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3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산 채로 망자가 되는 시술을 받았던 육체가 크게 훼손됩니다.]
[당신의 몸속에 고여 있던 희생자들의 피가 역류하며 육체가 붕괴됩니다.]
종족을 언데드 계열로 바꾼 플레이어가 감수해야하는 페널티는 크게 세 가지다.
민첩성 대폭 저하, 일부 스킬 사용 봉인, 회복 마법 효과 반전.
하지만 흑마강시에게는 민첩성 저하와 스킬 사용 봉인 페널티가 없었다.
흑마강시의 전투력이 압도적인 이유다.
천마강시는 전설로 치부되는 실정이니만큼 흑마강시야말로 사실상 최강의 강시였다.
다만 만능은 아니다.
흑마강시에게는 무서운 부작용이 존재했다.
“으... 으아아아악!!”
사망 시 치러야하는 대가가 무척 크다는 점.
33일의 의식 동안 주입했던 장정 300명의 피 중 상당량을 잃기 때문이다.
흑마 강시가 사망 시 손실하는 경험치량은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2배에 육박했고 다시 부활하기까지 무려 이틀의 시간을 소요했다.
뭐, 사실상 죽을 일이 드물었지만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그리드....! 그리드으으으!!”
베라딘이 포효한다.
그리드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인간의 존엄마저 포기했건만 복수는커녕 역으로 당해 큰 손실을 입었으니 분해 미칠 지경이었다.
얼마나 분한지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에게,
“....”
그리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로인해 베라딘이 느끼는 모멸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저놈에게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허무가 밀려온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베라딘은 로그아웃 버튼을 클릭했다.
마지막 로그아웃이었다.
베라딘은 Satisfy에 두 번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봐.”
베라딘과 혈강시 무리를 돌파한 그리드는 도사와 조우하고 있었다.
도사의 이름은 사백.
검은 갓과 두루마기를 걸치고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녀석의 모습은 영락없는 저승사자였다.
“네가 저 쓰레기를 강시로 만든 도사야?”
“맞습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표식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지요.”
“....?”
내가 갖고 있는 표식?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이내 한 가지 아이템을 떠올렸다.
그가 지닌 표식은 하나밖에 없었다.
<진화의 표식>
등급:유니크
환국의 연금술시설에서 개발한 표식입니다.
신체에 이 표식을 부착할 경우 근력, 민첩, 체력, 지력 중 한 가지 능력치가 200 오릅니다.
사용 조건:레벨 200 이상.
무게:0
진화의 표식은 그리드가 연금술시설에 집착하게 된 계기 중 하나다.
검은 태양의 모양을 본떠 만든 이 표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리드는 이미 진즉에 레이단의 연금술시설에 대한 투자를 멈췄을 수도 있다.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그리드가 강한 불신을 품었다.
단지 베라딘과 한패라고만 여겼던 도사가 생뚱맞게 진화의 표식을 논하자 당혹스러웠다.
“이건 환국의 연금술시설에서 제작한 표식으로 알고 있다만?”
환국은 오존과 양반들의 나라다.
인간의 방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초왕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의심하는 그리드에게 사백이 반문했다.
“양반들이 연금술을 공부하고 연마할 위인들로 보입니까?”
“....!”
그리드가 아차 싶었다.
가람이 파그마의 검무와 야장일을 잡기 취급했던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맞아. 양반들은 연금술도 하찮게 여길 게 분명해.’
한데 수준 높은 연금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인간의 힘을 빌렸다는 뜻이 된다.
눈앞 도사의 주장이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드가 사백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러고 보니 청호가 말했었지. 사악한 도사들은 환국의 하수인이라고.”
강시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만 제조할 수 있는 언데드다.
강시를 부리는 도사가 즉 세간에서 말하는 사악한 도사라는 뜻.
그리고 10년 전, 어느 사악한 도사가 영물을 미혹하는 신령한 쑥과 마늘을 북두산 일대에 뿌려 영물들을 등선시키고자 시도했다고 청호는 말한 바 있다.
“등선한 존재는 신들의 사회에 종속돼 오존의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들었다. 너희가 북두산 일대에 쑥과 마늘을 뿌렸던 이유는 결국 모든 영물을 오존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키기 위함이었을 테지?”
“흐음....”
“너희가 평소에 민간을 어지럽히는 이유 또한 모두 양반들을 위해서일 테고. 너희가 만든 혼란을 양반들이 잠재울 때마다 신앙이 쌓일 테니까.”
확신한 그리드가 사백을 몰아붙였다.
그리드는 사백을 환국에서 보낸 자객쯤으로 인식했다.
그러자 잠자코 듣던 사백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추리가 굉장히 단순하군요. 잘못 된 섭리를 눈치 채고 옛 신을 부활시켰다기에 기대했건만 실망인데요.”
“....?”
“등선한 이들이 신들의 사회에 종속돼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게 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이 즉 오존을 뜻하는 개념은 아니죠. 당신께서 이번에 부활시킨 주작 또한 신입니다.”
“....!”
“주작이 부활함으로써 등선한 이들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졌습니다. 무릉도원의 신선들은 지금쯤 주작의 편에 설지 오존의 편에 설지 고민 중이겠지요. 그리고 영물 출신의 신선들은 대부분 주작의 편에 설 것입니다. 영물과 신수가 사신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너는 언젠가 부활할 사신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영물들을 등선시키려고 했단 것이냐?”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드를 대신해서 브라함이 나섰다.
어느새 다가와 그리드의 곁에 선 그는 사백을 매우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동방에도 초월자가 있었군.”
“초월자...?”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백이 초월자라면 문제가 심각했다.
그리드의 격은 사백의 격을 감지하지 못했으니까.
사백이 그리드보다 한 수 위라는 뜻이 됐다.
사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대화가 통할만한 상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눈치였다.
“사백이라고 합니다. 세간에서는 사악한 도사들의 우두머리라고 불리고 있지요.”
“브라함이다. 여기 있는 그리드를 섬기는 마법사지.”
“....템빨왕 그리드다.”
어쩔 수 없이 소개하는 그리드의 표정에 불만이 역력했다.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강시들을 만드는 이유가 뭐지?”
“인간의 힘만으로는 환국에 대항할 수 없으니 불사의 군단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한 준비인 셈이죠.”
“세계의 평화를 논하는 것치고는 강시들이 민간에 일으키는 피해가 심각하던데?”
“어쩔 수 없지요. 저를 따르는 도사들은 실제로 대부분 사악하니까요. 그들은 강시를 만들어서 사람을 해치기를 즐기는데 제가 이를 통제할 순 없습니다.”
“....?”
“환국에 반역을 일으킬 거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순 없지 않습니까. 저를 따르는 도사 중에서 저의 실체와 목적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장단에 어울려 줘야죠.”
“....”
“필요악이라는 겁니다. 강시를 모으기 위해서는 사악한 도사들의 협력이 필요하고, 사악한 도사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저 또한 사악한 도사로 위장해야하고.... 뭐, 분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훗날 세계가 평화를 되찾게 되면 사악한 도사들에게 죗값을 물테니까.”
이 짧은 대화만으로 그리드는 눈치 채고 말았다.
사백은 파그마와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었다.
“신수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셨지요? 저도 동행시켜주십시오. 그들을 설득해서 모든 영물들을 등선시켜야겠습니다.”
정중하게 요청하는 사백.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어긋난 세계를 눈치 채고, 누구보다 오랫동안 세계를 위해서 분투해왔을 그에게 그리드는 대답했다.
“싫어.”
“....?”
사백의 얼굴이 굳었다.
웃고 있던 그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그리드는 다소 위축됐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의 정의는 어긋나있다. 당신의 방법은 틀렸어. 당신과 협조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고.”
“하하....?”
사백이 실소를 터뜨렸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정의가 어긋나 있다고요? 제가 틀렸다고요?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두근!
그리드의 심장이 뛰었다.
초월자의 격이 그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는 그리드를 대신해서 앞으로 나선 브라함이 사백을 마주보고 물었다.
“불쾌하면 뭐 어쩔 거냐?”
“.....”
사백이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처럼 살기를 거둔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죠.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생각해보세요. 저와 협력하는 편이 당신들에게도 좋을 겁니다.”
스파앗.
사백의 몸이 사라졌다.
마치 땅으로 꺼지는 듯한 모양새였다.
잠시 가만히 서서 사백의 기척을 추적해보던 브라함이 뭐라고 혼잣말하더니 그리드를 돌아보았다.
“표정 풀어라. 본래 초월자치고 정상적인 놈은 드무니까.”
“...네.”
하긴, 2대 교황 크레이슐러도 초월자였다.
사백은 크레이슐러와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편일지도 모른다.
크레이슐러는 괴팍한 변태로 전락한 반면 사백은 다소 어긋났을지언정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사백의 방법이 잘못 됐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불행으로 쌓아올린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야.’
파그마가 이미 증명한 바 있다.
최후의 순간에 후회하던 파그마의 모습을 떠올린 그리드가 브라함을 재촉했다.
“서두르죠.”
“그래.”
그리드는 순보를, 브라함은 텔레포트를 전개했다.
몇 번이고 공간을 도약한 그들은 곧 이빨 빠진 호랑이 군락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작년 국대전에서 마장기의 위대한 힘을 증명했던 지발은 올해 PvP의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였다.
수많은 시청자들이 지발의 PvP 참가를 기대했다.
하지만 의외로 지발은 PvP에 불참했다.
다름 아닌 크라우젤이 PvP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으니까.
‘괜히 크라우젤과 같은 종목에 나갔다가 금메달을 손해 볼 순 없지.’
지발은 고수 중의 고수다.
그는 검성 크라우젤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이미 수차례 목격했다.
언젠간 필시 그리드마저 따라잡을 잠재력....
마장기에 탑승할지언정 크라우젤을 이길 수 없다는 게 지발의 판단이었고 올해의 그는 정말로 진지했다.
‘올해 국대전만큼은 자존심을 버리고 미국을 반드시 우승시킨다.’
올해 국대전에는 그리드가 없다.
만에 하나라도 미국이 우승하지 못하면 국민들을 마주볼 면목이 사라진다.
기필코 우승해야만 했다.
하여.
『미국의 지발 선수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올해 지발은 표적 맞추기 종목에 참가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국인 캐나다와 중국의 하이랭커들, 그리고 한국의 유라가 출전하는 경기....
지발은 변수를 없앨 계획이었다.
‘여기서 내가 금메달을 따면 다른 강국들의 성적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어.’
지발이 힐끔 유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올해 한국으로 귀화한 지슈카와 함께 출전하지 않고 1,000등 미만의 랭커와 듀오를 맺고 있었다.
“한국은 무슨 생각이지?”
“?”
“표적 맞추기는 너와 지슈카의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종목이잖아? 너희 둘을 동시에 내보내면 금메달을 딸 가능성이 높은데 어째서 너 한 명만 내보낸 거지?”
만약 유라와 지슈카가 함께 출전했다면 제아무리 지발이라도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 없는 한국은 긴장했는지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인재를 아낀답시고 어설프게 선택해서 그나마 있던 가능성을 잃어버렸으니 안쓰러울 지경이다.
“뭐.... 힘내서 은메달 정도는 노려보라고.”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레이더스에 탑승한 지발이 유라를 격려해주었다.
철컥! 철컥철컥!!
레이더스의 상체 8곳과 하체 6곳에 설치 된 포문이 일제히 열리며 하늘을 떠다니는 표적들을 동시에 저격한다.
“발사.”
명령을 내리는 지발.
그는 표적 맞추기 사상 최고의 기록을 달성하며 우승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수십 발의 미사일이 표적에 닿기도 전에 폭발하는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진 말이다.
“뭐....?”
사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잠시 멍해졌던 지발이 레이더스의 시선을 통해서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퍼펑-!
퍼퍼퍼퍼퍼퍼펑!!
수백 명의 선수들이 쏘아 올렸던 모든 투사체가 레이더스의 미사일처럼 허공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수백 종류의 투사체가 모조리 표적에 닿기도 전에 재가 되어 흩어지는 중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검게 물든 세계.
지옥 달 아래에 떠오른 블랙홀에서부터 난사되는 녹빛의 탄환 수천 발이 일대의 모든 표적과 투사체를 소멸시키는 탄막을 펼친다.
‘유라!’
지발의 시선이 유라의 위치를 쫓았다.
그녀는 여전히 스타트 지점에 서있었다.
제자리에 선 채, 정면에 소환해놓은 블랙홀에 총구를 넣고 계속해서 총을 난사 중이었다.
작년에 이미 크라우젤을 감탄시킨 바 있는 <지옥 도약> 스킬을 극한까지 활용하는 것이다.
『한국 대표 유라가 모든 표적을 파괴하였습니다!』
『목표 달성 기록 23초....! 역대 최고 기록입니다!!』
“.....”
지발이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는 그리드와 크라우젤에게만 겸손할 게 아니라 유라에게도 겸손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