모:초당 17
재사용 대기 시간:30분
*신화급 아이템에 귀속된 스킬은 레벨업이 가능합니다.
<백호 울음>Lv.1
반경 5미터에 지진을 발생시킵니다.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상태이상 ‘균형 상실’에 걸리며 방어력과 회피율, 그리고 명중률이 13퍼센트씩 하락합니다. 마법이나 스킬을 캐스팅 중이던 대상은 캐스팅이 강제적으로 취소됩니다.
마나 소모:1,500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신화급 아이템에 귀속된 스킬은 레벨업이 가능합니다.
<울부짖어라!>Lv.1
포효하는 백호의 형상을 소환합니다.
백호의 포효가 닿는 범위에 있는 모든 적이 최소 1초에서 최대 7초 동안 경직되고 모든 아군의 방어력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마나 소모:2,000
재사용 대기 시간:12시간
*신화급 아이템에 귀속된 스킬은 레벨업이 가능합니다.
<바위>Lv.1
몸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듭니다.
겪고 있는 상태이상을 해제합니다.
2초 동안 모든 피해를 면역합니다. 단, 모든 속도가 50퍼센트 감소합니다.
백호 자세에서 전개 시 4초 동안 모든 피해를 면역합니다. 단, 모든 속도가 70퍼센트 감소하고 이동이 불가능해집니다.
마나 소모:초당 1,000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신화급 아이템에 귀속된 스킬은 레벨업이 가능합니다.
<지신>
조건부 발동 패시브
백호의 기운과 동화합니다.
지면을 밟고 있을 시 매우 낮은 확률로 대지의 제어권을 얻습니다.
2,000의 마나를 소모해 대지의 형상을 변경시킬 수 있습니다. 변경 된 형상은 30초 동안 유지됩니다.
3,000의 마나를 소모해 반경 10미터 대상을 돌로 만듭니다. 돌이 된 대상은 모든 행동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모든 피해에 면역합니다.
공격 시 <기둥 방출>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거대한 돌의 기둥은 공격 대상을 최대 5미터 날려버리는 ‘차징’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때 적용되는 피해량은 무기 공격력의 50퍼센트입니다.
*지신 상태에서 사망 시 청룡의 분노를 삽니다.
*신화급 아이템에 귀속된 스킬은 레벨업이 가능합니다.
“우왓....”
십이지와 영물들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입장에서 봤을 때도 그리드가 제작한 각반은 범상치가 않았다.
묵색 판금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금색의 테두리와 은은한 백색의 광체....
거대한 백호의 기운이 잠재되어 있었으니 일견하기에도 엄청난 성능을 자랑할 것이 분명했다.
“후우....”
그리드는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잠재력 개방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기까지 9시간이 남았음을 확인했다.
그리드가 할 말을 잃고 있는 십이지들에게 말했다.
“다음은 너희 아이템을 만들자. 일단 경자의 창하고 왕관, 망토부터 새로 만들어줄게.”
“....!”
십이지들은 육신의 능력만으로 양반에 필적한다. 동물답게 도구를 등한시했다.
실제로 경자를 제외한 청호와 토순이는 나뭇잎 한 장으로 중요 부위들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그런 십이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드가 만든 각반을 한 번 목도한 것만으로 템빨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