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5화
“네, 네가 어떻게...?”
푹신푹신한 살과 부들부들한 털.
커다란 햄스터의 품에 안긴 그리드가 혼란에 빠졌다.
여왕 쥐.
처음 본 그날처럼 조악한 왕관과 걸레쪼가리 같은 망토를 걸친 녀석은 필시 죽었었다.
그것도 그리드의 손에 의해서.
한데 지금 버젓이 살아서 나타난 것이다.
당혹감에 휩싸인 그리드를 품에서 놓아준 여왕 쥐가 빙그레 웃었다.
예전에는 독기를 풀풀 풍기던 녀석이 이제는 동글동글하고 상냥한 시선으로 그리드를 마주봤다.
“주작 신께서 부활하신 덕분에 나도 부활하게 됐어. 주작 신을 섬기는 십이지의 신화가 존재하기 때문이야.”
보통의 방법으로는 신화적 존재를 죽일 수 없다.
히드라의 경우처럼 별도의 공략법을 밝혀내거나 사람들의 신앙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불멸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한 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햄스터들의 모습만 보였다.
“아....”
계속 사방을 살피던 그리드가 여왕 쥐와 눈이 마주치더니 시선을 피했다.
여왕 쥐가 쓴 미소를 그렸다.
“내 남편을 마음에 두는 거구나.”
“....”
“내 남편은 나와 달리 평범한 영물이었어. 신수가 아니라서 부활할 수 없었어.”
“....”
그리드가 여왕 쥐를 처음 발견했을 당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컷치고 강한 쥐라는 이름의 남편과 함께 오순도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평화는 깨졌다.
그리드가 그녀의 남편을 살해했으니까.
물론 당시의 쥐들은 괴물로 전락한 상태였다. 사람들을 해치는 흉수였다.
그리드가 그들을 토벌한 일은 칭송받아 마땅할 업적이었고 실제로 민간을 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미안한 건 사실이다.
그리드는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를 구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여왕 쥐의 마음만 더 불편해질 것이다.
어찌됐든 그녀는 그리드를 원망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그런 그녀에게 사죄한다는 것은 그리드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당시의 나는 이들을 토벌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옳았어. 그리고 그때부터 이어져온 인과가 있기 때문에 주작도 부활하게 된 거야.’
깊이 생각하며 입을 다무는 그리드에게 여왕 쥐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
“마음 쓰지 마. 나는, 우리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네가 그때 우리를 토벌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을 해쳤을 테고 그건 우리에게도 큰 슬픔이 됐을 거야. 그러니까 표정 풀어. 앞으로 잘 부탁해, 은인.”
“....나도 잘 부탁한다, 경자야.”
다시 부활한 여왕 쥐의 이름에는 경자가 추가돼 있었다.
쥐의 이름이 왜 하필 경자인진 모른다.
하지만 정감 가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네 할머니들의 이름과 비슷했기에.
“묘옹! 묘옹! 묘옹! 여왕 전하 만세에!!”
“묘옹! 묘옹! 묘옹! 인간 친구 만세에!!”
악수를 나누는 그리드와 경자의 모습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쥐들이 손에 쥔 삼지창으로 땅을 치며 환호했다.
너무 짧아 털에 가려지는 발을 콩콩콩, 구르는 모습들이 귀여웠다.
독기 풀고 덤볐던 괴수 시절의 모습이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소란 속에서.
“.....”
브라함은 침묵했다.
수컷치고 강한 쥐를 살해한 사람은 사실 그리드가 아닌 브라함이었으니까.
당시 <동화>를 이용해 그리드의 육체를 지배했던 브라함은 수컷치고 강한 쥐를 상대로 <알람> 마법의 위력을 시연했고 수컷치고 강한 쥐는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경자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리드도 굳이 브라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브라함이 쓸데없이 나섰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흑우도 부활한 거지?”
어느새 춤까지 추기 시작한 햄스터들의 소란을 뒤로한 그리드가 질문하자 경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걔도 십이지인데 당연하지. 부활하자마자 인간으로 둔갑하더니 마을로 떠났어. 어서 빨리 노름하고 싶다고.”
“...?”
“끙차.”
철푸덕!
여왕 쥐가 엉덩방아 찧듯이 주저앉았다.
그리드보다 몸집은 두 배나 큰데 발은 작으니 오래 서있기 힘든 눈치였다.
“청호와 토순이의 안부가 궁금해서 다시 찾아온 거지?”
부활한 뒤에 청호와 토순이를 만나 본 듯하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네 상태를 보니까 당연히 그 둘도 무사하겠네.”
“응. 그래도 한 번 들러줘. 애들 모두 너와의 재회를 애타게 고대하고 있....”
토순이가 말할 때였다.
“그리드으!! 커흥!!”
“신! 시이인!!”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난다 싶더니 호랑이 수십 마리가 달려왔다.
선두에는 청호가 있었고 청호의 어깨 위에 토순이가 앉아있었다.
“너희들...!”
그리드가 반색했다.
청호와 토순이는 물론이고 자신을 탈출시켜주기 위해서 희생했던 이빨 빠진 호랑이들도 무사히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한결에게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무사한 모습을 보자 무척 기뻤다.
그리드에게 다가온 호랑이들이 틀니를 딱딱 거리며 말했다.
“뭐냐, 그 반응은. 어흥. 인간 설마 우리를 걱정한 거냐.”
“어흥흥, 괜한 걱정이다. 우리는 소싯적 줄담배 피고도 아직도 건강히 살아있을 만큼 건강한 동물이니까. 어흥.”
“그리드! 주작 신을 부활시켜줘서 고마워! 젠장! 믿고 있었다구!”
“억.”
으쓱하며 말하는 호랑이들의 사이를 비집고 뛰쳐나온 청호가 그리드를 와락 끌어안았다.
[18,5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과연 호랑이는 호랑이다.
푹신푹신했던 여왕 쥐의 품과 달리 청호의 품은 단단하고 아팠다. 그리드는 등골이 휘는 듯한 격통을 느껴야만 했다.
“어허! 무엄해!”
호통친 토순이가 청호를 그리드로부터 떼어냈다. 그리고 아파서 부들부들 떠는 그리드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당신이 토끼들을 도망치게 해주려고 희생했던 모습을 절대로 잊을 수 없어. 당신의 공덕을 우리는 영원히 회자할 거야. 새로운 신.... 덕신....”
“....”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채 포근함을 느끼던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들 무사해서 기쁘고, 반겨줘서 고맙고, 정말로 다 좋은데 왜 하필 덕신이란 말인가?
그리드가 부정했다.
“자꾸 신이라고 부르지 마. 아직 난 인간이니까.”
“아직은 그렇지. 하지만 당신의 덕행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쌓일 테고 결국 덕신이 될 거야.”
“떡신은 어떠냐흥.”
“떡 먹고 싶다. 어흥.”
“....제발 다 닥쳐.”
신과 대적하며 신화적 존재가 되어갔던 히드라와 달리 신을 섬김으로써 신화적 존재가 된 존재들.
그게 바로 신수다.
선한 신의 곁에서 인간들을 보살펴온 이들답게 착하긴 무척 착했지만 눈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짐승이다 보니 인간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등 한계가 있었다.
그리드가 계속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어도 연신 덕신, 떡신이라고 지껄이는 이유다.
“오오.... 주작 신의 심장을 품었구나.”
그리드를 빤히 쳐다보던 청호가 화색을 띄었다.
그러자 여왕 쥐 경자와 토순이도 뒤늦게 그리드를 관찰하더니 감탄했다.
“대단해! 정말로 주작 신의 심장을 품었어!”
“엣헴, 당연하지. 우리 덕신께서 주작 신을 부활시켜주셨으니 주작 신께서 응당 보답하실 거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고.”
“아....”
그리드가 이제야 실감했다.
자신이 ‘신의 심장’을 품었다는 사실을.
주작의 심장이 <룬>이라는 히든 아이템의 성질 자체를 변경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고차원적인 가치와 효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주작 신께서 자신의 1,000번째 심장을 나눠주신 거야?”
“아니야, 999번째 심장을 나눠주셨을 수도 있어.”
“아무리 그래도 세 자릿수 심장을 주셨을 리가 없지. 세 자릿수 심장은 엄청 긴 시간 동안 주작 신께서 직접 품고 계신 힘인데....”
“맞아, 맞아. 그건 주작 신께서도 너무 큰 희생을 감수하셔야 한다고. 오존들에게 심장을 뺏기시고 울부짖으셨던 모습을 나는 여전히히 똑똑히 기억해.”
주작의 심장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축적된다.
매 해마다 하나의 심장이 새롭게 생기는데 심장이 즉 주작의 생명이자 힘이었다.
보다 오래 전에 자리 잡은 심장일수록 더 큰 생명력과 힘을 품었으니 오래 전에 자리 잡은 심장을 떼어내는 행위는 주작의 고통과 약화로 직결됐다.
하지만 청호는 장담했다.
“그리드는 은인 중의 은인이야. 분명히 999번째 심장을 나눠주셨을 거야.”
주작이 봉인 된 활을 그리드에게 맡겼을 당시만 해도 청호는 작금의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리드가 주작을 부활시키기까지 정말 긴 시간이 걸리거나 부활시키는데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상황을 현실적으로 직시했던 것이다.
사방신 전원을 봉인한 오존과 양반들을 상대로 고작 1명의 인간이 맞서 싸운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리드는 주작을 불과 며칠 만에 부활시켰다.
주작 신께서 그리드가 대견하다고 999번째 심장을 나눠주셨어도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의심치 않은 청호가 그리드에게 기대어린 시선을 보내자 그리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9번째 심장을 받았는데....”
“....!?”
“....!?”
신수들과 영물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칫했다간 죄다 눈이 빠질 기세였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리드는 너무 격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작의 심장이 ‘신의 심장’이라는 근원을 지닌 이상 세상에 둘 도 없는 가치를 지녔다는 건 인정한다.
주작의 9번째 심장이 <암흑의 룬>을 <탐식의 룬>으로 진화시킨 것은 분명히 굉장한 사건이었지만 평상시 효과는 ‘치유력 상승’과 ‘스태미나 회복 속도 상승’이 전부인 바.
실질적인 성능 면에선 다소 부족했다.
그리드는 신수들의 반응이 다소 과장됐다고 느꼈다.
토순이가 빽 소리쳤다.
“당연히 대단하지! 한 자릿수 심장은 ‘두 번 다시 재생시킬 수 없는’ 주작 신의 진짜 심장이니까!”
“....?”
호들갑 떠는 토순이를 대신해서 경자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쉽게 설명해줄게. 주작이라는 신을 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작 신의 한 자릿수 심장 9개를 소멸시키는 거야. 하지만 오존조차도 9개의 심장은 건들지 못했어. 강한 생명력과 힘이 깃든 만큼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는 거지. 9개의 심장이 온전한 이상 주작 신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거야.”
말인 즉.
“9개의 심장은 주작 신의 목숨 그 자체야. 주작 신께서 책임지고 계신 이곳 남방의 운명을 결정 짓는 열쇠이기도 해. 너는 그 열쇠 중 하나를 손에 넣은 거고.”
“....”
그리드가 말문을 닫았다.
주작이 대체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심장을 나눠준 건지 이제야 눈치 챘기 때문이다.
‘나를 동반자로 선택했구나.’
꾸욱...
그리드가 가슴을 거머쥐었다.
두 개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네 번째 서사시를 떠올렸다.
신이 되겠노라 다짐했었다.
멸망할 세계를 지켜보이겠노라 선언했었다.
‘그리고.’
....주작은 나의 선언을 지지해주었다.
“....”
그리드의 눈이 반개했다.
기우는 석양에 음영이 드리운 그의 얼굴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한참을 가만히 서서 생각하던 그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가람이 죽으며 남긴 물건들과 대장장이 망치를 꺼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떠올린 것이다.
“우리 같이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자.”
[잠재력을 개방합니다.]
[상위 스킬을 개방할 스킬 트리를 선택해주십시오.]
[<眞-(신과 대적하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마스터가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 Lv.1로 진화합니다.]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은 제작 스킬로 분류됩니다. 하나의 아이템을 완성할 때까지 효과가 유지됩니다.]
“일단은 템빨부터 갖추자고.”
[첫 번째 서사시의 한 구절이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기술>에 호응합니다.]
[천만 번의 망치질로 단련한 육신....]
[서사시 효과로 제작에 영향을 주는 모든 능력치와 스킬 효과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