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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76화 (1,066/1,794)

템빨 56권 - 4화

조명 없이도 빛나는 새하얀 피부와 이를 비추는 순은의 갑옷은 지옥의 유일한 순백이다.

악의와 살의로 들끓는 지옥에서 오직 그녀만이 고결했고 정의였다.

타탕-!

타타타타타타타타탕!!

데빌 슬레이어 유라.

그토록 증오하는 지옥을 재현해 분노의 힘을 끌어올린 그녀가 총을 쏘자 탄막이 내려 하늘을 덮는다.

표적 맞추기에 참가한 모든 플레이어를 가두는 새장의 탄생이었다.

-와....

불과 23초 만에 끝나버린 경기.

다양한 시점으로 반복 재생되는 경기 내용을 몇 차례나 복기한 시청자들이 뒤늦게 탄성을 터뜨렸다. 전 세계가 전율했다.

그리드가 국대전에 참가하자마자 선보였던 전설의 위용을, 유라는 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제대로 증명한 것이다.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

가슴을 부풀리며 호흡을 고르는 유라의 눈앞에 주마등이 스쳐갔다.

대악마 아모락트와 만난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온갖 시련과 번뇌가 하나도 빠짐없이 떠올랐다.

레이더스에서 내린 지발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그동안 너도 마음고생이 심했나보군.... 축하한다.”

축하라기보다는 위로와 닮은 말투, 그리고 표정이다.

왜?

의아함을 느끼던 유라가 문득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자각했다.

“아....”

자신은 이토록 간절했던가?

그리드, 크라우젤, 피아로, 메르세데스....

같은 전설이되 한참을 앞서갔던 그들을 늦게나마 따라가고 있단 사실에 안도하며 눈물 흘릴 정도로?

“고마워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화답하는 유라에게,

“이봐.”

잔뜩 얼굴을 찌푸린 지발이 말했다.

“고작 한 번 이긴 걸로 좋다고 울지 마. 내년에는 내가 이길 테니까.”

“....?”

그쪽 이겼다고 좋아서 우는 게 아닌데.

말하려던 유라가 입을 다물었다.

지발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을 엿본 까닭이다.

“...알았어요.”

그래, 나뿐만이 아니다.

눈앞의 지발도, 저쪽에 침통한 표정으로 서있는 다른 참가자들도 지난 1년 동안 노력해왔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존중받아 마땅했다.

“내년을 기대할게요. 그때도 꼭 멋진 승부를 겨뤄요.”

드물게 웃는 유라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잠시 침묵한 채 그녀의 미모를 감상했다.

이어서.

화르르르륵!!

두 번째 경기 <성검 뽑기>가 시작되며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등장했던 유라와 상반되게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등장한 지슈카가 일대를 열기로 지배했다.

“....의외군.”

쩌엉!

화살을 쳐낸 반동으로 저려오는 손목을 주무른 크라우젤이 화염의 장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타오르는 활대를 거머쥔 적발의 미녀가 보였다.

지슈카였다.

크라우젤이 출전하겠다고 이미 며칠 전부터 공표했던 성검 뽑기에 그녀가 출전한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거리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검성의 검술은 궁사에게 최악의 상성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왜 승산 없는 종목에 참가한 거지?

시청자들의 의문이 난무하는 그때.

“크라우젤.”

열기마저 잊게 만드는 시원한 미소를 그린 지슈카가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너를 꺾어야겠어. 궁성 전직 퀘스트를 얻었거든.”

“.....”

지슈카의 성검 뽑기 출전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섣불리 납득하지 못했다.

“상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가 필요하다.”

많은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지슈카의 재능이 크라우젤을 넘어서지 않는 한, 그녀는 궁성이 된 후에도 크라우젤을 이길 수 없다.

궁성의 전직 조건이 검성과 마찬가지로 ‘당대 전설’과 싸워서 이겨야하는 것이라면, 지슈카는 크라우젤이 아닌 유라에게 도전함이 옳았고 그 시기는 국대전 이전이 됐어야 한다.

끼릭!

지슈카가 시위를 당겼다.

주변에 맴돌던 화염들 일부가 화살의 형상을 갖추더니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 걸렸다.

“힘들기 때문에 도전하는 거야. 너를 쓰러뜨리고 궁성이 되는 편이 멋지잖아? 각오해. 너, 오늘 나한테 만만하게 보이면 나중에 본섭에서 죽어.”

폼생폼사.

지슈카가 한국에 와서 배운 말 중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퍼어어어엉-!

지슈카의 사격이 신호가 되었다.

그녀가 시위를 놓자 발사된 화살이 일대의 화염을 어지럽힘과 동시에 곳곳에 숨어있던 다른 나라 소속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나타나 크라우젤을 덮쳤다.

지슈카와 다른 선수들이 사전에 작당한 건 아니다.

다만 크라우젤이라는 절대적인 강자가 그들을 자연히 협력하게 만들었다.

지슈카의 예상대로였다. 그녀가 자신감을 품을 수 있는 근원이기도 했다.

‘여기서 철저히 몰아붙이고 밑천 다 드러내게 만들어줄게.’

템빨국을 떠나 수련하는 동안 지슈카는 큰 발전을 이뤘다. 레벨이 여러 개 올랐을 뿐만 아니라 궁성의 전직 조건을 하나, 둘씩 달성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스킬과 스탯까지 개화시켰다.

더군다나 그리드를 돕기 위해 동대륙을 갔을 때는 의도치 않게 주작의 축복까지 받아 주스탯이 10퍼센트 상승하고 ‘신력이 깃든 무형의 화살’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

지슈카는 가능성을 엿봤다.

PvP 무대보다 수십 배는 크고 다양한 지형지물을 갖춘 이 성검 뽑기의 무대야말로 크라우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대라고 계산했다.

‘오늘 네 전력을 파악해놓겠어.’

사실 쉬운 길도 있다.

굳이 크라우젤에게 도전할 게 아니라 유라나 그리드에게 한 번만 봐달라고 부탁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과거, 크라우젤 또한 그리드에게 사정을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순수한 실력으로 그리드를 꺾고 스스로 검성이 되었다.

긍지라는 것이다.

당연히 지슈카도 긍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동료를 희생해서 전직한다?

평생의 후회로 남을 부끄러운 짓이다.

“.....”

크라우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일렁이는 화염이 방해하는 시야를 차라리 봉인하고 다른 감각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서걱-!

살짝 보폭을 넓히며 검을 휘두른 크라우젤이 지슈카가 쏜 화염의 화살들을 베었다.

2발의 화살이었다.

시청자들은 이로써 지슈카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지슈카의 진짜 한 수는 아직 남아있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력이 깃든 무형의 화살>이 크라우젤의 미간에 꽂히고 있었다.

이를.

촤르륵- 쩌엉!!

검을 회수하는 동작으로 검막을 생성시킨 크라우젤이 막아냈다.

‘검막을 펼칠 틈을 주질 말아야해.’

사전에 자료들을 수집해서 분석하는 과정에서 눈치 챘다.

검성의 검막은 투사체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검막이 존재하는 이상 궁사는 크라우젤을 이길 수 없다.

하니 원천 봉쇄해야한다.

퍼펑!

지슈카가 재차 화살을 쏘았다.

이번엔 크라우젤의 손목을 노렸다.

크라우젤이 검막을 펼치기보다 화살을 피할 수밖에 없게끔 유도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크라우젤은 회피를 선택했다.

검막을 펼치지 못한 까닭에 시간차를 두고 날아간 지슈카의 화살이 크라우젤의 어깨를 스쳤다.

‘그걸 피해? 저 괴물 진짜.... 기습은 무조건 무형의 화살로 해야겠네.’

마침 다른 선수들이 불길을 꿰뚫고 등장해 크라우젤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병장기에 둘러싸인 크라우젤이 허리를 최대한 낮추며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열개(裂開).”

치치칙...

웅크린 크라우젤의 주위로 검기가 피어오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력한 검기였다.

쩌적-!

쩌저저저저적!!

크라우젤의 주변 모든 풍경이 갈라지고, 찢겨지고, 벌어졌다.

막 도착해 크라우젤을 공격하던 모든 선수들의 모습 또한 그 풍경에 포함됐다.

숫자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크악...!”

“끅...!”

동시다발적으로 치명상을 입은 선수들이 피를 토하며 허우적거리는 그때.

“천공(穿孔).”

어느새 다시 뽑힌 크라우젤의 검 끝은 지슈카를 겨누고 있었다.

진정한 전설이란 단순히 강한 것을 넘어서 ‘일어날 수 없는 일’, 혹은 ‘일어나선 안 될 일’을 체현하는 자.

콰작-!!

피를 토하며 허우적거리는 선수들이 채 쓰러지기도 전, 지슈카의 가슴에는 이미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크라우젤 또한 브라함이 말했던 진정한 전설의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쿨럭, 조졌네.”

불의 화신 효과 덕분에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회복하는 지슈카였지만 속내는 허탈했다.

‘설마 이 정도로 성장했을 줄은 몰랐어.’

3년 동안 산속에 틀어박혀있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나보다.

압도적인 재능에 끈기와 집념까지 겸비했으니 그냥 사기다.

파파파팟!!

지슈카가 계속 속사를 쏘았다.

나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그녀의 화살들은 궤도를 읽는 행위 자체를 차단했고 천하의 크라우젤이라도 이를 모조리 막아내진 못했다. 몸 곳곳에 꽤 많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신력이 깃든 무형의 화살은 방어하는데 성공해 급기야 지슈카와의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했다.

“만화 주인공도 너보단 양심이 있을 걸?”

코앞까지 다가온 크라우젤에게 지슈카가 말한다.

덜컥!

크라우젤의 발이 무엇인가에 걸렸다.

무형의 화살에 감각을 집중하느라 덫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퍼엉!!

연속해서 폭발이 일어났다.

흔들리는 배경 속에서 크라우젤의 검이 수십 번의 섬광을 만들었고 지슈카의 화살은 장관을 이루었다. 백호 검이 세우는 돌의 장벽조차도 꿰뚫는 화살의 위력은 종종 크라우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치열한 접전이었다.

하지만 검사가 궁사와의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한 시점부터 승패는 결정 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쓰러졌던 선수들이 다시 일어나 크라우젤에게 몸을 날렸을 땐 이미 지슈카가 자리에서 도주하고 없었다. 거대한 주작이 포효하며 등장하자 크라우젤은 그녀를 섣불리 뒤쫓지 못했다.

“....”

제법 큰 상처를 입은 크라우젤은 덤벼오는 선수들을 일일이 상대하지 않았다.

성검 뽑기의 주된 목표는 성검이 원하는 인물상이 되는 것.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답게 이미 성검의 바람을 파악한 그는 추적해오는 선수들이 난사하는 스킬들을 역이용해 주변의 불을 끄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변을 눈치 챈 몇몇 선수들이 다시 숲에 불을 붙이려고 시도했지만 한 발 늦었다.

불길을 완전히 진화하고 첫 번째 성검의 노래를 얻은 크라우젤은 다음 힌트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이때 지슈카는 크라우젤과 동선이 겹치는 일을 최대한 피하면서 움직였기 때문에 더 이상 크라우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크라우젤 선수가 한 발 빨랐습니다!』

바위에 고고히 꽂힌 검의 첫 번째 주인은 크라우젤이 되었고 두 번째가 지슈카였다.

“내 밑천만 드러냈잖아?”

시상대에 올라 은메달을 목에 건 지슈카가 탄식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 깃든 열정은 처음 그대로였다.

“뭐, 실전에서 다시 만날 땐 내가 더 성장해있으면 되지. 안 그래? 다음에 꼭 내 도전을 받아줬으면 해.”

크라우젤과 시선이 마주친 지슈카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솔직히 크라우젤은 질렸다.

즐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상대였기에.

‘그리드에게 중재라도 요청해야하나....’

***

“잠깐! 잠깐만요!!”

그리드가 저 멀리 앞서 가는 브라함을 불러 세웠다.

순보가 1번 실패하는 순간 브라함과의 거리가 훌쩍 벌어졌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러다가 미아 되면 어쩌려고!”

“다 큰 녀석이 징징대기는.”

팔짱 낀 브라함이 하품하며 기다려주었다.

덕분에 다시 거리를 좁힐 수 있게 된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큰 독 쥐 군락.

그리드가 여왕 쥐를 토벌한 뒤로 무법지대가 됐던 지역이다.

여왕을 잃은 쥐들은 오직 본능대로 날뛰었고 군락의 풍경은 황폐하게 변했었다.

그리드가 카라스로 떠나기 전에 봤을 때도 그랬다.

한데 불과 며칠 만에 큰 독 쥐 군락은 크게 변해있었다.

인간들의 마을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정돈된 상태였다.

‘쥐들이 영물로 되돌아와서 그런 건가?’

주작의 죽음 이후 급기야 괴수로 전락했던 쥐들이 주작의 부활에 영향을 받은 걸 수도 있다.

아주 좋은 소식이다. 그리드가 바랐던 일이기도 했다.

기쁜 마음으로 군락에 진입한 그리드가 화들짝 놀랐다.

“너, 너는?”

분명히 죽었던 여왕 쥐가 다시 부활해 있었다.

반사적으로 위축돼 뒷걸음치는 그리드에게 여왕 쥐가 달려들었다.

햄스터처럼 둥글게 생긴 주제에 엄청난 속도.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다.

뿌리칠 수 없다는 판단으로 검을 뽑아 쥐는 그리드의 몸을.

와락!

여왕 쥐가 힘껏 끌어안았다.

“우리의 은인! 기다리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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