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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68화 (1,058/1,794)

템빨 55권 - 18화

“온 누리가 나의 뜻으로 탄생했음을 알지다. 모든 만물이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함이다.”

가람이 탄생과 동시에 듣게 된 말이다.

“내 너를 빚은 이유 또한 너로 하여금 나를 돕게 하기 위함이니, 만물이 그러하듯 너 또한 나를 위해 살아가도록 하여라.”

응당 그리하라는 한울의 말씀이 가람에게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가람은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날씨가 맑아도, 흐려도.

눈을 떠도, 감아도.

수만 번의 계절이 바뀌는 세월 동안 가람은 한울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를 섬겨야한다고 되뇌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틀린 것 같습니다.”

가람은 한울의 말씀에 반박하는 형제를 보았다.

“저 작은 새와 힘없는 사슴조차도 스스로의 생명이 소중함을 압니다. 더 큰 새와 힘 있는 맹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매일을 치열하게 노력합니다.”

파그마였다.

조잡한 물건을 만들어 형제들에게 선물이랍시고 나눠주곤 했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녀석.

발 뒤에 계신 한울을 향해서 빳빳이 고개를 치켜든 녀석이 감히 지껄였다.

“한울께서는 온 누리가 한울의 뜻대로 탄생하였고 모든 만물이 한울을 위해 존재 한다 말씀하시지만, 정녕 그랬다면 저 작은 아이들이 과연 스스로의 몸을 돌보았을지 의문입니다. 저는, 한울께서 잘못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누리의 모든 만물은 한울 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놈!”

“한울이시여. 한울께서 빚으신 이 아름다운 누리는 모두의 것입니다. 짐승과 인간, 그리고 우리들 양반에게 고하를 논하지 마시고 모두를 공평하게 아끼고 보듬어주심은 어떨까요? 그리하면 자연히 모든 만물이 한울 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한울 님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을까요?”

“파그마! 닥쳐라!!”

가람은 파그마에게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파그마와 영원한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왜 그토록 파그마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을까.

왜 그토록 파그마가 싫었을까.

이유를, 가람은 이 순간 그리드를 대면한 상태로 깨달았다.

‘....놈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다.

의지를 지닌 존재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살아가기보다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해서,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워 감히 외칠 수 없었다.

잘못 된 것을 바로 세우겠답시고 떠난 파그마와 잘못 된 것을 바로 세우겠답시고 돌아온 눈앞의 그리드와 달리, 나는 자신의 의지를 외면한 채 신이 되는 일에만 집착해왔다.

신.

거룩한 존재가 돼야만 비로소 두려움을 떨쳐내고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한데 네놈들은....! 네놈들은 뭐가 그토록 잘났다고!!’

아직 신조차 되지 못한 주제에 어찌 섭리에 저항하는가!

우리가 발악한들 누리는 바뀌지 않을 진데!

콰르르륵!

화신의 폭풍을 좌우로 가르며 전진한 가람.

현무의 맹독과 살의가 깃든 검으로 그리드를 베고, 찔러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은 그가 여태껏 몰랐던 영역에 진입했다.

탄생 이후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재능과 경험, 그리고 배움을 불시에 떠올리며 하나의 동작에 녹여냈다.

그것은 신살(神殺)의 편린.

자신의 소멸을 원하며 양반들을 가르쳐온 치우가 간절히 논했던 궁극의 일격이었다.

“....!”

그리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0.1초 단위로 분리된 세상 속에서, 그는 도무지 피할 도리가 없는 가람의 검으로부터 짙은 위협을 느꼈다.

상처 입은 발할라가 높여준 방어력도, 아직 남아있는 불굴의 효과와 불사의 저력도 어느새 코앞까지 날아온 가람의 검에 찔리는 순간 모조리 무의미해질 것임을 그는 직감했다.

[죽음이 다가옵니다.]

초월자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신이 될 존재의 궁극은, 능력치라는 개념과 시스템이라는 규칙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힘을 내포하고 있던 것이다.

‘원덕구!’

그리드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미래를 짊어지고 있음을 상기한 그는 어떤 생각이나 계산을 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한 명의 기사를 떠올렸다.

내게 잠시 힘을 빌려준다고 해서 어떤 위험을 겪을 리 없는 절대적인 실력자.

신조차도 경계한다는 ‘혜안’을 지닌 대륙 최고의 기사.

전설, 메르세데스였다.

[<덕공>의 힘으로 당신의 기사 ‘메르세데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메르세데스가 당신의 요청에 기꺼이 응합니다.]

[메르세데스의 <혜안>이 당신의 눈에 이식됩니다.]

그리드가 보는 풍경이 바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찾을 수 없던 활로를 발견한 그가 보폭을 옮기며 상체를 낮췄다.

동시에 열망의 무아검을 위로 휘둘렀다.

콰드득-!!

공방일체의 검격.

‘완전’이라고 논해도 좋았을 가람의 평생이 메르세데스의 힘을 등에 업은 그리드의 일격에 무너진다.

그리드의 심장을 꿰뚫었어야할 가람의 검이 산산이 조각났고 가람의 손아귀가 찢겨져나갔다.

“큭....?”

가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를 경악케 만드는 건 너덜너덜해진 오른쪽 팔로부터 전해지는 고통 따위가 아니다.

그리드의 깊은 눈동자가 그에게 고통 이상의 혼란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낱낱이 파헤쳐진다.

내 운명과 삶이 철저히 분석 당한다.

고작 인간에게.

고작 인간과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발가벗겨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화르륵!

주작의 태동이 강해질수록 통제하기 어려워졌던 주작의 숨결이 급기야 폭주를 일으킨다.

감당하지 못한 가람의 폐부 곳곳에 구멍이 뚫렸고 혈액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가람은 일체 내색하지 않았다.

현무의 숨결을 운용하여 주작의 숨결을 억누르는 한편 백호의 숨결을 운용하여 폐부에 뚫린 구멍들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리드는 가람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엿보고 있었다.

혜안의 힘이었다.

[‘잊힌 신의 저주’ 효과로 대상의 집중력과 행동력이 분산됩니다.]

[대상의 모든 회복 효과가 금지되고 모든 반응 속도가 58퍼센트 하락합니다.]

[현재 활성화 되어있는 당신의 스킬 중 연살화극을 제외한 모든 스킬이 대상에게 반드시 적중하며 치명타와 약점 공격이 발생합니다.]

알림창이 먼저 떠오르면 그리드가 이에 따라서 움직이는 방식이 아니다.

그리드는 대상의 능력치, 스킬, 상태를 소상히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행동 방식을 추천해주는 혜안에게 몸을 완전히 맡기고 있었다.

전문 용어로 ‘오토’다.

대장장이가 아이템을 오토 제작할 경우 모든 동작이 알아서 진행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츠카카칵-!

퍼엉!!

콰자작!!

주작의 방해를 받아 약화된 가람을 그리드의 모든 검무가 순차적으로 난도질한다.

가람은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혜안 때문만이 아니다.

[<혜안>이 당신의 억제 된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에 귀속 된 <열망의 무아경> 효과가 발생합니다.]

[20초 동안 공격력이 3배 상승하고 회피력이 99퍼센트가 됩니다. 단, 방어력은 0이 됩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적과 전투 시 생명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매우 낮은 확률로 발동하는 조건부 패시브 스킬.

위험도가 너무 높은 탓에 억제되어 있던 그 힘이 혜안에 의해 발생하자 그리드의 공격력은 가람의 공격력마저 아득히 초월하게 되었다.

퍼엉-!

콰자자작!!

그리드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계속 허용하는 가람의 생명력 게이지가 순식간에 바닥까지 떨어진다. 어떻게든 저항해 보지만, 그의 발악적인 반격은 단 한 번도 그리드에게 적중하지 못했다.

퍼퍼퍼펑!!

쉬지 않고 연계되는 검무로부터 비롯된 브라함의 마법들이 남기는 잔광이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에 은하처럼 새겨진다. 바삐 움직이던 초국의 모든 신민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잠시 넋을 잃었다.

“....아름답네요.”

궁궐을 가득 채운 환자들을 보살피던 헤라가 문득 들려온 폭음을 듣고 하늘을 올려봤다가 중얼거린다.

“신살자....”

초왕의 부름을 받고 달려와 주작궁의 부활을 돕던 학자들과 선비들이 마른 침을 삼킨다.

“판덕공이시여!”

그리드가 한속봉의 가족과 판게아 백성들을 구출했을 때부터 그에게 큰 감사를 느끼고 암암리에 도와온 관료들이 숨죽여 읍했다.

끝으로.

“부디.... 부디 힘내주시오, 그리드.”

초왕은 간절히 응원했다.

그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무사들과 함께 뛰쳐나가 그리드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부활 중인 주작을 수호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환국의 추종자들의 습격에 대비해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가람의 발을 묶고 있는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초왕의 역할 또한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초왕은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그리드를 위해서 기도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지금 나는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여태껏 인간들을 기만해온 신들에게 기도를 올려봐야 의미가 있을까?

아직 부활하지 못한 주작 신께 기도를 올린다고 한들 주작 신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까?

초왕의 혼란이 커지는 그때였다.

콰앙-!!

아득히 먼 하늘에서 뒤엉킨 채 싸우던 인영 중 하나가 궁궐 지척까지 날아와 추락했다.

“파, 판덕공!”

“그리드 전하!!”

초국 신민들이 알기로 가람은 신.

인간은 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므로, 초국의 모든 신민들은 지금 막 지상에 추락한 존재가 당연히 그리드인 줄 알았다.

그를 쫓아 하강하고 있는 저 높은 하늘 위 존재가 가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자욱하게 번졌던 연기가 걷히며 드러나는 피투성이의 인물은 그리드가 아닌 가람이었고,

“-연살화극.”

푸른 검기의 꽃잎을 나부끼며 강림하는 인물의 정체가 바로 그리드였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리드가 가람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

“아아...!”

두 손을 모은 초왕이 다시금 기도를 시작했다.

여태껏 인간을 기만해온 오존과 양반을 향한 기도도, 아직 부활하지 못한 주작 신을 향한 기도도 아니었다.

그의 새로운 기도의 주체는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가람을 추락시킨 그리드의 모습을 통해서 새로운 신의 탄생을 엿본 것이다.

한편.

‘큭....! 젠장!’

지상의 가람을 향해 쇄도 중인 그리드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지고 있었다.

[열망의 무아경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원덕구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혜안 효과가 소멸합니다.]

연달아 나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혜안으로부터 비롯됐던 오토 효과가 멈춰버리자 연살화극의 검무를 추며 하강하던 그리드의 속도가 미묘하게 느려졌고 이는 가람에게 커다란 기회로 작용했다.

“놈!!”

무려 2분 동안 그리드에게 일방적인 굴욕을 맛봤던 가람.

그리드의 빈틈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두려움마저 느껴가던 그가 그리드의 변화를 순식간에 포착하고 반격에 나섰다.

체내외의 상처를 억제 중인 백호의 숨결과 검 끝에 맺힌 현무의 숨결을 유지한 채 청룡의 숨결까지 개방하여 승천, 나부끼는 검기의 꽃잎들을 모조리 돌파하며 그리드에게 날아가 검을 꽂았다.

“커윽!”

그리드가 가람에게 이기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첫째, 스탯의 차이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레벨보다 높은 능력치를 지녔다고 해도 반신의 영역에 도달한 네임드 NPC의 능력치와 비할 순 없었다.

물론 온갖 버프 스킬과 화공, 펜릴의 힘 등으로 격차를 좁히는 건 가능했지만 어디까지나 버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의 이야기다.

지속 시간이 끝나고 다시 버프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간극은 그리드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콰자작!!

연살화극의 적중에 실패하고 역으로 반격을 허용한 그리드가 지상에 안면부터 처박혔다.

곧바로 그를 뒤따라 내려와 목덜미를 짓밟은 가람이 이죽거렸다.

“무지하고 나약한 놈들이 꼭 희망을 논하는 법이지. 네놈은 주작의 부활까지 버티면 작금의 사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크나큰 착각이다.”

“....?”

그리드의 몸이 꿈틀거린다.

땅에 처박힌 고개를 어떻게든 들기 위해 버둥거리는 그의 꼴을 마치 벌레 같다고 느낀 가람이 슬며시 발을 치웠다.

그러자 드디어 고개를 들 수 있게 된 그리드가 반사적으로 궁궐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궁궐 위에 떠있는 두 명의 사내를.

청색 도포를 입은 그들은 팔짱 낀 채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초창기의 가람과 꼭 닮은 모습들이다.

“양반...!”

그것도 치우의 시련을 통과한 놈들이 분명하다.

가람과 마찬가지로 신이 되어가는 단계에 있는.

‘이건 안 된다....!’

희망이 없다.

가람 하나가 문제가 아니었다.

의욕을 상실한 그리드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무지하고 나약하다는 이유로 희망조차 품지 않으면 쓰레기밖에 안 된다. 바로 네놈들처럼 말이다.”

콰작-!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빛의 창이 팔짱 끼고 서있던 양반들의 몸을 관통했다.

“....!?”

가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드에게 잠시 압도당했을 때 이상의 충격에 휩싸인 기색이었다.

콰앙!!

창에 관통 당한 양반들이 피를 쏟으며 추락했고,

파지직!

마력의 파장과 함께 은발의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활 중인 주작, 염원하는 초국 신민들, 일단 상처부터 치유하고자 발버둥치는 양반들....

그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뻔히 알고도, 은발의 미남자는 단지 그리드를 바라볼 뿐이다.

“고약한 벌레들이 꼬였구나.”

“브라함....!”

쏴아아아아....

브라함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감히 덤벼오는 양반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포이즌을 걸었다.

대상을 중독 시키는 마법.

본래라면 반신에게 통할 리 없는 마법이다.

하지만 브라함의 포이즌은 이제 히드라의 맹독을 품고 있었다.

“꿀럭....!”

파랗게 질린 양반들이 피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가람과 초국의 모든 신민들, 그리고 심지어 그리드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브라함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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