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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78화 (1,068/1,794)

템빨 56권 - 6화

그리드는 잊지 못한다.

인간들의 이상(理想)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마주했던 대장장이를.

황금색 구름떼를 반사하며 찬란하게 빛났던 모루 앞에 선 그는 불타는 젖꼭지로 금속을 제련하였고 번개가 담긴 망치로 금속을 단련하였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그리드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대장장이가 추구해야할 이상이 바로 그였다.

젖꼭지는 빼고.

“....후우.”

일시적으로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을 손에 넣은 그리드가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나는, 너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가람과 나눴던 마지막 대화 중 일부를 복기한다.

가짜 신의 자격을 지녔을 뿐이던 가람을 끝내 넘어서지 못한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한다.

플레이어라면 응당 짊어지어야할 한계.

그래, 자신은 플레이어다.

네임드 NPC의 성장력을 넘어설 수 없을뿐더러 기본 능력치부터가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아무리 레벨을 올려도, 아무리 격을 쌓아도.

설령 신이 될지언정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현실적인 추측이다.

신이 된다한들 동격, 혹은 그 이상의 NPC가 눈앞에 적으로 등장하는 순간 그리드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애써 미련을 품지 않았다.’

가람에게,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너를 넘어서겠다.’는 뒷말을 차마 잇지 못했었다.

간절한 바람을 마음속의 공허한 외침으로 남겨둔 채, 자신을 돕고자 나타난 브라함과 동료들에게 순순히 의지했었다.

가람과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기고야 말겠다는 그 허황된 목표를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굴레에 빠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미친 듯이 발버둥 쳐도 가람을 이기는 건 힘들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주작의 심장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으니까.

회복력.

여태껏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여겼던 존재들이나 지닐법한 압도적인 회복력을 그리드는 손에 넣었다.

당장은 수 초, 수십 초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이 고작인 회복력이었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만큼은 플레이어의 한계를 완벽히 초월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나 통용될 초월이 아닌, 진짜 초월 말이다.

“.....”

그리드의 심상이 깊어졌다.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소검의 형상과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 서서히 떠올랐다.

<헥세타이아의 소검>

등급:신화

공격력:28,990

....

...

다른 건 몰라도 공격력 하나만큼은 정확히 기억난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허황된 수치로 받아들여졌었다.

플레이어는 평생이 지나도 얻지 못할 공격력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번에 얻은 회복력이 가능성을 시사했다.

플레이어 또한 초월적인 능력치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그리드에게는 그 가능성을 실험해볼만한 능력이 있다.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 Lv.1

<제작> 버튼이 활성화되며 아이템 제작에 걸리는 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최소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일정 확률로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일정 조건이 충족될 경우, 낮은 확률로 신화 등급 모작이나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제작하는 아이템의 능력치가 제작법에 표기된 것보다 40퍼센트 강화됩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 제작 시, 당신을 향한 대장장이들의 신앙이 상승하여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3개 제작할 때마다 신위가 1 상승합니다.

★한시적으로 활성화된 스킬입니다. 신화 등급 아이템 제작 횟수가 누적되지 않습니다.

그리드는 ‘최소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 된다’는 대목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전설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노리는 그의 입장에선 에픽 등급이든 유니크 등급이든 똑같이 가치가 적었기 때문이다.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은 <잠재력 개방>을 사용해야만 활성화되는 단발성 스킬이니만큼 최고의 결과를 목표로 삼아야했다.

그리드는 ‘제작 아이템의 능력치 40퍼센트 강화’라는 효과에 주목했다.

<眞-(신과 대적하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과 비교해서 10퍼센트나 높은 수치다.

제작 아이템의 능력치가 높을수록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다.

‘무조건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만들어야 돼.’

가장 시급한 아이템은 방어구다.

회복력을 뒷받침해줄 방어력이 필요하다.

제아무리 뛰어난 회복력을 지녀봤자 방어력이 낮으면 무용지물이니까.

‘지금 내 템들은 너무 낡았어.’

마법 공격에 대응할 때 스왑하는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

티라멧의 견갑과 반짝 각반, 란스티어의 망토.

알렉스의 신속 장갑과 꼬깔 투구, 그리고 템빨 왕관.

현재 그리드가 사용 중인 방어구는 전부 오래 전에 얻은 것들이다.

그나마 최근에 제작한 편에 속하는 꼬깔 투구와 템빨 왕관조차도 제4회 국가대항전 이전에 만든 것으로 게임 시간으로 무려 4년째 사용 중이었다.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는 제1회 국대전이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사용해왔고....’

사실, 어디 가서 템빨왕이라고 자처하기도 부끄러운 상태다.

평범한 플레이어들조차도 부지런하게 신상 장비를 맞추고 스펙을 올리는 마당에 그리드 혼자서만 골동품을 애지중지해왔으니까.

‘템빨’이라는 말이 아직 세간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을 당시, 만약 그리드에게 말빨만 있었어도 ‘나야말로 템빨이 아닌 실력으로 게임하는 사람이다.’고 우길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상태론 답이 없어.’

바꿔야한다.

바뀌어야한다.

기본적인 능력치는 낮을지언정 ‘한 분야에 특화된 성능’을 지녔다는 이유로 버리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이 낡은 아이템들을 모조리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한다.

신수의 힘을 되찾은 청호가 단지 끌어안았다는 이유만으로 18,500의 데미지를 입었을 때부터 확신했다.

‘단단해져야 돼.’

칸의 유작 발할라만큼은 애써 대상에서 제외한 그리드가 양반들로부터 획득한 전리품을 꺼냈다.

백호의 숨결 3개와 현무의 숨결 3개, 그리고 주작의 숨결과 청룡의 숨결이 각각 2개씩이다.

청룡의 도포와 곰방대, 연검과 단창 등 양반들이 애용했던 장비들도 전리품에 포함되긴 했지만 그리드가 직접 만든 아이템들과 비교해서 성능이 다소 떨어졌다.

400레벨대 보스가 드롭하는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 수준이랄까.

명색이 반신이라는 족속들이 드롭한 아이템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아쉬운 수준이다.

납득은 됐다.

양반들은 태생적으로 타고난 힘과 사신으로부터 착취한 힘으로 강력하게 거듭난 존재들.

애초에 장비에 의존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사용했던 아이템의 성능이 뛰어나면 도리어 이상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숨결 하나만 드롭해도 대박인 게 맞기도 했다.

국대전의 여파로 사신의 숨결이 흔해 보이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어디까지나 그리드 입장에서만- 사실 사신의 숨결만큼 고위급 드롭템도 드물다.

빨, 파, 흰, 검.

각기 다른 색을 품은 숨결들을 손에 쥔 채 빤히 바라보던 그리드가 검정색의 숨결을 제외한 나머지 숨결들을 인벤토리에 돌려 넣었다.

그가 선택한 검정색 숨결이 바로 현무의 숨결이다.

“얼마 전에.”

동대륙을 찾아오기 전, 그리드는 보유 중이던 숨결 2개로 아이템을 제작한 바 있다.

하나는 주작의 숨결로 만든 검이었다.

로드에게 선물해주기 위해서 만든 성장형 무기였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검과 함께 성장하며 가족과 백성들을 잘 지켜달라는 의미를 담은 선물이었다.

“나는 현무의 숨결을 제련하는데 실패했었어.”

그리드가 제작한 2개의 아이템 중 다른 하나는 현무의 숨결로 만든 칼날이었다.

새로운 신검으로 삼을 계획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결과가 최악이었다.

굳이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악했다.

수 년 전 데미안의 의뢰를 받아 현무의 숨결로 제작했던 아이템보다 성능이 떨어졌다.

“혼자서는 이 안에 깃든 죽음의 힘을 제어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었다.”

그리드가 처음부터 주작의 숨결을 잘 다뤘던 이유는 상성이 맞았기 때문이다.

주작의 숨결에 깃든 속성은 불과 생명.

불을 다룸으로써 물건을 창조하는 대장장이와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반면 물과 죽음의 기운을 품은 현무의 숨결은 대장장이와의 상성이 최악이었다.

물의 기운이 대장장이의 불꽃을 잠재웠고 죽음의 기운이 대장장이의 창조를 방해했다.

제련할수록 녹슬고 단련할수록 약화되는, 그런 성질을 지닌 것이 바로 현무의 숨결이었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조언을 얻고 싶어. 현무의 숨결에 깃든 죽음의 기운을 잠시나마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리드가 질문하자 경청하고 있던 신수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표정들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모르겠어.”

“아마 힘들 거야. 현무 신의 역할 자체가 ‘쓸데없는 것’을 멸함에 있거든.”

“쓸데없는 것?”

“현무 신은 자연적으로 탄생한 생명과 물질에만 관대해.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생명이나 물건은 만물에 해악이 된다고 보고 소멸시켜.”

“.....”

현무가 지닌 속성은 물과 죽음.

처음 이 같은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드는 다소 의아했었다.

물은 생명의 탄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을 텐데 어째서 죽음을 관장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됐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해됐다.

현무는 만물을 수호하려는 습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도리어 파괴의 성향을 띄게 된 것이다.

‘양반들조차도 현무의 숨결을 남발하지 못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엄밀히 따지면 양반들 또한 인공적인 존재들이었다.

오직 한울에 의해서, 한울을 위해서 탄생한 그들이 현무의 힘을 완벽히 통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으리라.

‘....현무의 숨결이 가장 위협적인데도 잘 안 쓴다 싶더니 사정이 있었군.’

그리드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사실 그는 웨폰 브레이커 컨셉의 방어구 세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현무의 숨결로 각반, 견갑, 투구를 제작해 피격 시 대상의 무기를 부식시키고 약화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의 방어력을 높이는 구조를 떠올렸다.

한데 힘들게 생겼다.

현무의 숨결은 아이템 제작 재료로 적합한 물건이 아니었다.

물론 아예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데미안의 아이템을 만들어줬을 때처럼 물속성이 강하게 깃든 광물을 재료로 사용하면 현무의 숨결로도 충분히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었다.

단, 그 경우엔 물 속성만 강조될 뿐이고 진정한 현무의 숨결의 위력은 드러나지 않을 테니 기대치가 높지 않다.

‘현무의 숨결은 일단 킵하고 백호의 숨결부터 사용하도록 하자.’

백호의 숨결에는 상대방을 약화시키는 기능이 부족하다.

백호의 숨결로 만든 방어구와 현무의 숨결로 만든 방어구를 놓고 비교할 경우, 활용하기에 따른 잠재력은 현무의 숨결로 만든 방어구가 훨씬 더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안정성 면에서는 백호의 숨결로 만든 방어구가 압도적으로 훌륭했다.

현무의 숨결로 만든 방어구는 상대방을 약화시켜야 고점을 찍는 반면 백호의 숨결로 만든 방어구는 기본 방어력 자체가 높기 때문이다.

경질화, 무게 상승, 가시 방출 등...

유틸성도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은 수준을 넘어설 수도 있어.’

주작 수호전 당시.

주작의 숨결을 운영할 수 없게 된 양반들은 회복력을 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의 악화를 피하며 꿋꿋이 버텼다.

‘백호의 경질화 특성을 활용한 게 틀림없다.’

상처 부위를 경질화 시킴으로써 상처가 더 심해지는 걸 막았으리라.

화르륵!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리드가 휴대용 용광로에 불을 붙였다.

더 이상 반짝 각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낡은 각반을 대신할 새로운 각반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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