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20화
“하하....! 크하하하하핫!!”
긴장한 채 상황을 지켜보던 가람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리드의 원군이랍시고 나타나 하랑의 앞길을 가로막은 놈들 전원 평범한 인간이었던 까닭이다.
“수십 만, 수백 만이 모여도 먼지처럼 하찮은 것이 인간일진데 고작 채 열 명도 안 되는 인간에게 의지하겠다고?”
가람이 그리드를 조롱한다.
“최근 네놈의 기세가 좀 오른다 싶더니 기본적인 개념조차 상실했구나. 인간에게 기대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인간들이 발버둥 쳐봐야 신의 앞길을 막을 순 없으니 하랑은 곧 이곳에 당도할 테고 네놈은 죽을 테지.”
뒤틀린 미소를 짓는 가람에게 대꾸하는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브라함이었다.
“인간이 없었으면 존재조차 못했을 놈이.”
“뭐?”
브라함이 웃는다.
생물의 가치 판단에 외모를 포함시키지 않는 양반의 시각으로 봤을 때도 매력적인 그 극상의 미소는 공교롭게도 조소였다.
“인간의 신앙에 기생하는 놈이 인간을 하찮게 취급하고 앉았으니 희극이 따로 없다.”
“...같잖은 도발을. 우리를 빚은 분도 한울이시고 우리에게 신의 자격을 주신 분 또한 한울이시다. 인간의 신앙은 우리를 보다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에 불과....”
가소롭다는 듯이 반박하던 가람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지껄여봤자 브라함의 주장을 부정할 수 없음을 눈치 챈 것이다.
브라함이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네놈의 논리대로 인간이 하찮다면 고작 인간 따위에게 숭배 받아 신격을 쌓은 네놈들 또한 하찮은 존재일 테지. 뭐, 딱 봐도 하찮긴 해.”
“놈! 인간을 욕했다고 발끈해서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자신이 인간에 대해서 논할 때마다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렸던 것임을 비로소 깨달은 가람이 얼굴을 붉히고 소리쳤다.
어리석은 반응이었다.
브라함의 표정이 더욱 더 짓궂어졌다.
“반박할 여지가 없으니 언성이나 높이는 꼴이 짖는 것밖에 못하는 병든 개와 다름이 없군.”
“....!”
“애초에 전능과는 거리가 먼, 다만 인간보다 조금 더 강할 뿐인 네놈들이 스스로를 신이라 착각하는 꼴이 우습다.”
브라함의 시선이 가람의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엿보이는 잘린 귀에 걸린다.
“신의 형상은 변치 않는 법.”
더 깊이 이해하고 기억하고 싶은 대상일수록 구체화시키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
추상적인 것은 결국 희미해지게 마련이니까.
인간은 신앙의 대상을 철저히 형상화함으로써 기억하고, 전파하고, 기도한다.
바로 그들에 의해서 신의 모습은 불변하는 것이다.
“네놈들이 진짜 신이었다면.”
중독을 피하겠답시고 스스로 팔과 발목을 자른 양반들을 이어서 쳐다본 브라함이 이죽거렸다.
“이곳의 인간들이 너희를 진정 신이라 여겼다면, 그 하찮은 상처들은 이미 진즉에 ‘없었던 것’이 되었을 테지.”
하지만 그리되지 않았다.
인간들은 양반이 단지 두려워서, 혹은 거짓 된 신화에 속아서 의무적으로 따랐을 뿐이지 진정어린 신앙으로 섬기진 않았단 뜻이다.
왜?
양반들은 어째서 작금의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을까.
속내야 어찌됐든, 거짓으로나마 인간들을 존중하고 자애를 베풀었다면 진정한 신앙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와 같은 의문을, 브라함은 품지 않았다.
‘이놈들도 처음엔 그랬겠지.’
너무 긴 세월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다보니 입장을 망각하고 실수를 반복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들이 먼저 이들을 실망시켰을 수도 있고.
“....”
가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브라함의 말에 분노하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한 시선으로 브라함을 주시한 채 전황을 분석했다.
저 은발 놈에게 감정을 개입시키는 순간 자신이 무너질 거라는 사실을 그는 직감한 것이다.
“그루, 나은.”
“어.”
“말해.”
중독을 피하고자 스스로 팔과 발목을 잘랐던 양반들.
평소에는 가람과 자주 다투던 그들이 드물게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역대 모든 치우의 시련에서 높은 성적을 거뒀던 가람을 순순히 대장으로 인정하고 따라야 작금의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내가 저 은발 놈을 맡는 동안 너희들은 뒤의 흑발 놈을 상대하면서 하랑의 합류를 기다려라.”
평소였다면 상대를 바꿨을 것이다.
저 위험한 은발 놈에게는 그루와 나은을 던져주고 자신은 그리드를 상대하다가 하랑에게 마무리를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신중해야했다.
힘든 역할을 자처해야했다.
하랑이 합류하기도 전에 그루와 나은이 당해버리기라도 했다간 자신 역시 덩달아 위험해질 테니까.
“음.... 그러지.”
“알았어.”
그루와 나은이 석연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들은 가람과 셋이 힘을 합쳐서 은발 놈을 상대하게 될 줄 알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다 죽어가고 있던 저 흑발 놈과 달리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리드. 저번 화제의 주인공이었던 주작궁 모작의 제작자가 그런 이름이었지.’
‘가람이 꽤 오래 전부터 노렸을 텐데 여태껏 살아있는 걸 보면 제법 끈질기긴 하겠군.’
그루와 나은이 막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그러니까 아직 은발 놈이 나타나기 전에도 가람은 넝마가 된 상태였다.
주작의 부활을 준비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환국을 속인 초왕이 어떤 비장의 한 수를 준비했을지언정, 주작의 저주가 가람의 발목을 붙잡았을지라도 그리드가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가람을 저 지경까지 몰아붙이긴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온전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촤르륵!
가람을 등지고 그리드를 마주본 그루와 나은이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던 연검을 동시에 풀어 펼쳤다.
그루는 오른쪽 팔을 통째로, 나은은 왼쪽 발목 아래를 잃고 있었지만 신체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고 검술의 기수식을 취했다.
“하랑이 도착하기 전에 죽는 편이.”
“네게는 도리어 좋을 거다, 주작궁 제작자.”
투쾅-!
상체를 깊숙이 숙인 그루가 지면을 박차며 돌진하자 나은이 그의 어깨를 낚아채서 등에 올라탔다.
촤르르륵!!
인간은 일평생을 단련해도 얻지 못할 쾌검.
그리드를 간격에 넣자마자 그루가 휘두른 연검이 호선을 그린다.
투콰콰콰콱!
지면 위의 돌멩이들이 태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솟구쳤다.
푸욱-!!
눈보라마냥 휘몰아치는 돌멩이들에 시야가 어지럽혀진 그리드의 가슴이 그루의 연검에 꿰뚫린다.
이미 가람에게 초주검이 된 그는 반신의 속도에 반응할 수조차 없는 눈치였다.
“합!”
그루가 검을 날리는 동작을 펼쳤을 때 발생한 반동을 이용해서 날아오른 나은이 그리드의 정수리에 칼을 꽂으며 떨어진다.
일단 이놈은 정리 됐다, 라고 생각하면서.
물론 그 생각은 그루의 비명소리와 함께 끝났다.
“크아아아악!!”
“....!?”
나은의 검이 그리드의 정수리에 꽂히기 직전 그루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은이 의문을 느꼈을 때 그리드는 이미 나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순보?’
지면에 착지하며 그루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나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그루의 검을 왼 손으로 꽉 거머쥔 채 그루의 허리를 베는 그리드가 무지막지한 야성을 내뿜고 있었기에.
“우오오오오오!!”
그루가 검을 회수하지 못하게끔 도리어 그루의 검을 자신의 가슴 깊숙이 찔러 넣으며 전진, 또 전진.
그루가 전광처럼 휘두르는 발차기를 무작정 맞아주며 접근해 짧게 쥔 검을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는 녀석은 벼랑 끝에 몰린 상처 입은 맹수조차도 질리게 만들 정도로 흉포했다.
“당장 떨어져!”
발목을 지혈하느라 운용하고 있던 백호의 숨결을 잠시 거둔 나은이 청룡의 숨결과 현무의 숨결을 동시 운용해 신속과 공격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그리드에게 날아가 등에 칼을 꽂았다.
카드득!
제대로 들어갔다.
용의 비늘처럼 엮여있는 그리드의 갑옷 틈새로 파고들어간 나은의 검이 그대로 그리드의 날개 뼈를 박살내며 내장까지 찢어발겼다.
즉사하진 않을지언정 충격이 워낙 커 경직돼야 정상일 일격이다.
한데.
“크아아아아아!!”
그리드는 멈추지 않았다.
더욱 크게 포효하며, 각자 무기를 거머쥔 흑금색 손들과 함께 그루를 무차별적으로 난도질했다.
급기야 견딜 수 없었던 그루가 검을 버리고 떨어지려 했지만 실패했다.
“연!”
“냐앙!”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한 미물, 그리고 고양이를 닮은 신수급 괴수가 목숨을 걸고 덤비니 퇴로가 쉽게 열리지 않는 것이다.
“나, 나은....!”
“....!”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나은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도움을 갈구하는 그루의 애타는 눈빛을 마주한 그는 작금의 상황이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어져라!!”
나은이 권능을 발휘했다.
뜻대로 바람을 움직여 수백 개의 폭탄으로 삼아 그리드에게 투척했다.
그 폭격은,
츠카카카칵!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날에 베여 모조리 흩어진다.
‘뭐?’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경악하는 나은의 귓전에 그루의 탄식이 스며든다.
묵색의 섬뜩한 칼날이 그의 심장을 뚫고 나와 있었다.
‘저, 저럴 수가?’
신이 될 자의 육신은 태산보다 단단하거늘 어찌 인간의 검이 꿰뚫는단 말인가?
그루가 단지 그리드의 기세에 밀려 주춤했던 게 아니라 사력을 다해 도망쳤던 것임을 깨달은 나은이 위축됐다.
동시에.
털썩!
열망의 무아검에 꼬챙이 꿰어진 그루의 육신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빛을 잃은 동공은 텅 비어서 어떠한 감정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죽었....다고?”
인간에게?
덜덜!
해독되지 않는 독을 몰아내고자 스스로의 신체를 잘라버렸을 정도로 대담했던 나은의 두 손이 미칠 듯이 떨렸다.
공포.
오존께서 옛 수호신들을 봉인하시는 광경을 지켜볼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정이 그를 엄습했다.
푸른 안광을 번뜩인 채 피에 흠뻑 젖어 거친 숨을 토하는 그리드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난 그가 우선 가람의 상황을 살폈다.
노을빛 하늘에 오른 가람은 은발 놈과 격전 중이었다. 그루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전투에 집중하는 것을 보아 역시 은발 놈은 만만치가 않았다.
나은의 시선이 이번에는 저 멀리 성벽 너머로 향했다.
가람과 마찬가지로 치우의 시련에서 상위 성적을 기록했던 하랑이 아직까지도 성문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10명도 안 되는 인간이 각기 다른 능력으로 합격을 가하고 있었는데 공격과 방어 어느 측면에서도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주작궁 모작에 있었다.
그새 주작의 축복이라도 받은 걸까.
활활 타오르는 활대가 한 번 휘어질 때마다 거룩한 불꽃의 화살이 나타나 맹위를 떨친다.
퍼엉!
콰콰쾅!!
화살 한 발, 한 발의 위력이 운석을 연상케 했으니 터무니가 없을 지경이다.
오존에게 저항하며 불의 비를 뿌렸던 주작의 위용이 주작궁 모작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
‘뭐 이딴....’
이대로는 희망이 없다.
그래, 희망.
무능한 인간들이 현실을 견디고자 노력할 때마다 일삼던 그 저급한 단어를 자신이 떠올리는 날이 올 줄이야.
수치심을 느낀 나은이 얼굴을 붉혔다.
‘가람 저 개자식...! 폭탄을 우리에게 떠넘기다니!’
확실하다.
그리드는 은발 놈보다 강하다.
저놈은 인간으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는 초월자다.
확신하면서, 나은은 청룡의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이대로 도망쳐 자신이라도 살아남을 심산이었다.
‘어서 환국으로 가서 이곳의 상황을 전달해야....’
이내 나은이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스킬....”
그루를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불사를 비롯한 모든 스킬과 자원을 소모했던 그리드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중얼거렸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오른다.
[불사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칭호 <두 시대의 주역> 효과로 생명력과 마나를 각각 20퍼센트 즉시 회복합니다.]
“....창조.”
상황이 안 좋다.
주작의 9번째 심장이 스태미나 회복을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태미나가 고갈되기 직전이다.
뒤를 생각할 겨를 없이 가진 것을 전부 그루에게 퍼부은 탓에 모든 스킬이 비활성화 상태이기도 하다.
새로운 스킬이 필요하다.
비록 이 스킬이 내 최후의 일격이 되겠지만.
[<스킬 창조권>을 사용합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신중을 요하는 선택지가 떠올랐고, 그리드의 의식이 ‘예’라고 대답하는 바로 그때였다.
“지옥 소환.”
콰르륵!
그리드가 있는 공간이 세계로부터 단절됐다.
나은이 가로지르고 있던 노을빛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붉은 만월에 박힌 수천, 수만 개의 눈이 끔뻑이며 그리드와 나은을 환영했다.
“규탄의 검.”
츠칵-!
츠카카카카카카칵!!
지옥.
신성을 모독하는 저주받은 공간에서 약화 된 나은의 몸이 녹빛의 검광에 난도질당한다.
검은 풍경 속에서 홀로 빛나는 은빛의 갑주 위에 번지는 선혈은 아름다워서, 눈밭 위로 흩날리는 붉은 장미의 잎을 연상시켰다.
“오랜만이에요.”
함께하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이었나.
사뿐히 내려와 손을 내미는 유라의 화사한 미소가 그리드의 메마른 마음의 단비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