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19화
시조 베리아체의 자식이나 인세에서 전설이 된.
역대 최강의 대마법사 브라함 에슈발트는 다양한 종류의 삶을 체험해왔다.
지식의 포식에 집착하는 본능 외에도 경험을 통한 공부가 있었기에 그는 지공(智公)이 될 수 있었다.
그래, 여태껏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브라함의 지식에 찬사를 보내왔다. 그의 지식수준이 세계 최고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그토록 대단한 지공 브라함을 지혜롭다고 평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오만하고 격정적인 브라함은 그 많은 지식과 경험이 무색하게도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저 웬수가 또!’
새롭게 출현한 양반들에게 빛의 창을 꽂으며 등장한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기쁨 아닌 근심을 심어주었다.
그리드는 기억한다.
이번만큼은 너의 뜻에 따라주겠다던 브라함의 약속을.
개처럼 집이나 지키겠다....
브라함은 정확히 그렇게 말했었다.
환국의 전력과 동대륙의 상태를 충분히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드의 동대륙행에 따라나서는 건 위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이 그리드의 아픔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브라함은 서대륙에 남겠노라 약속했었다.
‘근데 왜 이제 와서!!’
이를 악 문 그리드가 브라함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 브라함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기습에 쓰러졌던 양반들이 마침 일어나 브라함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안....!”
걸레짝이 된 채 격통에 떨던 그리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상태야 어찌됐든 브라함을 돕고자 순보의 전개를 시도했다.
그리고 실패하는 그때였다.
“꿀럭!”
브라함의 주변으로 독무가 번지더니 중독 된 양반들이 기세를 잃고 피거품을 물었다.
“....돼?”
석상처럼 굳는 그리드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엉켰다.
브라함이 전대 전설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강자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성기 시절의 이야기다.
현재 브라함은 크게 약화 된 상태인 반면 양반들은 반신의 영역에 오른 존재들.
반신이 ‘중독’을 허용했다는 사실이 섣불리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아직 치우의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 양반들인 건가?’
아니, 그렇지 않다.
가람과 비교했을 때 저들의 실력이 어떨지는 몰라도 ‘격’만큼은 동등하다는 사실을 높은 통찰력 스탯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독됐다는 것은....
‘설마?’
소름 돋는 가설을 세운 그리드가 브라함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이름:브라함 에슈발트
종족:영생을 잃은 진혈족 뱀파이어
직업:전설의 대마법사
....
칭호:지공(智公)
....
칭호:전설이 된 자
....
칭호:마나의 주인
....
칭호:부활자
....
칭호:신화 찬탈자
*여러 신화의 일부였던 히드라를 토벌하고 히드라가 등장했던 모든 신화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신화 속 히드라에게 ‘훗날 브라함에게 토벌당하는’이라는 수식언이 덧씌워졌습니다.)
*클래스 등급을 <신화>로 격상시킬 수 있는 자격입니다.
*특수 스탯 <신위>가 개방됩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괴수와 전투 시 공격력과 마법공격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와 조우 시 보통의 확률로 위압합니다.
칭호:히드라의 독낭을 품은
*필멸자에게는 죽음을, 불멸자에게는 영원한 고통을 안기는 히드라의 맹독 성분을 일부 분석해 자신의 마나에 녹여내었습니다. 히드라가 직접 쏘는 맹독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천하에 둘도 없는 맹독을 다루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독 계열 마법의 위력이 대폭 증가하고 대상의 독 저항력을 매우 높은 확률로 무시합니다.
레벨:500(▼)
근력:178 체력:2,190
민첩:607 지력:9,210
위엄:3,511 통찰력:5,943
의지:7,800
*수백 년 만에 되찾은 육신이지만 브라함은 빠르게 적응해나갈 것입니다. 600레벨 달성까지 경험치 획득량 2,000퍼센트 상승.
....
*이 인물은 플레이어 <그리드>와 그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존재를 하찮게 여깁니다. <그리드> 외의 플레이어는 호감도를 쌓을 수 없습니다.
“....!!”
며칠 못 본 사이에 레벨이 100이나 올랐다고?
‘가우스 왕국군을 혼자서 몰살시키기라도 했던 거야? 어?’
브라함의 믿기지 않는 성장에 버그를 의심하던 그리드가 뒤늦게 칭호 목록을 확인하고 기겁했다.
‘히드라? 무저갱에 있다던?’
<신화 찬탈자>는 그리드가 보유 중인 <신화를 엿보는 자>보다 상위 등급에 있는 칭호였고, 그 사실을 눈치 챈 그리드의 심장은 크게 뛰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깊은 감격이 밀려와 그를 휘감았다.
‘혼자가.... 혼자가 아니게 됐어.’
차라리 자신이 신이 되겠노라 선언했던 이후.
내색하진 못했지만 그리드는 홀로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불안했었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혼자 남는 악몽을 꿨을 정도다.
하지만 이 순간 모든 불안이 씻겨나갔다.
브라함이라는 영원의 동반자가 생겼으니까.
내가 너의 곁에 남겠노라.
신화의 자격을 찬탈하고 나타난 브라함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터엉-!
그리드가 감격에 떠는 동안 가람이 도약했다.
그리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브라함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린 그는 단창을 역수로 쥐어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것은 혜안의 효과로 오토 상태에 있던 그리드가 사용했던 검술을 응용한 동작이었기 때문이다.
“브라함! 위험....!”
그리드의 한 마디 경고가 채 완성되기도 전.
쩌저저저정!!
번쩍이는 뇌광과 함께 브라함의 정면에 나타난 가람이 단창을 내질렀다.
브라함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운 일격이었다.
그의 시각에서 봤을 땐 빈손처럼 보였던 가람이 다짜고짜 창을 찔러왔으니 대처가 다소 느려졌다.
무기를 감춰 상대방을 속이는 수법.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가람에게 낭패를 안겼던 혜안 모드 그리드의 검술이 브라함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쩌정-! 쩌저저정!!
창술의 기본이자 극의가 펼쳐졌다.
최단거리를 노리는 직선의 찌르기가 연속해서 이어지자 신체 능력이 낮은 브라함은 금방 수세에 몰렸다.
연거푸 마나 실드를 전개해 몸을 지키기에 급급할 뿐, 반전을 도모할만한 주문은 외우지 못한 채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상성이라는 것이다. 도사 따위야 입과 손만 봉하면 허수아비나 다름없지.”
한껏 콧대를 세운 가람이 가르침을 주듯이 떠들었다.
그러자 여태껏 황망한 표정을 지은 채 실드를 전개하던 브라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천하의 가람조차도 한 수 접게 만드는, 오만의 극치를 달리는 미소였다.
“파그마와 달리 순진하구나. 양반이라고 해서 다 교활한 건 아니었군. 아니, 그냥 멍청한 건가?”
“....?”
이놈도 파그마와 연관이 있는 놈이었나?
가람이 미간을 좁히는 순간이었다.
“그리스.”
“어스 브레이크.”
“아이스 월.”
“기가 라이데인.”
브라함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브라함은 필시 가람과 얽혀있었건만, 그건 사실 허상이고 수십 개의 본체가 따로 있다는 듯이 사방팔방으로부터 들려오는 육성이었다.
알림 마법의 활용이다.
“....!”
어떤 지면은 갑자기 미끄러워지고, 또 어떤 지면은 갑자기 뒤집어진다 싶더니 어느새 얼음의 장벽에 갇히게 된 가람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거대한 벼락을 목격했다.
본래라면 청룡의 숨결을 운용해서 흡수를 시도했을 주술.
하지만 얼음 장벽에 의해 흠뻑 젖은 대기가 가람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스팟!
순보를 전개한 가람이 얼음장벽을 빠져나와 하늘 위에 섰다.
그리고 전쟁의 무대로 전락해버린 궁궐의 전경을 시야에 한꺼번에 담았다.
브라함의 본체를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브라함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갗을 태우는 듯한 열기가 감지될 뿐이다.
“....!”
흠칫 놀란 가람이 다시 순보를 전개했지만 아주 조금 늦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가람을 덮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발동한 순보로 지상에 나타난 가람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앞선 그리드의 맹공에 찢겨나간 도포의 틈새로 드러나는 살갗이 죄다 검게 그을리거나 상처로 도배되어 있었으니 신이 될 자의 위엄을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제대로 농락당했음을 깨달은 가람이 브라함을 노려봤다.
“미물답게 속임수에 의존하는구나.”
“파그마였다면 내가 순순히 간격을 줬던 시점부터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함정을 피해갔겠지. 한데 네놈은 뻔히 당하는 꼴을 보아 파그마가 환국을 떠났던 이유를 알 것 같군. 그 녀석, 무식하고 열등한 동족들과 엮여 살아가려니 답답해서 서대륙으로 피신 왔던 거였어.”
“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가람의 눈이 뒤집혔지만,
“결국 네놈들 때문이다!”
브라함이 도리어 역정을 냈다.
“....?”
“파그마 그 저주받을 개자식을 서대륙에 풀어 놓다니! 한심한 놈들! 네놈들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
“....??”
생뚱맞은 매도에 황당함을 느낀 가람이 일단 자리를 옮겼다.
그는 브라함의 전투 방식을 이미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적의 경로를 예측하고 함정을 깔아놓는 방법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놈이다. 이놈의 수법에 말려 들어선 안 돼.’
함정에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
놈이 유도하는 방향만 피하면 해결 될 문제다.
‘예측하지 못할 순간에 순보로 파고들어 일격에 승부를 봐야겠군.’
두근. 두근.
가람은 자신의 심장소리가 낯설었다.
어색한 긴장감이 불쾌했다.
하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애썼다.
눈앞 은발 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필시 대단한 실력자였으니까.
이미 그리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거나, 주작의 저주에 발목을 붙잡혔다거나 하는 등의 핑계를 내세울 여지도 없었다.
온전한 상태였어도 결코 방심하지 못했을 상대다.
‘그래서, 언제까지 엄살을 피울 거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브라함의 주위를 맴돌며 때를 노리던 가람이 여전히 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는 형제들을 노려봤다.
그들 또한 반신.
주작의 저주를 받고 있을지언정 독 따위야 언제든지 몰아낼 수 있는 불멸자다.
한데 무슨 생각인지 독을 몰아내기는커녕 계속 고통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자 가람은 슬슬 짜증을 느꼈다.
저놈들이 내게 귀찮은 싸움을 떠넘기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가람이 급기야 형제들에게 살기를 표출하는 순간이었다.
츠칵!
한 명은 중독 된 오른쪽 팔을, 다른 한 명은 중독 된 발목을 스스로 베어 자른 양반들이 가람에게 소리쳤다.
“버텨라! 하랑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초국을 순회하는 중이였다! 이변을 눈치 챘을 터이니 곧 도착할 거다!”
“.....뭐?”
가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독을 몰아내지 못해 스스로의 팔과 발을 베어버린 형제들의 모습을 통해서 은발 놈의 실력이 예상보다 높은 경지에 있음을 알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후우.... 후우....”
브라함이 시간을 버는 동안 스태미나와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그가 심호흡하며 전장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브라함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그리드는 브라함의 성격을 알고 있다.
적과 대등하게 싸우기보다 일방적으로 짓밟기를 즐기는 그는 어지간해선 고위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모락트의 대리인이었던 탈로스를 해치울 때조차 기초마법만 사용했던 사람이 바로 브라함이다.
한데 지금은 달랐다.
최초에 등장할 때부터 대마법을 사용한다 싶더니 가람 한 명을 상대하는 동안 고위급 마법을 2개나 소모했다.
신화의 자격을 얻은 브라함에게도 양반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 됐다.
이 상황에 새로운 양반이 합류한다?
브라함은 필시 죽는다.
[주작의 부활까지 남은 시간은 39분입니다.]
‘브라함에게 도망칠 시간을 벌어줘야 돼.’
주작을 부활시키고 초국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브라함이 아닌 자신이다.
브라함이 희생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상기하는 그리드.
당장 그에게 중요한 일은 주작의 부활이 아닌 브라함의 생존이 되었다.
“노에!”
비장의 수단으로 아껴뒀던 노에를 소환해 양반들의 이목을 끈 그리드가 빛의 정령에게 섬화를 전개하라고 명령하는 그때.
“그리드.”
양반들을 사이에 둔 채 그리드와 시선을 마주한 브라함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너의 가장 큰 저력은 덕망일 터이다.”
“....?”
━━!
섣불리 이해할 수 없던 그리드가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카라스의 외성벽 너머로부터 어떤 고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드는 물론이고 양반들에게도 익숙한 울음소리였다.
“주작?”
모두의 시선이 외성벽 너머로 향한다.
그리고 초월적인 시력으로 목격했다.
활시위를 당겨 주작의 형상을 소환한 적발의 여성과 그녀를 보좌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그들은 막 카라스에 도착한 양반 하랑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너희 부모님! 앞으로 50년 더 장수!!”
쩌렁쩌렁!
웬 미친놈이 하랑에게 삿대질하며 망발을 지껄인다.
태초 이전 혼돈부터 존재해온 한울께서 앞으로 50년밖에 못 살 거라고?
한낱 인간 주제에 감히 절대신의 수명을 재단하다니!
놈의 한 마디 말 따위가 한울께 어떤 영향을 끼칠 리는 만무하지만, 결코 용서해선 안 될 신성모독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꽈득!
격노한 가람과 양반들이 이를 갈았다.
브라함에게 집중돼 있던 그들의 어그로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있는 미친놈 후로이에게 쏠려버렸다.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초장거리 광역 어그로였다.
“한 눈을 팔아?”
브라함이 가람 일행에게 마법을 날렸고,
“용서 못... 윽?”
본래라면 가람 일행에게 합류했어야할 하랑은 후로이에게 눈이 멀어 그를 쫓다가 지슈카의 화살을 얻어맞고 놀라 멈칫했다.
“아프잖아...? 뭐야? 인간 주제에 제법인데?”
“같잖은 허세부리지 마. 여기 있는 친구들 다 최소 나보다 강하니까. 너, 오늘 여기서 뒤져.”
“야, 야, 지슈카. 그래도 명색이 신이라는데 예의는 갖춰서 말하자. 뒤져가 뭐냐, 뒤져가.”
“여전히 입이 험하단 말이지. 그래서 결혼은커녕 연애나 할 수 있겠냐? 남자든 여자든 입이 험하면 이성에게 인기 없어.”
“너희들도 뒤지고 싶어?”
각자 수련을 떠났다가 오래간만에 재회한 십공신들이 지슈카를 중심으로 결집한다.
국가대항전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들이 적해를 건너온 이유는 단 하나.
그리드를 돕기 위함이다.
심상찮은 서사시의 내용을 목격한 그들은 그리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갓리드으!! 우리가 왔다!!”
극검의 외침을 신호로 전장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리드는 직감했다.
‘곧 끝이다.’
주작은 부활하고 초국은 지켜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