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6권 - 2화
까드득!
Satisfy의 모든 플레이어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건강한 치아를 지녔다는 점이다.
완벽하게 구현한 미각 시스템을 모든 플레이어가 즐겨주길 바란다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임철호 회장의 배려였다.
하지만 주작의 숨결 앞에선 건치고 나발이고 소용없었다.
“아, 아야야.”
주작의 숨결을 씹었다가 이빨이 모조리 부러지는 듯한 격통을 느낀 그리드가 뺨을 감싸 쥐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빌어먹을, 이걸 대체 무슨 수로 먹지?’
주작의 숨결을 오직 그리드만 제련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단단하기 때문이다.
그리드를 제외한 대장장이들은 백날 불을 지피고 망치로 후려쳐봐야 주작의 숨결을 제련할 수 없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는-
그처럼 단단한 주작의 숨결을 씹어 먹는다?
강철로 만든 틀니를 껴도 불가능할 일이다.
‘틀딱 소리밖에 못 들을 거야.’
어르신들께 틀딱이라니....
버르장머리 없는 요즘 세대의 행태를 떠올리며 쯧쯧, 혀를 차던 그리드가 상념을 접고 다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작게 조각내서 알약처럼 꿀꺽 삼키는 방법은 어떨까? 아니, 부질없겠군.’
조각낸다는 것은 즉 부순다는 뜻.
제련과는 엄연히 다르다.
부서진 재료는 효력을 상실하고 쓸모없는 돌멩이로 전락할 텐데 이를 먹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흐음....”
주먹 크기의 숨결을 손에 쥔 채 고심하는 그리드.
그는 현재 북쪽 군란으로 이동 중이다.
청호와 토순이 등의 신수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없을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리드와 나란히 걷고 있던 브라함이 핀잔을 주었다.
“한심하군. 설령 그걸 섭취한다고 해서 네가 품은 주작의 숨결이 강화될 거란 보장도 없는데 왜 자꾸 미련한 짓을 반복하는 거냐?”
“현재 상황에선 먹는 것 외의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서요...”
“광물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니냐?”
“....!?”
“무식한 놈.”
“....”
지슈카, 너보고 무식하대.
지슈카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었던 그리드는 발안자가 지슈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묵묵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스킬 레벨을 올리겠답시고 광물을 먹어야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어. 그딴 똥겜을 누가 해? 일단은 시간을 두고 경과를 지켜보도록 하자.’
앞으로 일이 잘 풀릴 경우 청룡, 백호, 현무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숨결의 성장 방법에 대해서 질문할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당장 조급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흠.... 브라함.”
미련을 버리고 조용히 걷던 그리드가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저는 전대 전설들과 비교해서 어떤가요?”
고작 열흘.
그리드는 단기간 내에 정말 큰 발전을 이뤘다.
다른 랭커들처럼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장비 러쉬를 시도한 것도 아니고 단지 퀘스트와 스토리 진행을 통해서만 말이다.
그리드는 현재 자신의 수준이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넘볼 수 없는 벽’으로 느꼈던 전대 전설들과 자신을 비교해보고 싶어질 정도로.
“브라함?”
브라함의 대답이 없자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그리드는 브라함이 콧방귀부터 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브라함은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해본 뒤 대답해주었다.
“전설마다 분야가 달랐으니 모든 전대 전설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군. 그러니 파그마만 놓고 비교해보자면 네가 크게 부족하진 않다.”
“....!?”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카라스 공방전에서 양반들을 쓰러뜨리고 레벨이 오른 그의 현재 레벨은 407.
플레이어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으나 전대 전설과 비교하면 최소 200이상 낮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브라함은 그리드의 수준을 파그마와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제 발치 정도는 따라가는 중이다, 정도의 답변을 기대하고 있던 그리드 입장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그리드의 어안이 벙벙해지자 브라함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설과 초월자가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잊은 건 아니겠지?”
“....!”
“한데 너는 전설임에도 초월의 격을 쌓았고 심지어 신앙의 대상까지 되었다. 육체능력과 기술적인 측면은 아직 성장 단계에 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그마의 전성기와 비교해서 못하다고 볼 순 없지. 대장장이로써의 실력도, 검사로써의 실력도.”
“....어디까지나 잠재력을 개방했을 때의 이야기겠죠?”
아직 <신격> 스킬이 강화되기 전.
그리드는 스킬 창조권으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삭제하거나 감소시켜주는 스킬을 창조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었다.
무작정 ‘현재 보유 중인 스킬보다 훨씬 더 강한 스킬’을 창조하겠답시고 시도했다간 <실패작>의 경우처럼 부작용이 발생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신격이 강화되면서 상황은 바뀌었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 판단력이 흐려진 그리드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5융합 검무의 창조를 시도했다.
물론 결과는 전혀 달라졌지만 말이다.
잠재력 개방.
시스템의 조언으로 창조할 수 있었던 이 스킬의 위력은 가히 폭발적이다.
<잠재력 개방>
현재 보유 중인 스킬보다 한 등급 위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미 궁극에 도달한 스킬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12시간
자원 소모:마나 10,000. 생명력 20,000. 현재 스태미나 절반.
*스킬 사용 후 극한의 페널티 발생.
아직 비활성화 된 스킬 트리를 강제적으로 활성화시켜주는 스킬.
노말, 레어 스킬 트리만 보유한 평범한 플레이어에게는 ‘준 전설급’이라는 평가도 아쉬운 수준의 스킬이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명백한 전설급 스킬이었다.
잠재력 개방으로 인해서 그리드는 4융합 검무의 상위 단계인 5융합 검무를, 이십만대적검의 상위 단계인 삼십만대적검을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까.
다만 단점이 있다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페널티.
5융합 검무를 사용한 직후에 발생했던 격통은 이미 고통에 익숙한 그리드라도 제정신으론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만약 유라가 보듬어주지 않았다면 울부짖었을 수도 있다.
그리드가 예상하기로 삼십만대적검을 사용하는 순간 허리가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대로 전투불능에 빠질 거라는 뜻.
하지만 페널티와 위력은 비례하는 법이다.
잠재력 개방은 이제 그리드의 진정한 궁극기가 되었다.
이번 전투 때처럼 ‘진원진기’까지 소모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필살기가 될 테고.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파그마의 전인 아니랄까봐 파그마를 어지간히도 고평가하는구나.”
기분이 심히 나빠 보인다.
질투하는 듯하다.
“내가 비교 대상으로 삼은 파그마는 온전한 파그마일 때의 이야기다. 바알과 계약한 후의 파그마를 말함이 아니야.”
“....”
“단지 검호이자 대장장이였던 시절의 파그마는 이 몸과 비교해서 허접쓰레기였다. 지금의 온전한 네 실력만으로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수준이지.”
바알과 계약하기 전의 파그마는 그 정도로 약했나?
그리드가 짐짓 당황했다.
뮐러를 제외하면 최고의 검사였다는 파그마가 사실은 이토록 박한 평가를 받아야할 정도로 약했다니 의외였다.
“아니, 어디까지나 나와 비교해서 허접쓰레기였다고.”
“....?”
“파그마는 당연히 인간 중에선 최강의 반열에 있었다. 녀석과 비슷한 수준까지 성장한 네가 충분히 강하다는 뜻이다. 괜히 몸을 혹사시켜가면서까지 잠재력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아....”
파그마가 약했던 게 아니다.
내가 강해졌을 뿐이다.
명확히 인지한 그리드가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주먹을 쥐지 않으면 손끝이 자꾸 떨려서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시간. 네게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앞으로 너는 분명히....”
브라함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리드가 이변을 감지했다.
이미 오래 전 공략했던 큰 독 쥐 군락.
그곳에 진입하기 직전에 자리 잡은 작은 협곡에 들어서자마자 불쾌한 기척이 느껴진 까닭이다.
“악취가 진동을 하는군.”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브라함을 그리드가 제지했다.
“제가 정리할게요.”
“내가 나서는 편이 빠를 것 같다만?”
“경험치 올려야 해서....”
“....멋대로 해라.”
브라함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리드가 <전광>을 전개했다.
파지직!
비행 상태에 돌입하자 번개의 화신 패시브 효과가 활성화된다.
스태미나 하락을 억제하고 모든 스킬의 자원 소모량을 20퍼센트 감소시킨 그리드가 마음껏 날뛰기 시작했다.
“파(派).”
콰르르르르릉!!
오른쪽 협곡의 중턱.
기울어지듯이 자라있는 소나무 뒤에 숨어있던 무리가 다짜고짜 나타나 검기를 쏘는 그리드의 폭격을 감당 못하고 후두둑, 지면에 떨어져 처박혔다.
무려 15미터 높이에서의 추락.
아무리 단련했어도 다리 한쪽 정도는 부러져야 정상이건만 떨어진 이들은 멀쩡했다.
벌떡 일어나더니 토끼처럼 껑충 뛰어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혈강시?’
숨어있는 놈들이 강시라는 사실은 진즉부터 냄새로 알았다.
하지만 보기 드문 혈강시일 줄이야?
쩌엉-!
열망의 무아검이 가장 선두에서 쫓아오는 혈강시의 목을 정확히 가격했다.
하지만 혈강시의 목은 강철처럼 단단해서 쉽게 베어지지 않았다.
충돌하며 발생한 반동에 편승하여 하강, 두 번째 강시의 공격을 머리 위로 흘린 뒤 발을 올려 차 날린 그리드가 마력 탐지를 전개했다.
혈강시쯤 되는 놈들이 주인이 없을 리 만무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역시나.
‘저기군.’
왼쪽 협곡 정상에서 한 개의 인기척이 포착됐다.
약 10마리의 강시에게 비호를 받고 있긴 했지만 10마리 전부가 혈강시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혈강시의 제조법은 철강시, 독강시와 달리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힘들다고 들었으니까.
설령 전부 혈강시라 할지언정 그리드에게는 충분히 돌파할 능력도 있었다.
‘술사부터 처리해야 돼.’
쿠와앙!!
껑충 뛰어오는 또 다른 혈강시의 안면을 박차고 추진력을 얻은 그리드가 인기척이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그리드의 시야에 들어오는 풍광이 달리는 기차의 창밖처럼 빠르게 변하였고 그리드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순간.
화르륵!
그리드는 보았다.
흑철처럼 검고 단단한 피부를 지녀 유독 눈에 띄는 백발 강시의 양손에 맺혀있는 화염을.
‘흑마강시!’
다급히 방어 자세를 취하는 그리드의 시야에 백발 강시의 이름이 걸린다.
베라딘.
“....!?”
“하하하하! 그리드으! 네놈에게 복수할 이날만을 꿈꿔왔다!!”
본래 베라딘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플레이어다.
1세대 루키 중 라우엘과 함께 최고의 재능으로 꼽혔고, 직접 길드를 꾸려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으며, 이후 아그너스라는 바지 군주를 앞세워 임모탈의 실세를 지냈던 그는 플레이어 최초로 양반이 될 수 있는 기회까지 잡았었다.
하지만 그리드를 적대하게 된 후로 모든 것을 잃었다.
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가는 혹독했다.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연속되는 죽음을 겪은 베라딘은 양반이 될 자격을 상실했다. Satisfy 전역에 퍼진 척살령으로 인해서 설 자리 자체를 잃어 동대륙으로 피신 와 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죽음을 겪으며 레벨과 아이템을 손실하고 약화된 그에게 동대륙의 난이도는 녹록치 않았다.
사악한 도사가 내민 손을 기연으로 받아들여야했을 정도로 베라딘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네크로맨서 시절에는 실용성이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던 기초 마법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혈강시보다 10배 이상 강하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있는 <흑마강시>로 종족을 탈바꿈한 효과다.
그렇다.
오래간만에 다시 나타난 베라딘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겪은 것 이상의 고통을 맛 봐라, 그리드!”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외치는 베라딘의 안광이 붉게 빛난다.
그가 연사하는 마법과 실시간으로 소환하는 혈강시들이 쉬지 않고 그리드를 덮쳤다.
베라딘은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물론 그 또한 그리드의 서사시를 알고 있었지만, 인간이길 포기하고 괴물이 된 자신이 치른 희생이야말로 그리드의 서사시를 넘어서는 가치를 지녔다고 믿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야말로 Satisfy의 철칙이었으니까.
그는 모르는 것이다.
그리드가 인내해온 희생과 고통을.
그리드의 서사시가 지닌 무게를, 타인인 그는 제대로 측량하지 못했다.
화르르르륵!
그리드를 중심으로 화신의 폭풍이 피어올랐다.
부정한 것을 불태우는 거룩한 불꽃이 그리드를 덮치는 수십 마리의 혈강시와 그들을 통솔하는 베라딘에게 지독한 고통을 안겼다.
“네가 여태껏 느껴온 고통과 앞으로 느낄 고통 전부를 합쳐도 내가 느꼈던 고통과 비교하면 부족해.”
푸우우우욱-!
살과 피를 녹이는 불길에서 도망치고자 발악하는 베라딘의 등을 열망의 무아검이 관통한다.
인간시절보다 몇 배나 강해진 베라딘조차도 그리드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옛 신을 부활시켰다더니 과연....”
그리드가 마력 탐지를 사용해서 파악했던 인기척.
베라딘을 포함한 강시들 틈에 유일하게 ‘산 자’인 도사가 그리드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